야근의 연속이던 어느 날,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논란을 불러왔던 <다이빙 벨> 시사회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나는 <다이빙 벨>에 관심이 있었다기보다는 오랜만에 극장 나들이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손을 번쩍 들었다. 가을바람을 맞으며 극장에 도착했고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2시간 뒤, 영화가 끝난 극장에 가득한 정적처럼 내 마음도 무거워졌다.
영화는 잠수사가 찍은 세월호 내부의 모습으로 시작되었다. 잠수사의 숨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적막한 세월호 내부에는 각종 부유물과 집기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화면 넘어 막막함이 밀려왔다. 그 속에서 '다이빙 벨'이 등장한다. 말로만 듣던 '다이빙벨'은 최첨단 장비의 느낌이었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실제로 본 다이빙벨은 말그대로 그냥 '종'이었다. 공기가 주입되는 쇳덩어리였다.
그 모습을 보니 '다이빙 벨은 사기'라는 항간에 떠도는 말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처음엔 이 영화가 '실패한' 다이빙 벨을 옹호하려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담고 있었다. 진실이 두려운 정부와 언론에 대한 비난이 가득했다.
정부는 세월호 참사 당시, 1억이 넘는 자비를 들여 진도로 온 다이빙 벨과 이종인 알파인 기술공사 대표를 끊임없이 저지한다. 유족들의 바람과 기대가 있었지만 그들을 속이면서까지 해경 자신들의 영역에 아무도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유족들의 호소로 다이빙 벨을 허가한 후에는 이들을 향해 위협을 가하기까지 한다.
나는 음모론이 세상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해경의 배가 다이빙 벨이 실린 배를 들이받는 장면'을 보고 음모론이 실제일 수도 있다고 믿게 되어버렸다. 이처럼 영화 <다이빙 벨>은 너무나 생생하게 정부의 음모를 보여줬고, 진실을 마주하니 너무도 불편했다.
하지만 영화의 문제의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언론의 존재가치에 대한 의문도 제기하고 있다. 현장에 끌고 갔던 다이빙벨을 해경의 반대로 인해 가지고 돌아오는 이상호 기자는 '다이빙 벨 구조 실패'라는 제목의 기사들이 쏟아지는 것을 발견한다. 이상호 기자를 제외한 어떤 기자도 그 배에 타지 않았고, 다이빙벨로 구조조차 시도해보지 못한 상황에서 구조실패라는 기사가 터진 것이다. 언론은 진실을 보지 않고, 정부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정부가 언론을 이용해 조작을 일삼는다는 것에 영화를 보던 나도 화가 났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도 누구하나 박수를 치지 못했다. 영화 내내 훌쩍이던 사람들도 조용했다. 애써 외면하고 싶은 사실을 보았기 때문이다. 정부는 구조에 최선을 다하고 있고, 다이빙 벨은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믿는 게 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이빙 벨의 실패는 국민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정부와 그런 '정부의 입' 역할에 충실한 수많은 언론이 만들었다. 그 명백한 진실 앞에 나 역시도 함께 할 말을 잃었다.
영화가 이토록 사실만을 보여주고 있지만, 여전히 <다이빙 벨>을 음모와 사기극이라고 보는 시선이 많다. 그리고 상영을 결정한 부산국제영화제를 싸잡아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진실을 믿지 못하는 이 사회의 골병이 치유 가능한 것일까'라는 생각을 했고, 영화가 끝난 불금을 그렇게 이어진 끝없는 생각들로 불태웠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민언련 웹진 홈피(e-시민과 언론)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글쓴이는 민언련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