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공의 병법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삼략>(三略)에서는 "현자(賢者)에게 봉록을 줄 때 재물을 아끼지 않고, 유공자에게 상을 줄 때 시한을 넘기지 않으면, 아랫사람들이 힘을 합치기 때문에 적국의 영토가 줄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동아시아 고대 서적에 나오는 '현자'라는 말을 요즘 감각으로 바꾸면 '인재'가 된다. 고대로 가면 갈수록 '어질다'는 것이 능력의 최고 조건으로 간주됐다. 군주가 인재들에게 정당한 보상을 아끼지 않으면 신하들이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기 때문에, 적국의 영토가 줄고 자국의 영토가 늘어날 거라는 게 <삼략>의 메시지다.
<삼략>에서는 인재를 우대해야 나라가 잘된다고 말했지만, 이 메시지에 대해 회의적인 군주가 있었다. '유능한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줬다가 그들에게 나라를 빼앗으면 어쩔 것인가?'라고 염려했는지, 인재를 유난히 박대한 군주가 있다. KBS 드라마 <왕의 얼굴>에 등장하는 선조 임금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광해군을 아들이 아닌 '경쟁자'로 본 선조
앞서 <왕의 얼굴>에서는 아들 광해군의 능력을 은근히 질투하던 선조 임금이, 임진왜란이라는 돌발 사태가 발생하자 광해군을 마지못해 세자로 책봉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렇게 해서 광해군에게 전쟁 지휘를 맡긴 뒤에도, 선조가 걸핏하면 광해군에게 태클을 거는 장면이 드라마에서 묘사되었다.
드라마 속의 선조는 광해군이 의병을 모집하고 일본군을 막아내서 백성들의 존경을 받게 되자, 마음에도 없는 양위 소동(사퇴 소동)을 벌이며 광해군에게 스트레스를 안겨줬다. 선조가 광해군을 대하는 방식은 아들을 대하는 방식이 아니라 경쟁자를 대하는 방식이었다. 선조는 아들의 유능함 때문에 자신의 무능함이 부각되는 것에 대해 무척 괴로워했다. 유능한 인재를 시기하는 선조의 성격적 결함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실제로도 선조가 인재를 시기하고 가볍게 여겼다는 점은, 광해군 이외의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잘 드러났다. 이순신 장군도 선조의 견제 때문에 한 달간 투옥되어 혹독한 문초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선조 콤플렉스 때문에 목숨을 잃은 한 사람이 외에도 선조의 시기심 때문에 고생한 인물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임진왜란 영웅인 김덕령이다. 광해군이나 이순신은 선조의 견제 때문에 고초를 겪기는 했지만, 목숨까지는 잃지 않았다. 이에 비해 김덕령은 목숨까지 잃었다. 선조의 콤플렉스로 인한 최대 피해자는 당대의 백성들이지만, 김덕령도 그로 인한 최대 피해자 중 하나였다.
선조가 임금이 된 1567년에 전라도 광주에서 출생한 김덕령은 1592년 임진왜란 발발 당시 26세의 청년 유생이었다. 직업은 선비였지만, 그는 무사를 능가하는 용력의 소유자였다. 실학자 이긍익이 쓴 <연려실기술>에서는 "용맹과 힘이 뛰어나서, 달아나는 개를 쫓아가 잡아서 고기를 찢어 먹기도 했다"고 그를 묘사했다.
임진왜란이라는 사건은 아직은 '고시생'이던 김덕령을 일약 스타로 만들었다. 이 전란을 계기로 그는 조직의 귀재로 거듭났다. 1593년 연말과 1594년 연초에 전라도에서 의병 모집에 나선 그는 고작 한 달 만에 3천 명 이상을 모집하는 대(大)성과를 거두었다.
불우한 야인 시절의 정도전은 함경도 함주 막사에 가서 2천 명 정도 되는 이성계의 병력을 보고 "이만한 병력이면 무슨 일은 못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김덕령이 모집한 병력은 2천이 아니라 3천을 넘었다. 김덕령도 정도전 같은 참모를 만났다면, 그만한 군대로 못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 뒤 김덕령은 짧은 시간 안에 의병 영웅으로 급부상했다. 수군에는 이순신, 육군에는 권율, 의병에는 김덕령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남원 의병장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에서는 "김덕령의 이름이 중국과 일본에까지 알려졌다"면서 "온 나라 사람들이 그에게 의지했고, 왜인들도 그를 겁내 (전라도를)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우직한 이순신과는 좀 달랐던 김덕령
김덕령이 영웅으로 급부상한 방법은 좀 흥미롭다. 이순신은 개별적인 전투들을 통해 명성을 축적했다. 이에 비해 김덕령은 1594년과 1595년에 각각 거제도와 고성에서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이런 것보다는 상징적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방법으로 명성을 높였다. 무거운 철퇴 두 개를 허리 양쪽에 차고 다닌다거나, 호랑이 두 마리를 손으로 잡은 뒤 일본군 병영에 보내는 등의 방법으로 신비한 이미지를 획득한 것이다.
이런 이미지 때문에 김덕령이란 존재는 일본군에게 겁을 주는 데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선조 27년 4월 1일(양력 1594년 5월 20일)에 조선 정부가 전국의 모든 의병부대를 김덕령 휘하에 예속시킨 데는 그런 심리적 고려도 작용했다. 의병장이 된 지 반년도 안 된 상태에서 전국 의병의 총사령관이 되었으니, 그의 명성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영웅으로 부각되는 과정이 보여주듯이, 김덕령은 우직한 이순신과는 좀 달랐다. 조직력이 탁월한 것도 그렇고 명장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방법도 그렇고, 그는 정치가의 기질을 상당부분 갖춘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 대규모 군대를 직접 조직하고 보유했으니, 선조처럼 자기의 지위를 지키는 데 민감한 사람이 김덕령의 기질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김덕령이 그 정도로 그쳤다면, 선조는 속으로만 경계하면서 김덕령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김덕령이 선조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그중 하나는 광해군의 신임을 받은 점이다. 김덕령은 선조로부터도 장군 칭호를 받았지만, 광해군으로부터는 장군 칭호만 받은 게 아니라 직접 만나기도 했다.
광해군의 수행원인 병조정랑 조응록이 기록한 <죽계일기>에 따르면, 김덕령은 선조 26년 12월 27일(1594년 2월 16일)에 전주를 방문한 광해군을 만난 자리에서 무예 시범을 보여 찬사를 받았다. 그런 뒤 광해군으로부터 '날개 달린 호랑이'라는 의미가 담긴 익호장군의 칭호를 받았다. 선조의 눈에 김덕령이 '광해군 사람'으로 비쳐질 만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몽학의 반란이 김덕령의 운명을 바꾸다
그 뒤에도 선조는 계속해서 김덕령을 신임했지만, 김덕령이 '무슨 일이든 벌일 수 있는 군대'를 갖고 있다는 점과 광해군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점을 항상 잊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던 차에 김덕령에 대한 선조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결정적 사건이 발생했다.
전쟁 중인 1596년 왕족 출신인 이몽학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몽학은 전쟁의 혼란을 틈타 충청도 홍산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김덕령은 이몽학의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동했다가, 반란이 조기에 진압되는 바람에 회군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체포된 반란군 간부인 한현의 입에서 김덕령의 이름이 나왔다. 김덕령도 자기네 사람이라는 진술이 나온 것이다. 하지만 한현의 진술이 의심스러웠다는 점은 "의병장 곽재우도 나의 심복"라는 황당한 진술에서도 잘 드러난다. 별다른 증거도 없이 유명 의병장들을 거론했던 것이다.
반란군 간부의 입에서 김덕령의 이름이 나왔다는 보고를 받자, 선조는 한편으로는 놀라움을 표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흥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잘못하면 김덕령이란 인재를 잃을 수도 있다'는 걱정을 하기보다는 '김덕령을 체포하지 못하면 어떡할까?' 하는 걱정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김덕령 체포조가 혹시라도 김덕령을 당해내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김덕령은 순순히 체포에 응했고, 선조 임금이 그에 대한 조사를 직접 지휘했다. 그런데 선조는 진상을 확인하기보다는 처형을 서두르는 데만 관심을 보였다. 그는 한현의 진술 외에는 구체적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김덕령에 대한 처형을 서둘렀다. 유성룡 등이 보강 수사를 건의했지만, 선조는 아랑곳없이 절차를 진행했다.
증거가 나오지 않자 선조는 여러 날 계속해서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고문이 어찌나 심했는지, 무릎 아래 정강이뼈가 부러질 정도였다. 그래도 김덕령이 자복하지 않자 선조는 한층 더 가혹한 고문을 지시했고, 고문을 받는 도중에 김덕령은 눈을 감고 말았다.
선조가 못난 기질을 갖고 왕권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난중잡록>에서는 김덕령이 죄가 없는데도 억울하게 죽었다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소식을 들은 일본군 진영에서는 환호성이 터지고 파티가 벌어졌으며, 일본군 간부들은 "이제 전라도·충청도는 걱정이 없다"며 환영을 표시했다고 <난중잡록>은 전한다.
선조는 인재를 시기하고 가볍게 여기는 군주였다. 김덕령은 그로 인한 희생물이었다. 인재에 대한 선조의 질투심이 낳은 희생물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인재를 시기하고 괴롭혔는데도, 선조는 일본군을 몰아내고 왕권을 굳건히 지켰다. 그랬으니 그로서는 '인재를 소중히 여기라'는 <삼략> 등의 메시지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선조 같은 임금 밑에서 조선 백성들이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은 임금에 대한 충성심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스스로 지키겠다는 열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시대 사람들이 삶에 대한 강렬한 애착을 발휘한 덕분에, 선조는 못난 기질을 갖고도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선조는 속 좁은 지도자였지만, 그런 의미에서 대단한 행운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