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유럽의 강국이었던 오스트리아는 1866년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과 그 뒤를 이은 독일제국의 눈치를 보는 나라로 전락했다.
이런 시대에 오스트리아에 등장하여 진한 감동을 주고 떠난 인물이 루돌프 황태자(1858~1889년)다. 그의 극적인 이야기는 지난 4일까지 국내에서 <황태자 루돌프>라는 뮤지컬로도 소개되었다.
루돌프 황태자는 아버지인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에 맞서 개혁을 추구했지만, 좌절을 겪었다. 그래서 정치적으로는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황실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과감한 사랑을 선택했고, 비극적인 방법으로 그 사랑을 지켜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삶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루돌프는 황실이 맺어준 스테파니 황태자비와의 정상적인 결혼 생활보다는 자기가 진짜로 좋아하는 마리아 폰 베체라와의 사랑을 과감히 선택했다. 일종의 소개팅으로 출발한 두 사람의 사랑은 1888년 하반기에 시작했다. 이때 루돌프는 서른한 살이고 마리아는 열여덟 살이었다. 1888년이면, 잠시 뒤에 언급될 지구 반대편의 박영효가 김옥균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킨 지 4년 뒤였다.
루돌프와 마리아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황태자비를 둔 사람이 새로운 여성을 가까이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불륜이지만, 이것을 무조건 그렇게만 바라볼 수는 없을 듯하다. 벨기에 공주였던 스테파니와의 결혼은 오스트리아·벨기에 두 나라의 정치적 협상의 결과였다. 이것은 루돌프와 스테파니의 개인적 행복을 고려한 결과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인 도덕적 잣대만으로 루돌프의 행위를 평가할 수는 없을 듯하다.
뮤지컬 <황태자 루돌프>에서는 루돌프와 마리아의 사랑을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처럼 묘사했다. 루돌프와 마리아의 사랑이 꼭 그렇게 전개된 것은 아니지만, 이 사랑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처럼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오스트리아와 벨기에의 정치적 이익을 침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은 비극적 결과로 이어지고 만다. 두 사람이 사랑한 지 몇 달밖에 안 되는 1889년 1월이었다. 두 사람은 왕실 별장에서 함께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영원한 사랑의 길로 나아갔다. 뮤지컬 막판에 무대를 쾅쾅 하고 울린 것처럼, 그들이 죽는 날에 두 발의 총성이 주변을 진동시켰다. 루돌프가 스테파니의 머리에 총을 겨눈 뒤 자신에게도 총을 겨눴던 것이다.
루돌프가 죽음을 선택한 데는 성격적 특징이나 정치적 이유도 있었지만, 그가 그렇게 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마리아와의 사랑이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권력보다는 사랑을 택한 행동으로 평가되어 세상에 감동을 주게 되었다.
억지로 일본인과 결혼한 영친왕, 덕혜옹주, 이건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가 요동치던 19세기 및 20세기 초반에 권력보다는 사랑을 선택하여 충격을 준 인물은 루돌프 황태자뿐만이 아니었다. 루돌프보다 좀 늦은 시기의 조선 왕실에도 비슷한 행적을 남긴 왕손이 있었다. 이 역시 세상에 진한 감동을 주었다.
대한제국 황실은 1910년에 왕실로 격하되었다. 이로부터 2년 뒤인 1912년에 고종의 손자인 이우가 출생했다. 이우는 고종의 아들인 의친왕 이강이 낳은 아들이다. 의친왕은 순종 임금한테는 동생이고, 유명한 영친왕한테는 형이다.
이우는 의친왕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5촌 당숙인 이준용의 양자가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장손이자 운현궁의 주인인 이준용이 아들 없이 죽었기 때문에, 이우가 그의 양자가 되어 운현궁의 새로운 주인이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이우는 일본이 이준용에게 준 공작의 지위도 함께 물려받게 되었다.
1910년 이후의 조선 왕족들은 루돌프 황태자처럼 정략결혼을 강요받았다. 물론 그 이전에도 왕족들은 대개 다 정략결혼을 했지만, 이 시기 조선 왕족의 정략결혼은 왕실 내부로부터 강요된 것이 아니라 외세로부터 강요된 것이었다. 일본은 자국 왕족과 조선 왕족을 결혼시켜 조선의 혼을 없애고자 했다.
이런 의도에 의해 희생당한 인물이 영친왕(고종의 아들), 덕혜옹주(고종의 딸), 이건(이우의 이복형)이다. 이들은 다들 일본의 요구에 밀려 억지로 일본인과 결혼해야 했다.
이런 가운데서 황태자 루돌프처럼 결혼의 자주성을 선포한 이가 바로 이우였다. 열한 살 때인 1922년 인질이 되어 일본 유학을 떠난 이우는 일본에 유학 중인 조선 귀족 박찬주(1914년 생)와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박찬주는 철종 임금의 사위이자 갑신정변의 핵심 인물인 박영효의 손녀다.
어릴 적에 박찬주를 한두 번 만난 적이 있는 이우는 방학을 맞아 잠시 귀국했을 때인 1932년경에 박찬주와 친해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일본에 돌아간 뒤에도 계속해서 만남을 가졌다. 이때 이우와 박찬주는 각각 스물한 살, 열아홉 살 정도였다.
일본이 조선 왕족을 통제할 목적으로 제정한 왕공가궤범(王公家軌範)에 따르면, 조선 왕족은 일본왕(이른바 천황)의 승인을 받아야만 결혼할 수 있었다. 승인을 받자면, 일본이 짝지어주는 일본 왕족과 정략결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우는 정략결혼이 싫었다. 영친왕·덕혜옹주·이건이 억지로 결혼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 자신만큼은 그런 결혼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일본이란 나라 자체가 싫었다. 조선 왕족과 긴밀했던 조선일보 김을한 기자와의 만남에서 이우는 "일본 것에 대해서는 병적이라고 할 만큼 모든 게 싫다"고 토로했다. 정략결혼도 싫지만 일본인과의 결혼도 싫었던 것이다.
결국 이우는 한국판 루돌프 황태자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일본 몰래 박찬주와의 약혼을 성사시킨 뒤, 이왕직(조선왕족 관리처) 장관에게 이런 사실을 통고했다. 일본의 감시를 받는 조선 왕손이 너무나도 대담하게 왕공가궤범을 무시해버린 것이다.
루돌프보다 훨씬 더 비극적인 이우의 사랑이우의 약혼은 일본 입장에서는 충격적인 뉴스였다. 조선 왕실이 자신들의 통제 하에 있다고 믿었는데, 뜻밖에도 20대 초반의 조선 왕손으로부터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이다. 이때부터 일본은 두 사람의 약혼을 무산시키기 위한 행동에 돌입했다. 일본 정부는 이우에게 유감을 표시하는 한편, 약혼을 취소할 것을 강요했다.
이우가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자, 일본은 이우의 양모를 움직여 마음을 돌려보려고도 했다. 또 박찬주의 할아버지인 박영효가 1894년에 이우의 양부인 이준용을 사형에 처하려 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그런 박영효의 손녀와 결혼하는 것은 부모에게 잘못하는 것'이라는 논리로 이우를 설득해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이우는 뜻을 버리지 못했다. 일본 공작의 지위를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박찬주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는 강경한 의지를 피력한 것이다. 그도 루돌프처럼 지위보다는 사랑을 선택했다. 이우가 워낙 강경한 모습을 보인데다가 박영효까지 나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설득 작업을 벌였기 때문에, 일본은 더 이상 두 사람을 떼어놓을 수 없었다. 이들의 결혼은 1935년에 이루어졌다.
이때까지의 상황만 고려하면, 이우와 루돌프의 사랑이 전혀 다른 결과로 이어진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루돌프의 사랑은 동반 죽음으로 이어졌지만, 이우의 사랑은 결혼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우의 결혼으로부터 10년 뒤에 벌어진 사건까지 고려하면, 이우 쪽이 루돌프보다 훨씬 더 비극적이었다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만약 이우가 일본의 요구대로 정략결혼을 선택했다면, 그 후 그의 삶은 훨씬 더 편했을지 모른다. 이우가 일본을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해서 그랬는지, 일본은 그에게 험난한 삶을 강요했다. 이우를 중국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파견한 일본은, 패전의 먹구름이 짙게 드리운 1945년에는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그를 불러들인 것은 최후의 옥쇄(玉碎) 작전에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막판에 일본은 본토라도 지킨다는 전략 하에 국내 옥쇄 작전을 전개했다. 옥처럼 부서지겠다는 심정으로 일본 땅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그 최후의 일전에 앞세울 사람 중 하나로 이우를 선택한 것이다.
소환 명령을 받은 이우는 뭔가 느낌이 이상했던지, 일본에 가기 전에 서울에 들러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 그는 조선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해달라며 시일을 지연시켰다. 일본이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자, 그는 아이에게 설사약을 먹인 뒤 '아이가 아파서 출발할 수 없다'는 핑계까지 댔다.
하지만 계속 연기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이우는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때 이우와 일본정부 간에 타협된 내용이 있었다. 이우는 조선에서 근무하겠다는 요구를 철회하고, 일본은 조선과 가까운 히로시마에 이우의 근무지를 마련해준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이우는 1945년 7월 초에 서울을 떠나 히로시마에 도착했다. 이렇게 해서 히로시마 부대에 근무한 지 약 한 달 뒤인 8월 6일이었다. 이 날 아침, 그는 평소처럼 말을 타고 출근길에 나섰다.
출근 도중에 거리에서 라디오 방송 소리가 흘러나왔다. 미군 전투기 한 대가 히로시마 쪽으로 방향을 돌리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내용이었다. 잠시 뒤 하늘에 그 미군 전투기가 등장했고, 전투기에서 낙하산 하나가 떨어졌다. 낙하산 끝에는 조그만 물체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잠시 뒤 굉음이 이우의 고막을 때렸고, 이우는 눈이 화끈거리고 정신이 아찔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의식을 잃은 그는 말에서 떨어졌다. 그날 오후 늦게 부하에 의해 발견되어 병원으로 옮겨진 그는 다음 날 영원히 의식을 잃었다.
핵폭탄 소리와 함께 끝난 이우의 삶정략결혼을 거부하고 조선 여인과의 사랑을 택한 이우의 삶은 이렇게 미군이 투하한 핵폭탄과 함께 끝나버리고 말았다. 황태자 루돌프의 삶은 총성과 함께 끝났지만, 이우의 삶은 핵폭탄 소리와 함께 끝난 것이다.
만약 이우가 박찬주와의 결혼을 고집하지 않았다면, 이우에 대한 일본의 대우가 많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그가 힘든 싸움터에 내몰리지도 않았을 수도 있고, 그랬다면 미국의 핵폭탄과 함께 인생을 마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한국판 루돌프 황태자의 사랑이 오스트리아 루돌프의 사랑보다 훨씬 더 비극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