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이 곧 치유다."심리치유기업 '마인드프리즘' 직원들이 지난 19일 점심시간을 이용해 서울 강남구 역삼동 테헤란밸리 한복판에서 '자가 치유'에 나섰다. 계약직원 해고를 막으려고 지난달 29일 출범한 '전국보건의료산업노조 마인드프리즘지부(지부장 박세영, 아래 마인드프리즘 노조)'의 첫 거리 집회였다(관련기사:
쌍용차 해고자 돕던 마음 치유사들 '해고 위기').
조합원 9명이 팻말을 든 게 전부였지만 집회가 드문 이곳에서는 행인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매서운 한겨울 바람 탓인지 낯선 시선 탓인지 팻말로 얼굴 가리기 바쁜 조합원들 앞에서 노래에 맞춰 율동까지 해가며 독려하는 이가 있었다. 바로 지난 16일 부로 마인드프리즘에서 '해고'된 마음 치유사 김미성(45)씨였다.
김씨는 추운 날씨에 거리에 나선 동료들이 안타까웠는지 일일이 끌어안는가 하면, '파도 세리머니'로 기운을 북돋았다. 자신의 복직 투쟁 자체가 해고당한 동료 때문에 상처 입은 직원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과정임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일방적으로 희망퇴직 통보를 받은 이후 과정은 일종의 치유 과정이었어요. 우리는 마음을 듣는 회사예요. 어떤 상황에서든 개인이 겪는 고통에 눈 맞추던 사람들인데 (동료의 해고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어요. 희망퇴직 얘기가 나왔을 때 이 과정을 통해 너희들이 해고자가 될 수 있겠지, 너희를 내 고객으로 만나고 싶지 않다, 희망 퇴직이 서로에게 상처로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요. 이걸 눈감고 밖에서 '치유'라는 일을 할 수 없죠.""투쟁이 치유 과정"... 김범수 의장 '엑소더스'에 '정혜신 가치' 지키기 지난해 6월 창업자인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전 대표가 회사를 떠난 뒤 마인드프리즘은 '구조조정'으로 생채기를 겪었다. 결국 전직원 28명 가운데 8명이 '희망퇴직'했고, 심리 치유 업무를 담당하던 계약직원 2명도 지난달 '해고'(계약 종료) 통보를 받았다. '사업이 활성화되면 우선 연락하겠다'는 단서를 달았지만 기약은 없었다.
급기야 쌍용차 해고자 가족 마음치유센터인 '와락' 시절부터 함께 일해 온 김미성씨가 지난 16일자로 '해고'당하자, 조합원들은 역삼동 회사와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릴레이 1인 시위에 나섰다(관련기사:
마인드프리즘 정규직, '해고위기' 계약직 위해 1인시위).
'해고자'가 된 김미성씨도 이날 아침 1인 시위에 이어 '출근 투쟁'에 나섰다. 출입문에 붙은 직원 연락처에서 여전히 김씨 이름이 남아있었고 자신이 쓰던 책상과 컴퓨터도 그대로였다. '해고'를 전혀 실감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일할 분위기도 아니었다.
'근무지'를 이탈한 김씨를 만난 곳은 사무실 바로 옆에 있는 '카페 톡'이었다. 카카오톡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이지만 '내마음보고서' '홀가분 워크숍' '힐링톡' 같은 마인드프리즘 주력 상품들이 전시돼 있어 회사를 벗어나지 못한 느낌이었다.
마인드프리즘은 지난 2012년 김범수 다음카카오 이사회 의장이 투자해 최대주주가 된 뒤 역삼동 케이큐브타워 1층에 자리를 잡았다. 김 의장의 친동생이자 지난해 10월까지 마인드프리즘 대표였던 김화영 케이큐브홀딩스 대표도 여전히 회사 맞은편 사무실로 출퇴근하고 있다. 김범수 의장이 지난해 모든 지분을 현 공동대표에게 넘기고 26억 원이 넘는 자신의 빚까지 책임지기로 하면서 손을 뗐지만, 여전히 '김범수의 그늘'에 남아있는 셈이다.
쌍용차 와락 자원봉사하다 '마음 치유사'로 발탁김미성씨는 지난 2011년 평택 쌍용차 해고자 가족 마음 치유를 위해 설립된 와락에서 정혜신 전 대표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정 전 대표는 김씨가 학습지 교사로 활동하면서도 틈틈이 해고자 자녀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스토리텔링 자원봉사를 하는 것을 보고 와락 '치유 활동가'를 제안했다.
"정혜신 대표가 '네가 하던 게 치유야, 네가 하던 대로 하면 돼'라고 했지만 황당한 제안이었요. 그래도 하다 보니 서울시 치유 프로그램이나 상담 학교에서 상담사들과 교류하며 대화 기술과 자격을 얻었어요. 정 대표 개인 상담할 때도 같이 들어가 거의 일대일 교습을 받았죠. 마침 회사에서 상담 워크숍 프로그램 운영자를 찾고 있었는데, 제가 다른 사회 활동을 함께할 수 있도록 배려해 지난해 1월 계약직으로 들어가게 됐죠."말이 '계약직'이지 지금의 단시간 근로 정규직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1년 뒤 해고 빌미가 될 줄은 당사자들도 전혀 몰랐다.
노조 사무장을 맡고 있는 노미선 팀장은 "1년 전만 해도 회사 분위기도 좋았고 일부러 모셔온 거라 1년 계약 기간은 큰 의미가 없었다"라면서 "김미성씨가 들어오면서 참가자들의 부정적 반응도 2/3 정도 줄었고 워크숍 품질도 높아져 계약 연장을 당연하게 여기던 분위기였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회사는 워크숍 사업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지난달 계약직원 2명에게 계약 종료를 통보했다. 하지만 노 팀장은 "기업 대상 사업이라 기복은 있지만 전반적 상승세였다, 지난 7월 신상품을 내놓고 공격적인 마케팅에 나설 시점인데 전망이 어렵다는 건 받아들이기 어렵다"라고 반박했다.
노조에선 김씨가 지난해 '구조조정' 과정에서 평직원들을 대표해 회사에 맞서면서 '미운털'이 박혔다고 보고 있다.
"맨 처음 희망퇴직 얘기 나왔을 때 김화영 전 대표에게 강하게 문제 제기했어요. 투자자의 단순 변심으로 구조 조정하는 건데 전혀 사과나 양해해달란 태도가 아니었거든요. 대표단을 구성해 우리가 왜 책임져야 하느냐, 앞으로 회사 비전이 뭐냐고 따졌지만 대표는 일단 자르고 보자는 식이었어요. 결국 김 전 대표도 회사를 그만두고 두 공동대표가 회사를 인수하는 과정에서도 경영자 편에 섰던 직원들은 주식·승진 등으로 확실히 포상하고, 희망퇴직에 저항하면서 회사 살리려고 남은 직원들에겐 회사 방향에 반대하면 나가라는 경고가 돌아왔어요."현재 마인드프리즘은 김창성·박인정 공동대표가 경영을 맡고 있다. 김화영 전 대표가 영입한 김창성 대표는 김범수 의장이 회사와 무관하다고 선을 긋고 있지만 노조에선 이들이 여전히 두 사람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보고 있다.
"내 일자리보다 마음 치유 사업이 계속 남는 게 중요"
노조가 지난 12일 계약직원의 정규직 채용 등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자 회사에선 '폐업' 가능성까지 흘리며 직원들을 압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복직 요구 당사자로서 김씨가 느낄 부담도 클 듯 했다.
"나 하나 살자고 했다면 죄책감이나 부담감이 있을 텐데 지금까지 5~6개월 과정에서 직원이 스스로 선택한 거예요. 지금 내가 잘리면 그 다음에 누가 잘릴지 불 보듯 뻔해요. 나 하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들도 위협에 노출됐다는 걸 알고 있는 거죠. 이런 얘기는 하지 말라는데…."김씨는 인터뷰 도중 자신의 개인적 생각과 노조의 공식 입장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보였다. 자칫 '전선'을 흩트리고 회사에 잘못된 신호를 줄 수도 있다는 우려였다.
"상급노조에 물으니 (투쟁해도) 계약직이 복직할 가능성은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복직 어렵다는 거 안다, 이 싸움 끝에 경영진에 상처받은 직원들을 위한 안전장치 하나만 남아도 그것으로 만족한다, 같이 해달라고 했어요. 내가 정말 원하는 건 회사가 자립하고 이 일에 애정 있는 사람들이 계속 남았으면 하는 거예요. 회사가 잘 되면 복직 안 돼도 '아르바이트'든 뭐든 이 일을 계속할 기회가 생기잖아요. 제겐 이 일 자체가 존재하는 게 중요해요.""사람에게는 마음이 있다." 바로 마인드프리즘이 내세우는 가치다. 노조와 김씨에게 '마음 치유 사업'은 대체 어떤 의미일까?
"와락에서나 내 돈을 기부하는 일들은 개인의 선의일 수 있지만 이쪽 일은 내 수입원이고 사회구조 안에 자리 잡은 일이잖아요. 사회에 이런 일이 있다는 것 자체가 감동이에요. 사람 마음을 보살피는데 그게 돈이 되요. 그래서 일을 하면서도 즐겼고 사람, 가치 고민하고 회의하면서도 어떻게 돈 받고 이런 회의를 하느냐 그랬어요.(웃음) 내 일자리도 중요하지만 이 일 자체가 원래 모습으로 존재했으면 좋겠어요.""직원들 회초리 때리며 치유하라? '치유 자판기' 오래 못가"
김씨와 동료들이 '투쟁'을 선택한 것도 정혜신 전 대표에 이어 김범수 의장까지 마인드프리즘에 손을 떼면서 결국 이 일이 원래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고 '돈벌이'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미 핵심이 빠지고 그냥 '치유 자판기'로 가고 있어요. 치유는 기계적으로 해결할 수 없어요. 특히 우리가 해온 워크숍 사업은 회사의 핵심 가치를 가지고 사람을 만나는 일인데 이걸 빼고는 얼마 못 가요. 치유하는 회사는 분위기 자체가 중요한데 직원들 회초리 때리면서 치유하라? 수직 서열주의에다 10분 이상 자리 비울 때 보고하라고 공장처럼 쪼는 시스템이에요. 돈 때문에 어쩔 수 없다지만 제공하는 서비스 품질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어요."이처럼 회사 분위기가 바뀐 건 지난해 6월 정혜신 대표가 물러나면서부터다. 김범수 체제 이후 직원들끼리 직급 대신 영어 이름을 부르는 수평적인 카카오 문화가 일부 이식되고 영업 조직도 생겼지만 큰 거부감은 없었다. 직원 수도 9명에서 28명으로 3배 가까이 늘면서 회사 분위기도 좋아졌다.
하지만 정 대표가 안산에서 세월호 가족 마음 치유에 전념하기로 하고 물러난 직후 회사는 바로 조직 축소와 인력 감축 등 구조조정에 나섰다. 결국 8명이 회사를 떠나는 과정에서 회사 가치를 내세워 희망퇴직에 반대하는 직원들과 경영진에 동조하는 직원들 사이에 감정의 골도 생겼다.
"주변에서 그래요. 회사가 다 그래, 그러니 너희가 참아야 해. 명쾌하게 '나쁜 짓'인데 사회적으로 다 그렇대요. 그럼 애기해서 바꿔야지, 다 그런다고 그렇게 가면 안 되잖아. 벽 보고 얘기하는 느낌도 들고…." 마인드프리즘 직원들의 노조를 만든다고 했을 때 정작 노조 활동을 오래해온 지인들은 오히려 뜯어 말렸다고 한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것이다. 하지만 김씨 생각은 달랐다. '나쁜 짓'을 그대로 놔두면 다른 곳에서도 똑같이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투자했다 돈 안 되면 싹 빠지는 '나쁜 짓' 멈춰야"
"모르는 분야지만 가치 있고 매력적으로 보여 투자했는데 어느 시점이 지나니 매력이 없어 싹 빠져요. 빠지는 과정도 너무 거칠어요. 이 안에 있는 사람 인생이 담겨있는데 개인은 전혀 고려 안하고 경영상 책임은 전혀 안 지고…. 어차피 망할 회사라면 직원들에게 너희끼리 해보라고 기회는 줘야죠. 직원들이 부속품도 아니고. 구조적으로 너무 잔인해요."그 칼끝은 결국 김범수 의장을 향하고 있다. 지금 김범수 의장이 대주주인 다음카카오를 비롯한 다른 투자회사들도 예외일 수 없기 때문이다.
"김범수 의장에게 가장 유감이 많죠. 정혜신 전 대표가 다른 직원들을 위한 안전장치를 만들지 않고 회사를 떠난 건 섭섭하지만 직원들과 가치를 공유하려고 최선을 다했어요. 김 의장이 회사를 분열 구조로 만들어 넘긴 건 비열해요. 회사를 살리려고 남은 이들에게 회사를 망하게 한다는 혐의까지 씌워서 말이죠."마인드프리즘 노사는 오는 22일 첫 교섭을 앞두고 있다. 김미성씨는 노사 교섭이 막힐 경우 김범수 의장이 있는 다음카카오 판교 사옥 앞에서라도 1인 시위를 벌이겠다는 각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