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사람이 꽁꽁 묶여 있는 철로 저편에서 제동장치가 고장난 기차가 돌진해오고 있다. 선로변경기를 발견하고 기차를 지선으로 돌리려는 찰나 뚱뚱한 남자가 지선에 묶여 있는 것이 보인다. 다섯 사람을 살리기 위해 기차의 진로를 바꾸면 한 명의 뚱뚱한 남자가 죽는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당신은 저 뚱뚱한 남자를 죽이겠습니까?트롤리학은 현실의 수많은 딜레마와 마주해 긍정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도덕적 직관과 윤리적 사유를 단련하기 위한 일종의 사유실험이다. 트롤리학을 지지하는 이들은 다양하게 변주된 딜레마 상황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철학박사이자 인기 팟캐스트 <철학한입 Philosophy Bites>의 진행자인 데이비드 에드먼즈도 그 가운데 하나다. 그는 이 책을 통해 트롤리학의 기원부터 변천과 용례까지를 짚어나가는데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쉽고 흥미롭게 풀어나가는 솜씨가 상당하다.
책은 2차 대전 당시 영국 내무장관이었던 허버트 모리슨과 윈스턴 처칠의 격렬한 토론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런던을 원거리 타격하는 V1 미사일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독일로 들어가는 정보를 교란하는 안건을 두고 두 사람은 치열한 토론을 벌였고 언제나처럼 처칠이 승리를 거두었다. 허버트 모리슨이 처칠의 결정에 반대의사를 표한 건 V1이 런던 중심부 대신 남동쪽 교외지역을 타격하게 됨에 따라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들이 위험에 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런던에서 발생했을 대규모 피해를 막는 대신 상대적으로 수가 적고 가난한 사람들이 위험을 겪게 된 것이다.
뒤이어 책은 2002년 독일에서 화제가 된 게프겐 유괴사건을 예로 들며 촌각을 다투는 범죄를 해결하기 위해 용의자를 고문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피해자의 생명이 촌각에 달려있으며 용의자의 범행을 확신할 수 있다면 고문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 쿠바 관타나모 수용소와 폴란드 정치범 수용소 등에서 미국이 테러용의자들에게 자행한 비인도적 고문행위도 테러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면 허용될 수 있는 것일까?
이야기는 곧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난파된 배에서 살아남은 선원들의 이야기로 옮겨간다. 조난당해 죽어가는 사람들이 그들 중 가장 약한 이를 죽여 식량으로 삼은 더들리,스티븐스 사건은 당대에도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만약 그를 죽이지 않았다면 모두가 굶주림 속에 죽어갔을 것이고 그건 죽임을 당한 선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의 죽음으로 다른 선원들이 살아남았으므로 이는 합리적일 뿐 아니라 공리적인 행위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과연 이는 정당화될 수 있는 행위일까?
도덕적 직관과 윤리적 사유를 단련하는 트롤리 사유실험트롤리학은 위와 같은 사례들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무엇이 정답이라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답과 그 이유를 마련하는 과정을 통해 도덕적 직관과 윤리적 사유를 단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트롤리학을 긍정하는 이들은 사유실험 속에서 수백의 사람들을 죽이는 과정이 현실 속에서 한 사람을 구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특정한 답을 내어놓지 않는다. 다만 여러가지 딜레마 상황을 제시하고 답을 구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여러 학문분과(인식론, 윤리학, 형이상학 등 철학의 하위 분과와 심리학, 경제학, 인지과학, 신경생리학 등)의 성과를 보여줄 뿐이다. 칸트의 의무론과 벤담의 초기 공리주의가 소환되고 필리파 풋과 엘리자베스 앤스콤, 아이리스 머독과 비트겐슈타인 등도 인상깊게 등장한다. 그러나 이들의 관점도 정답은 아니다.
더욱 복잡다단해진 사유실험은 우리의 도덕적 직관과 사유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캐묻는데까지 나아간다. 책은 감성과 이성이 도덕적 결정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부터 딜레마 상황에서 도덕적으로 옳은 답을 찾는 과정에 대해서도 숙고하게끔 한다.
책을 읽기 전까지 트롤리학에 대해 접해본 적 없을 상당수 독자들에게 이 책은 신선한 경험을 제공할 것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충분할 만큼 다양한 사유실험이 제공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트롤리학의 역사와 발전과정, 필요를 설명하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여기에 너무 많은 분량을 할애한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잘 알려진 몇가지 상황에 더해 직관과 사유를 단련할 수 있는 더욱 많은 사례가 제공되었다면 훨씬 의미있는 독서가 되었을 것이다.
책을 끝까지 읽고 나서도 첫 번째 문제를 해결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다섯을 살리기 위해 하나를 죽여야 하는 딜레마 상황이 생명의 무게를 실감케 했기 때문이다. 칸트라면 선로변경기를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벤담이라면 기꺼이 선로를 바꿀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다. 당신이라면 어떤 결정을 내리겠는가?
덧붙이는 글 | <저 뚱뚱한 남자를 죽이겠습니까?>(데이비드 에드먼즈 지음 / 석기용 옮김 / 이마 펴냄 / 2015.01. / 1만 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