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 해제 | 제목 '들꽃'은 일제강점기에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항일 독립전사들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필자가 이역에서 불꽃처럼 이름도 없이 산화한 독립전사들의 전투지와 순국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으로, 그분들의 희생비를 찾아가 한 아름 들꽃을 바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 작가의 말 |
강화도조약 조선은 1876년 일본의 강압에 따른 강화도조약으로 개항한 이후 계속 비틀거렸다. 1894년의 갑오농민전쟁에 이어 그 이듬해 을미사변, 단발령, 1896년은 아관파천으로 국난을 맞았다. 조선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국호 명칭으로는 대영제국이나 대일본제국과 동렬에 서려고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대한제국은 그 이름에 걸맞은 자주국이 되지 못하고 한낱 강대국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그것은 이름뿐, 부국강병의 나라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개항 이래 가장 집요하게 침략의 마수를 뻗친 나라는 다름 아닌 이웃 일본으로, 그들은 '동양평화'니 '보호'니 하는 허울 좋은 이름을 내세우며 계속 조선 조정에 잽을 마구 날렸다. 1905년 을사년에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 황제와 조정대신들을 위협하여 강압적으로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을 체결했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초대 통감이 되었다. 통감부는 조선의 외교권뿐 아니라, 조선의 내정도 관장하여 조선(대한제국)은 껍데기로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1907년 7월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로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 시켰다. 그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숨통을 죄기 위해 법령제정권, 관리임명권, 행정권 및 일본 관리 임명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압으로 체결한 뒤 대한제국 군대까지 모두 해산시켜 버렸다. 그제부터 조선은 식물인간처럼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 채 죽는 날만 기다리는 꼴이었다. 이런 가운데 나라의 정세를 읽은 을사오적을 비롯한 지배계층들은 비틀거리는 조선왕조에 비수를 꽂고 매국노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죽음을 각오하고 나라를 되살리겠다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흰옷 입은 백성들은 화승총, 죽창, 칼과 낫을 들고 다시 일어섰다. 그들은 갑오, 을사 전기의병에 이은 후기 의병들로 을사, 정미의병들이었다.
십삼도창의대진소 1907년 11월, 허위·이인영 두 의병 지도자는 전국 각지 의병장들에게 의병부대를 통합해 연합의병부대와 통합사령부를 창설한 다음 서울로 진격하자는 격문을 발송했다. 이 격문에 호응하여 전국 각지로부터 의병들이 경기도 양주로 속속 집결키로 했다. 총 48진 약 1만 명에 이르렀다. 그 내역을 보면 강원도 민긍호 의병부대 2천명. 이인영 부대 1천 명을 비롯하여 약 6천 명이었고, 경기도 허위 부대 약 2천 명, 충청도 이강년 부대가 5백 명, 황해도 권중희(權重熙) 의병부대가 5백 명, 평안도 방인관(方仁寬) 의병부대가 80명, 함경도 정봉준(鄭鳳俊) 의병부대가 80명, 전라도 문태수(文泰守) 의병부대가 약 1백 명 등이었다. 양주에 집결한 전국 의병장들은 12월에 회의를 열어 통합의병부대로서 십삼도창의 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를 만들고,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허위를 군사장에 추대한 뒤 전체적인 편제를 갖추었다. 십심도창의총대장 이인영 전라창의대장(전라도) 문태수 호서창의대장(충청도) 이강년 교남(嶠南)창의대장(경상도) 신돌석(申乭石) 진동(鎭東)창의대장(경기, 황해도) 허위 관동창의대장(강원도) 민긍호 관서창의대장(평안도) 방인관 관북창의대장(함경도) 정봉준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약간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교남창의대장 박정빈, 진동창의대장 권중희로 이들은 서울진공작전 개시 직전에 개편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서울진공작전
십삼도창의대진소는 전체적인 편제를 정한 직후부터 즉시 서울진공작전에 돌입하였다. 이때 허위는 휘하의 각 부대별로 서울 동대문밖에 집결하도록 조치한 뒤, 스스로 3백 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일제 통감부를 깨부수고자 1908년 1월말 동대문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하였다. 선발대는 후속 대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정규 일본군의 선세 공격을 받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구식무기로 무장한 의병대들은 기관총 등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뚫을 수가 없었다. 이 명재경각의 급박한 상황에서 후발 총대장 이인영의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이인영은 아버지의 집상을 위해 문경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불행한 사태가 일어났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장수가 적진 앞에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귀향하는 일은 그 당시 유생으로서 허용될 일로 여길 수 있으나, 이런 점은 바로 국난을 타개치 못한 근본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허위는 이인영으로부터 전권을 물려받았지만 일본군에게 사전 정보 누출로 그들은 오래 전부터 서울 외곽의 철저한 방비, 한강 선박 운행 금지 등으로 후속 의병부대의 서울진공 참전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허위의 서울진공 선발대 3백 명은 전력의 열세로 끝내 패퇴하고 말았다. 이 작전은 전술적으로 실패하였다. 화승총이나 죽창으로 무장한 조선 의병이 정규 일본군과 대적하기에는 당랑거철(螳螂拒轍)과 같은 무모한 도전이었다. 전술적으로 보면 당시 의병들은 일본군과 맞선 대응보다 게릴라전과 같은 유격전이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의병들의 그 기개만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 서울진공 연합작전 실패에도 신돌석, 전해산(全海山) 등, 각 지방 의병부대의 항전은 망국의 그날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그칠 줄 몰랐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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