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여중생 장갑차 압사사건, 김선일씨 피살사건부터 최근에는 강정마을 제주해군기지 반대 운동, 미군에 의한 평택 민간인 수갑 사건 법률대응, 미군주둔비부담금 특별협정 대응, 기지촌 피해 여성들에 대한 국가배상청구소송, 용산미군기지 환경오염에 이르기까지. 이 사건들은 모두 '미군'과 관련이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민변 미군문제연구위원회와 함께 대표적인 불평등조약으로 꼽히는 '한미 SOFA' 개정이 왜 시급한지, 조항별로 꼼꼼히 따져봅니다. [편집자말] |
최근 아주 가까운 친척 어르신이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되는 일을 경험했다. 근자에는 가끔씩 밖에 볼 수 없었지만, 내가 법대에 갔을 때 당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입학하던 해 등록금을 선뜻 내 주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데 막상 범죄의 피해자가 되고 보니 억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피의자가 죽인 사실은 자백했으나, "자신을 무시해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행이라고 주장한 것. 노인 여자가 빈집에서 미리 준비한 흉기에 수차례 찔려 아무런 반항도 못하고 죽었는데, "우발적으로 한 일"이라는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힘들었다.
피해 가족들은 최선을 다해 당시의 정황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고, 법원은 유족들이 파악한 내용을 경청했다. 형사사건은 결국 검사와 가해자의 다툼이 되기 때문에 자칫 피해자의 의사가 전달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헌법과 형사소송법은 피해자의 재판절차진술권을 보장하고 있다.
재판절차진술권의 딱 하나 예외
재판절차진술권이란? |
대한민국 형사소송법상의 권리로 범죄로 인한 피해자가 당해 사건의 재판절차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자신이 입은 피해의 내용과 사건에 관하여 의견을 진술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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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예외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피해자가 아무 말도 할 수 없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한미 SOFA(대한민국과 아메리카합중국간의 상호방위조약 제4조에 의한 시설과 구역 및 대한민국에서의 합중국 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 아래 SOFA)이다.
한미 SOFA는 '미군의 공무집행중에 일어난 범죄'에 대해 미군이 1차적 재판권을 갖도록 규정하고 있다(SOFA 22조 3. 가 2). 즉 공무집행 중에 발생한 사건은 미군이, '공무' 외에서 일어난 사건은 대한민국이 재판권을 행사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위 조항 때문에 벌어진 일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2002년 양주에서 훈련 중인 미군 장갑차에 깔려 사망한 '미선·효순' 사건이 그것이다. 그 사건은 단순히 훈련 중 과실로 발생했다고 볼 수 없는 강력한 정황이 있었다. 그런데도 피해자들은 그 사실을 단 한 번도 우리 법원에서 말하지 못했다. 반면 가해자들은 자신들의 군사법정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표표히 한국을 떠났다.
우리 헌법과 형사소송법은 피해자의 재판절차진술권을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헌법재판소 역시 "교통사고처리 특례법 4조 제1항 본문 중 업무상과실 또는 중대한 과실로 인한 교통사고로 말미암아 피해자로 하여금 상해에 이르게 한 경우 공소를 제기할 수 없도록 한 부분"에 대해서 "중상해를 입은 피해자의 재판절차진술권의 행사가 근본적으로 봉쇄된 것은 사익이 현저히 경시된 것으로서 법익의 균형성을 위반하고 있고, 업무상 과실 또는 중대한 과실에 의한 교통사고로 중상해를 입은 피해자의 재판절차진술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판시한 바 있다(2009. 2. 26. 2005헌마764, 2008헌마118(병합) 전원재판부).
즉, 미군이 공무 중에 일으킨 범죄라 하더라도 그 결과가 중상해 혹은 사망에 이른 경우까지 재판권 행사를 전혀 할 수 없도록 한 것은 피해자의 재판절차진술권을 근본적으로 봉쇄하여 '위헌'이란 말이다. 따라서 적어도 그 결과가 중상해 혹은 사망에 이른 경우에는 공무집행 중에 발생한 사건이라도 한국의 재판권을 인정하여 피해자가 법원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증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미군범죄 사건에 있어 피해자가 자신의 억울함을 전혀 이야기할 수 없는 경우가 또 있다. 바로 공무 중에 행한 범죄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미군이 '공무증명서'를 수사기관에 제출하는 때이다. 한미 SOFA '합의의사록 제3항 (가)에 관하여'에는, 1차적 재판권 여부를 결정하는 공무증명서는 미군장성이 발행하고, 이에 대해 일선 검사도 이의 제기를 할 수 있지만, 일정기간 동안 상호 합의에 이르지 못할 때에는 최초 발행한 증명서가 결정적 효과를 갖는다고 명시되어 있다.
지난 2012년 평택에서 발생했던 미군헌병에 의한 민간인 불법체포 사건이 바로 그 사례다(관련기사 :
가해미군이 피해자에게 수갑... 왜 아직도 이 모양인지?). 사건 발생 3일 만에 제임스 서먼 주한미군 사령관이 "매우 유감스럽다. 한국민과 지역사회에 대해 사과를 표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긴급 협의회도 가졌다. 그러면서 뒤로는 한국 검찰에 '공무중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증명서를 제출하였다. 우리 법무부장관은 사건 발생 1년이 훨씬 지나서 '재판권 불행사' 결정을 했다. 불법체포 피해자들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미국에 아낌없이 주는 나무, 한국
그런데 일미 SOFA는 한미 SOFA와 다르다. 일미 SOFA는 '공무' 판단과 관련하여 일본 형사소송법 제318조(법관의 자유심증주의)를 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독일보충협정 역시 파견국의 최고관계당국이 파견국법에 기초하여 공무증명서를 발급하면, 독일 법원과 관계 당국이 공무인지 아닌지를 결정하게 되어 있다. 재판권 행사 주체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와 관련해 자국 법원의 관여를 전혀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법치주의와 사법주권 차원에서 심각한 문제다.
그 이외에도 SOFA의 형사재판권 조항은 특별한 지위를 부여 받는 적용 대상자를 지나치게 확대하였다. 또 피의자가 부대 내로 들어간 경우에는 그 진술 및 신병의 확보가 어려운 등 우리 형사소송법 체계와 전혀 맞지 않는 특혜 규정이 다수이다. 최대 피해자인 우리 국민들(특히 여성과 아동, 청소년)을 보호하기에 충분한 절차와 내용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이런 불평등과 위헌적 요소는 우리가 감수해야 할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 미국은 현재 한국을 비롯한 80여개 국가와 SOFA를 체결하고 있다. 그러나 각 국가와 체결하는 SOFA는 개별 국가의 정치적·사회적·문화적·법적 환경 등에 따라 나라마다 차이가 난다. 한미 SOFA는 결국, 미국이 우리 국민과 사법제도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동시에 우리 국민을 국가가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하는 정부의 의지와도 연관된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 정부는 미국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이다. 미국에 반대하는 모든 목소리, SOFA 개정운동조차 '불순한 것'으로 몰아붙이기에 여념이 없다. 결국은 현명한 국민들이 권리 위에 잠자지 않고 열심히 목소리를 내는 수밖에 없다. 범죄의 피해자가 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가능한 내 문제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는 변호사로, 민변 미군문제연구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