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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파독광부들을 묘사한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1960년대 파독광부들을 묘사한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영화 <국제시장>이 뜨겁다. 벌써 600만 관객을 모았다고 한다.

한국전쟁과 흥남철수, 파독 광부, 베트남 전쟁, 이산가족찾기 생방송 등 한국현대사의 네 가지 굵직한 사건들로 이어지는 주인공 덕수(황정민 분)의 행적은 '아버지 세대'를 위한 헌사로 읽힌다.

특히 서울대에 입학한 동생의 학비를 벌려고 독일 탄광을 택한 광부들의 애환을 다룬 장면은 가족을 위해 생고생하는 주인공의 1960년대를 상징한다. 덕수는 갱도 가스 폭발 사고에서 목숨을 구하고, 현지에서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는 기쁨을 누리게 되지만, 모든 광부들이 그처럼 순탄한 일과를 보낸 것은 아니다.

'인물현대사'는 광복 후 해외 노동수출 1호로 기록된 파독 광부들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몇 가지 사건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1) 10명 중 1명은 돌아오지 않았다

1인당 국민소득이 77달러에 불과했던 1964년에 파독 광부들은 서독 광부의 평균 연봉 1950달러를 약속 받았다. 3년 고생하면 25배의 돈을 벌 수 있다는 기대에 1963년 8월12일 시작된 파독 광부 1차 모집에는 500명 정원에 1500명 이상이 모여들었다. 지원에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지 못한 부산의 20대 청년이 처지를 비관해 투신자살하는 일도 있었다.

이처럼 치열한 경쟁을 뚫고 독일행 비행기에 탄 광부들의 수는 77년까지 7932명. 그러나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쌀 한 가마니 들 수 있는 체력이나 애국심만으로 독일행이 결정되지는 않았다.

1965년 1월 노동청 직업안정과 주사보 황아무개씨는 지원자 3명을 합격시켜주는 대가로 각 5만 원(지금의 180만 원에 해당)을 받고 간부 박아무개씨에게 그대로 상납했다. 관련자들은 이듬해 2월 3일 구속됐지만 4개월 뒤 집행유예나 선고유예로 풀려났다. 당시 검사가 훗날 5차례 국회의원을 지낸 박찬종 변호사였다.

나라 사정은 안타까웠지만, 해외에 나올 기회를 얻은 사람들도 자기 살 길을 찾아야 하는 시대였다.

1967년 노동청 집계 결과, 그해 10월31일까지 독일로 떠난 광부 2519명 중 계약기간 3년을 채우거나 채우기 전에 캐나다와 프랑스,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제3국으로 거처를 옮긴 사람들의 수가 265명에 이르렀다. 광부 10명 중 1명은 <국제시장>의 주인공처럼 미래가 불투명한 조국으로 돌아오기보다는 또 다른 신천지에서 새로운 삶을 선택했다.

 중앙정보부의 동백림 사건 발표를 대서특필한 1967년 7월8일자 경향신문 1면
중앙정보부의 동백림 사건 발표를 대서특필한 1967년 7월8일자 경향신문 1면 ⓒ 경향신문

2) 이산가족 찾겠다며 북한대사관 문 두드린 광부들의 운명

파독 광부들은 말 그대로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1967년에는 이들이 고국으로 보낸 송금액이 GNP의 2.66%를 차지할 정도였다.

그러나 돈이 전부는 아니었다. 1965년 4월6일부터 3일간 루르 공업지대의 클뢰크너 광산 노동자 150명이 파업을 벌였다. 한 노동자가 작업 중 시비가 붙은 독일인 광부로부터 코뼈가 부러질 정도로 구타당한 것이 원인이었다. 1970년 9월에도 "일하기 싫으면 한국으로 가라"는 야유를 받고 폭행을 당한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하는 등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다.

그러나 파독 광부들과 관련해서 국내외에서 가장 큰 파장을 빚은 사건은 1967년 '동베를린 거점 북한 공작단 검거', 일명 동백림 사건이었다.

7월 8일부터 17일(이하 1967년)까지 중앙정보부가 7차례 수사 발표를 할 때마다 서독에서 북한 공작원과 접선한 광부 간첩들의 혐의가 튀어나왔다.

서독 유학생 신분의 <조선일보> 특파원이었던 이기양씨가 4월 14일 공산국가였던 체코의 세계여자농구대회 취재 도중 실종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서독에 체류 중이었던 관련자 16명 중 김성칠 박성옥 김진택 3명이 파독 광부였는데, 이들에게는 한국전쟁 당시 헤어진 형(박성옥)이나 삼촌(김성칠 김진택) 등의 일가친척이 북한에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국제시장>의 김덕수는 고향 북한에서 헤어진 아버지와 여동생에 대한 기억으로 평생 고통당하는 인물로 묘사되는데, 동백림 사건의 세 광부는 해외라는 이점을 이용해 동베를린 북한대사관을 찾아가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려 했던 것이 화근이 됐다.

이들은 곧바로 국내로 '압송'됐다. 2005년 10월 국정원과거사진실규명위의 면담 조사에서 이들은 "당시 현지 노무관을 대동한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찾아와 '동베를린에 다녀오지 않았냐?', '모든 것을 명확히 해결하기 위해 한국에 가야 한다'고 압박하는 통에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이들은 북한대사관을 다녀온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중정은 "북한노동당에 입당하지 않았냐", "(간첩 교육 받으러) 평양까지 가지 않았냐?", "공작금은 얼마나 받았냐?"고 다그쳤다. 이 과정에서 구타나 물고문, 전기고문 등의 가혹행위가 있었다는 주장이 당시 재판부터 계속 나왔다.

이들 중 가장 심한 고초를 당한 김성칠씨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무수히 고문을 당한 후에도 부인하니 야전용 무전기를 가져와서 양쪽 엄지손가락에 전깃줄을 끼우더니 최아무개가 스위치를 돌리고 주아무개는 고문을 시작하는데 신아무개는 전기가 잘 통하도록 주전자의 물을 내 손에 부었다." - 1968년1월10일 2심 법원 탄원서

"자술서를 쓴 뒤 취조과정에서 때리고 전기고문하고 얼굴에 초산을 뿌린다며 시범적으로 무릎아래에 뿌려 화상입은 것처럼 껍질이 벗겨졌다. 서대문형무소로 이감 전 4일간 조사받으면서 맞지 않은 날이 없었으며 전기고문은 2번 받았는데, 초산을 뿌린 날과 나중에 조사받다가 또 한번 받았다(김씨는 2005년 10월 8일 국정원 조사위의 독일현지 면담에서 초산고문의 흔적으로 한 쪽 무릎 바로 밑에 지름 15cm가량의 화상을 입은 듯한 흉터를 보여줬다고 한다)."

당시 중정 수사관 2명은 국정원 조사위 비공개 조사에서 각각 "당시 일반적으로 배를 차고 뒤통수를 때리는 정도는 있었다고 할 수 있고, 일부 적법절차에 의하지 않는 등 수사 절차상 문제는 있었을 것", "당시 중정에 들어오면 누구나 한 대씩은 맞고 나갔을 수는 있다"고 관련자들에 대한 가혹행위가 있었음을 우회적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1968년 7월 30일 대한민국 대법원(김치걸 판사)은 광부들의 얘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박성옥은 반공법 상의 동조죄 등의 혐의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 김성칠은 징역 3년6월 자격정지 3년6월이 확정됐다.

김진택은 1967년 12월13일 징역1년 집행유예로 출감했고, 박성옥과 김성칠도 1969년 2~3월에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3명 이외에도 동백림사건 관련자 모두가 1970년 광복절 이전에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발표 당시 사건의 성격은 해외거점 북한공작단, 즉 간첩 사건이었고 언론보도를 통해서도 대중들에겐 '동백림사건 피의자 = 간첩'이라는 통념이 자리잡았다. 파기환송 끝에 사형수 2명까지 나왔지만, 사건 발생 3년도 못돼 전원석방으로 유야무야된 이면에는 서독 정부의 강력한 항의가 있었다.

서독 정부는 동백림사건 관련자의 석방과 조기 독일귀환 등을 요구하며 대한원조중단 또는 보류를 경고했는데, ▲ 영남 화력발전소 2호 건립을 위한 차관 1750만 달러 ▲ 중소기업 육성을 위한 차관 1500만 달러 ▲ 농업개발센터에 대한 기술원조 30만 달러 등이 여기에 포함됐다. 이 같은 사실은 2006년 3월 30일 외교통상부가 생산기한 30년 이상의 외교문서를 공개하면서 뒤늦게 드러났다.

해외에 있는 국민을 해당국의 동의 없이 멋대로 납치해오는 정보기관의 못된 '관행'은 1973년 8월 8일 김대중 납치 사건(일본 도쿄)으로 다시 국제사회의 비난 거리가 된다.

3) '명예살인' 참극 빚을 뻔한 일부의 비뚤어진 애국심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29일 "애국가에도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라는 가사가 있지 않나? 최근 돌풍을 일으킨 영화도 보니까 부부싸움 하다가도 애국가가 들리니까 국기배례를 하더라"고 말했다.

그러나 애국심도 과유불급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 1971년 12월 파독광부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사건은 1971년 12월 23일 도르트문트의 광부 송아무개씨가 인근 가게에서 400 마르크짜리 카메라 1대를 훔치다가 가게 주인의 신고로 경찰에 붙잡히면서 시작됐다.

송씨의 절도 행각을 전해들은 동료 광부 몇 사람이 그날 밤 그의 기숙사로 찾아와 "과거 독일에 왔던 일본인 광부들이 절도를 한 동료를 라인강에 데리고 가서 자결하게 했다"는 얘기를 들려주며 그를 압박했다.

'명예살인'의 위협을 느낄 법한 상황에서 송씨는 완강히 요구를 거부했지만 사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튿날 광부들은 자치위원회가 송씨에게 투신자살을 요구할 것을 결의하고 그를 기숙사 부근의 운하로 끌고 갔다.

한편, 현지 경찰은 한국인 광부들이 동료를 사형(私刑)에 처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상태였다. 트럭 2대와 헬기로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해산을 거부하는 광부 150여 명에게 공포를 쏘아 이들을 진압하고, 운하에 빠진 송씨를 구출했다.

그러나 독일 현지방송이 이 사건을 그날 저녁 톱뉴스로 보도하며 사건은 일파만파를 일으켰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오붓한 저녁을 보내려던 독일인들이 경악했다. 절도라는 죄보다도 "나라의 명예를 실추시켰다", "시내에서 독일 사람들에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다"는 등의 얼토당토 않은 대의명분으로 동료의 죄를 다스리려던 한국인 광부들의 태도가 더 큰 성토 대상이 됐다.

알폰스 바이에르 법무차관이 이들의 집단폭행에 유감을 표시하면서 "사건 가담자는 법률에 따라 모두 추방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 것 때문에 '광부 150명 추방설'이 나왔고, 사건은 국내에까지 알려지게 됐다.

그러나 현지에서 큰 화제가 된 사건은 피해자 송씨가 "나 때문에 사건이 확대되어 희생자가 많이 늘어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동료들의 동기를 선의로 해석하기로 했다"며 선처를 호소하고, 주동자 1명이 회사를 그만두는 조건으로 일단락됐다.

사건의 전말을 현지 취재한 동아일보 장행훈 특파원(언론광장 공동대표)은 1972년 1월28일자 기사에서 "이 사건에서 한 가지 배워야 할 교훈은 외국에 나가있는 우리 교포들이 느끼는 소박한 애국심이 잘못하면 오히려 국가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역효과를 가져오기 쉽다는 점을 인식하고 모든 행동에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썼다.


#국제시장#파독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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