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네들, 타조 맞지?"
몸통은 큰데 날개가 퇴화해서 날지 못하는 새, 타조가 보였다. 송강누리길을 걸으려고 테마동물원 쥬쥬 앞으로 간 건 지금까지 열 번이 넘는다. 하지만 단 한 번도 타조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타조들이 있었다. 물론 우리 안에 갇힌 타조들이었다.
동물원에 가본 기억이 까마득한지라 오랜만에 보는 타조는 신기했다. 한데 이 녀석들이 사람을 보고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가까이 다가와서 주둥이를 내민다. 같이 걷던 창식씨가 길옆의 풀을 뜯어 타조에게 내미니 받아먹는다. 그러자 우리 저쪽에 있던 타조 한 마리가 다가왔고, 연이어 다른 쪽에 있던 타조들이 몰려온다. 전부 네 마리나 된다.
같은 길을 걸어도 보이는 풍경이 계절마다 다르고, 날씨마다 다르듯이 만나는 동물도 달라진다. 이번에는 타조를 만났으니 말이다. 아프리카에서 서식한다는 타조를 송강누리길에서 만난 것이다. 이건 행운이야.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타조들에게 손 흔들어주고 우리는 공릉천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가을이 깊어가느라 기온이 뚝 떨어졌지만, 하늘은 맑았다. 날씨가 차가워진 탓일까? 공릉천에는 새떼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청둥오리들은 떼 지어 물 위에 앉아 있었고, 서너 마리의 백로가 공릉천 수면을 차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공릉천 주변의 갈대는 빛이 바랬고, 수면은 잔잔했다. 멀리 북한산이 보였다. 걷기 좋은 날씨라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 날이었다.
지난 14일, 송강누리길과 고양동누리길을 이어서 걸었다. 송강누리길은 6.6km, 고양동누리길은 7.1km로 두 길의 거리는 13.8km가 된다. 꼬박 4시간을 걸었다. 이날 도보여행에는 고양시 녹지과 정창식씨와 최한범씨가 동행했다.
깊어가는 가을은 길 위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장미는 시들면서 붉은 열매를 남겼고, 배추는 속이 꽉 찼다. 높은 가지에 달린 감들은 까치밥이 될 채비를 마쳤다. 그리고 몇몇 집들은 시래기를 말리고 있었다. 높은 나뭇가지에 시래기를 매단 집도 있고, 대문에 널듯이 매단 집도 있었다. 빨래 건조대에 시래기를 말리는 집도 보았다. 그런 풍경, 도시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렵지.
가을은 그렇게 깊어가고, 그런 풍경은 길 위에 나선 이들만이 운 좋게 볼 수 있다. 깊어가는 가을이 길 위에 서성이고 있기 때문인지 이날, 우리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었다. 느린 동작을 화면 위에서 재연하듯이 그렇게.
마을길로 접어들자 추수가 끝난 논이 넓게 펼쳐졌다. 물구리천을 지나고 오래 묵은 느티나무를 지나고 월산대군 사당 앞도 지났다. 예전 같으면 문이 굳게 닫힌 월산대군 사당 안을 들여다보고 회화나무도 한 번쯤 쓰다듬었겠지만, 이 날은 그냥 무심히 지나쳤다. 그냥,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으므로.
잠시 들른 송강문학관은 내부 수리중이었다. 다음 주쯤이면 새 단장을 하고 문을 연다고 노인 한 분이 알려주었다.
"겨울준비를 하는 중이여."노인은 그렇게 말했고,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문학관 앞을 떠났다. 낙엽이 수북이 쌓인 오솔길을 지나 우리는 다시 공릉천과 만났다. 갈대가 헝클어진 채 우거져 길이 사라진 곳을 걸었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사람이 걷는 곳이 바로 길이지, 하면서.
얼마나 걸었을까, 공릉천에 놓인 돌 징검다리 앞에 우리는 서 있었다. 징검다리를 건넌 뒤, 뒤를 돌아보니 메타세쿼이아가 줄지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필리핀참전비에서 송강누리길은 끝나고, 고양동누리길이 시작된다. 단풍나무가 인도를 따라 줄지어 서 있다. 단풍나무 사이에서 낯익은 노란꽃을 발견했다.
"얘, 개나리잖아." 이런, 겨울을 앞둔 늦가을에 개나리가 피어난 것이다. 가지 몇 개에 몇 십 송이는 족히 되는 개나리가 피었다. 고양동누리길은 겨울이 아니라 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단풍나무 길은 길게 이어졌다. 길옆에는 단풍나무 잎이 낙엽이 되어 흩어져 길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길은 마을을 지나 대자산으로 이어진다. 최영 장군 묘가 있는 대자산에는 예전에 대자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대자산으로 가는 길에는 성령대군의 묘가 있다. 태종의 넷째아들인 성령대군은 열네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홍역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태종은 어린 아들의 죽음을 애통해하면서 대자사를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이 절은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들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아버지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최영 장군 묘로 가는 길에서부터 고양향교까지 이르는 길은 걷기 좋은 숲길이다. 낙엽이 수북하게 쌓인 길을 천천히 걷고 또 걸었다. 겨울을 앞두고 고양힐링누리길을 걸으면서 낙엽, 참 많이 밟는다. 발밑에서 마른 낙엽이 부서지는 소리가 쉬지 않고 들려온다. 이젠 겨울이 와도 전혀 아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중남미 문화원도 가을이 깊었다. 뿐만 아니라 도심에서도 가을이 깊어가는 흔적이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 이제는 내 마음에서도 가을은 저물고 있었다. 선유랑 마을 가는 길에서 옛날 사신들이 다닌 흔적을 찾아본다. 옛사람들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지면서 전설이 되었다.
다섯 시가 넘으면서 산길은 어두워졌다. 해가 일찍 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기온도 뚝 떨어져 으스스한 한기가 발밑에서부터 올라온다. 걷느라 흘린 땀은 얼음처럼 차갑게 식었다. 걸음을 서둘러야겠다. 이대로 날이 저물면, 길이 보이지 않을 지도 몰라.
느리게 옮기던 걸음이 조금씩 빨라지는 건 해가 기울기 시작한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도심으로 돌아가고 있으니, 사위가 어두워지는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도 마음이 조급해지는 건 무슨 까닭일까?
이직 선생 묘소를 지난다. 길 건너편은 길을 따라 산수유나무가 지천이다. 붉은 산수유 열매는 이미 누군가 죄다 따갔다. 그래도 안장고개로 가는 길을 걸을 때면, 산수유 열매를 따러왔던 사람들이 생각난다. 그리고 핏빛으로 붉은 산수유 열매도 떠오른다.
안장고개에서 시간을 확인하니 꼬박 네 시간을 걸었다. 종아리가 묵지근하고 허벅지가 뻐근하다. 기분 좋은 피로감이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오늘밤, 편안하게 잠들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