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
'아빠, 나랑 엄마랑 먼저 갔다고 너무 슬퍼하지 마. 그리고 따뜻하게 입고 잘 차려 먹어. … 아빠, 그동안 막 굴어서 미안해. 나랑 엄마랑 의식이 있어도 깨우지 말고 행복하게 가게 해 줘. 너무 미안해하지는 말아. 담임선생님한테는 사고로 죽었다고 연락해 줘.' 엄마와 같이 죽어간 12살 아이의 유서를 보면서 몇 번이나 머리를 흔들었다. 우선은 내 아이들의 얼굴이 어른거렸기 때문이고, 유서 내용이 무척 담담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차라리 죽기 싫다고 발버둥이라도 치고,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 사회와 엄마 아빠에 대한 원망을 유서에 쏟아냈더라면 아이다웠을 것이다. 독백 같은 유서를 써놓고, 연탄가스가 차오르는 방에 엄마 손을 잡고 누워있는 아이 모습을 생각하니 저절로 눈물이 났다.
'생활고에 일가족 자살'이라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전해진 11월 3일. 대다수 언론들은 '생활고'와 '마이너스 인생'에 초점을 맞춰 복지 정책과 저임금·실업 문제를 집중 거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음날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가족에게 남편과 아내 명의의 빌라와 아파트 15채가 있고 제2금융권에 이것들에 대한 근저당이 9억 원이나 설정돼 있다는 소식이었다.
언론들은 '경매 과욕이 참사를 불러왔다'며 관련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직 경찰 수사가 끝나지 않았지만, 경매에 나온 빌라나 아파트를 낙찰 받아 전세로 내주고, 전세금과 담보대출을 이용해 또다시 빌라는 구입하는 방법을 반복하다가 수많은 주택을 소유함과 동시에 그에 맞먹는(어쩌면 더 많을지도 모를) 빚을 지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재산 불리기 궤적에 따라 붙는 '어두운 그림자'
이 사실이 알려지자, 복지와 일자리 정책의 문제점을 거론하던 보수신문과 경제지의 논조가 확 바뀌기 시작했다. '경매 과욕'과 '무리한 투자'가 원인이라며, 다니던 회사에서 받던 월급 210만 원 정도면 생활은 가능하다는 분석도 이어졌다. 한마디로 개인의 과욕이 참사를 불러 왔다는 지적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들이 망자가 되었다고 해도 '과욕'을 두둔할 생각은 없다. 더구나 피지도 못하고 꺾인 12살 딸과, 망자의 집에 전세로 살다가 전세금도 못 받고 선순위 채권 은행에 의해 거리로 내몰릴 전세세입자를 생각한다면, 다시 살려서라도 책임을 물어야 응당한 일이다.
그렇다면, 망자에게 화살을 돌리면 그만인 걸까? '지금이 부동산 투자에 최적기', '집값 오름세'라고 연일 투자를 권해왔던 보수언론과 경제지를 비롯해 이자를 낮추고 대출을 쉽게 만들어 돈 빌려 줄 테니 집을 사라고 부추겼던 '이명박근혜' 정권, 집값 한 번 오르면 그깟 은행 이자가 대수냐며 담보 대출을 부추긴 은행들... 이들 모두 공범이다. 어른들의 죽음은 자살일지 모르지만, 12살 아이는 부모의 탐욕과 탐욕을 부추긴 세력들에게 희생당한 피해자다.
부동산 투자의 환상을 가지고 '경매→낙찰→전세+은행대출→경매'로 반복되는 재산 불리기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평행선처럼 따라 붙는 어두운 그림자를 보게 된다. 이명박 정권에서 박근혜 정권으로 이어지는 '대출 권유와 집값 띄우기' 정책이 그것이다. 어쩌면 이들 부부는 이명박근혜 정권 부동산 정책을 철저하게 맹신한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른다. 집사라니까 집사고, 대출 받으라니까 대출을 겁내지 않았던 15채 빌라 소유 자산가이자, 빚에 눌려 죽어간 하우스푸어... 이들 부부의 종말을 개인의 탐욕만으로 치부해서 안 되는 이유는, 현 정부가 여전히 이런 정책을 무한 반복하기 때문이다.
가계부채 1000조... 얼마나 더 죽기를 바라나 "향후 소득이 예상되는 취업준비생과 기초생활수급자 대상으로 내년 1월부터 1년간 신청을 받아 연 2%의 저리로 매월 30만 원씩 최대 2년간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 JTBC인천 모녀가 연탄불을 피우고 죽어간 10월 30일, 정부는 서민 주거비 부담 완화 대책을 발표했다. 결국 저금리로 월세 비용을 빌려주겠다는 건데, 안 그래도 마이너스 인생을 사는 서민들에게는 오히려 폭탄이 될 수 있는 정책이다. 혹 이 정의 도움을 받은 서민이 대출금을 못 갚아 또다시 방안에서 연탄불을 피운다면 그때도 이들이 무능만 탓할 것인가.
1천조가 넘는 가계 부채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전월세가 폭등해도 대출, 집 사라고 대출, 반값 등록금 대신 학자금 대출을 권한 정부. 어이가 없는 건 먹고 살기 힘든 영세 상인에게 시계 풀어주며 미소금융을 찾아 가라는 대통령도 있었다는 거다. 2007년 말 665조였던 가계 부채 규모가 7년 만에 1040조를 넘긴 배경엔 온갖 민생 요구를 대출로 무마시킨 이명박근혜 정부가 있다. 대출은 쉽게, 그러나 갚을 방법은 절대 안 알려주는 정권. 서민을 위한 정권이라면 이래서는 안 된다.
"현 경제상황에서 가계부채는 감내할 수준은 된다. 시스템 리스크로 갈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한다. 과거 가계부채가 7%대로 증가하다가 5%대로 낮아지는 등 금리가 떨어지면 가계의 부담은 줄어들 것이다. 경각심을 갖고 관리 하겠다."국감 마지막 날인 지난달 27일 야당의원들이 가계부채 증가에 대한 의견을 묻자 최경환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같이 답했다. 한국은행도 '아직은 괜찮다'며 정부의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아니, 어리석고 잔인한 인식이다.
최 장관의 답변을 들으며 영화 <남영동 1985>에서 고문기술자 이두한이 김종태의 머리를 욕조에 처박고도 죽음에 이르지 않게 하려고 시간을 재던 모습이 떠올랐다. 빚더미에 올라 전전긍긍하는 서민들에게 되레 대출을 권하는 정부는 이두한이 보여준 잔인함과 별반 다르지 않다.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빚에 내몰려 죽어야만 "위험하다", "안 괜찮다"고 진단을 내릴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죽어야 끝나는 빚의 굴레... 이래도 대출 강권할 건가인천 일가족 자살 사건은 이명박근혜 정권의 집값 띄우기 정책의 종말을 알리는 서글픈 신호다. 1천조가 넘는 가계대출을 방치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빚의 희생양이 될 것이라는 전조 현상이기도 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최근 시정연설에서 '경제'란 단어를 59번이나 언급했다는 사실이 화제가 되었다. '경제'를 강조한다고 해서 '경제'가 살아나는 건 아니다. 지난해 시정연설 때 경제를 46번 언급했다고 해서 내수가 침체되고 서민 살림살이가 뒷걸음친 것도 아니다.
집값을 띄우고 부채로 경제를 살리겠다는 발상, 이제 정말 접을 때가 됐다. 거저 주는 것처럼 대출을 강권하는 정치, 제발 그만 두시라. 12살 아이의 죽음 앞에 꽃 한 송이라도 놓고 이 아이가 살고자 했던 내일을 생각해 보시라.
덧붙임 : 엄마 따라 스스로 목숨을 던진 12살 이름 모를 딸아. 기성세대로서 죄책감이 든다. 용서 말거라. 마이너스 인생, 사는 게 아니라 버티다가 끝끝내 죽음의 문턱을 넘게 만든 무서운 자본의 정치. 그 정치를 지탱하는 기성세대의 이기와 무지를 용서 말거라. 12살, 펴 보지도 못하고 꺾인 이름 모를 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