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후보였던 시절, 그의 선거캠프 이름은 '국민행복캠프'였다. 2012년 겨울,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은 환하게 웃으며 "국민 행복시대를 열어나가겠다"고 말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손을 비비며 기다렸다. 야속하게도, 계절이 네 번 바뀌는 사이에도 "행복시대"는 열리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2014년 대국민 신년인사에서 "국민 행복"을 다시 한 번 힘주어 강조했다. "국민 행복을 위한 일 외에는 다 번뇌"라는 것이다. 사슴 눈을 뜨며 생각했다. '그럼 그렇지, 대통령이 빈말을 했을 리 없잖아?' 그리고 다시 기다렸다. 이렇게 1년이 흘렀다.
해가 바뀌었는데도, "행복시대"는 좀처럼 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뾰로통해서 신년사를 들었다. 대통령 임기 절반이 다 됐는데, 대체 언제쯤 행복시대를 열어나갈 생각인지.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2015년 희망찬 새해가 밝았습니다. 국민 여러분 가정 모두에 행복과 평안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이게 끝이었다. '자... 잠깐!' 신년사에 "국민 행복시대"가 언급되지 않은 것은 물론, "행복"이라는 말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열린다던 '행복시대'는 이를 악문 채 틈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데, '행복이 가득'하라니. 밥 사준다던 이모가 연락도 끊고 있다가 갑자기 전화를 해 '배부르지?' 하는 것 같았다. 독사눈을 한 채 텔레비전을 껐다.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나만 빼고 다 행복해 진 건 아닐까", "내가 '국민'이 아닌 건 아닐까"...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데,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다시 속을 긁었다. "복지과잉으로 가면 국민이 나태해진다"는 것이다. 밥 사준다는 약속 믿고 끼니도 거른 채 기다리고 있는데, 이모가 '소화제 줘?' 하더니, 이제 삼촌이 전화를 바꿔 받고는 '너 배 나왔어'하는 꼴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그 사람들이 내 이모와 삼촌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우리가 낸 세금에서 꽤 많은 월급을 타가는 일꾼들이며, 정치는 조카와의 실없는 장난이 아니다.
밥 먹어야 행복할 힘도 생긴다박근혜 대통령은 당선 인사를 하면서 여러 가지를 약속했다. "찬반을 떠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겠다", "분열과 갈등을 빚어왔던 역사의 고리를 화해와 대탕평책으로 끊겠다", "지역, 성별, 세대 구분 없이 골고루 인사를 등용하겠다". 모두 듣기 아름다운 말이었다.
내가 특별히 귀 기울여 들었던 말은 국민의 생활고를 해결한다는 약속이었다. 박 대통령은 "국민 모두가 먹고사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 나라를 만들겠다"며, "희망을 잃지 말고 일어서 달라"고 위로했다. 대통령 말대로, "먹고사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 나라를 만드는 것"은 "국민행복시대"의 기본 조건이다. 배고프고, 몸 아프면서 행복한 사람을 보았는가?
대통령은 그런 나라를 만들겠다며, '무상보육', '고교 무상교육', '반값등록금', '기초노령연금' 등의 공약을 제시했다. '생애주기별 맞춤복지'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 공약들이 실현된다면 유아기부터 노년기까지 큰 시름을 덜게 될 터였다. 하지만 3년차에 들어선 현재, 이중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 공약은 하나도 없으며, 누리과정(만 3세~5세 보육료 지원)과 고교 무상교육은 아예 예산 반영조차 되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내놓은 공약의 핵심은 '증세 없는 복지'였지만, 이제 그의 입에서 '복지'라는 말은 잘 나오지 않는다. 가끔 '증세 불가론'을 언급할 뿐이다. 최근에도 그는 '증세는 국민에 대한 배신'이라고 말했다.
경제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가 있는 사람이라면, '증세 없는 복지'라는 말이 현실성이 없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이 말은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행복하게 살게 해 주겠다'는 구애의 말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혼 후 상대가 배신감을 느낄 때는, 자신의 손에 물이 묻어있다는 냉엄한 현실을 깨달을 때가 아니라,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고 느낄 때다.
박근혜 대통령의 '이중 배신'
그렇다고 박근혜 대통령이 '증세 배신'을 안 한 것도 아니다. 통계청이 지난해 11월에 발표한 <2014년 가계 금융·복지 조사> 등을 보자. 세부담 증가율을 2012년 통계자료와 비교하면, 최하위 소득층에서 최고 소득층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을 대상으로 세금을 올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저소득층부터 중위층까지의 세부담 상승률이 고소득층보다 훨씬 높았다는 점이다.
예컨대 상위 20% 소득자의 세금 증가율은 3.4%였던 반면, 하위 20%는 두 배가 넘는 7.7%였다. 중간 소득자의 세금 증가율은 무려 20%가 넘어, 최상위 계층 증가율의 6배가 넘었다. 세금을 더 걷었다고 항의하는 게 아니다. 올려놓고도 '증세는 국민의 배신'이라고 말하는 솔직하지 못한 태도를 지적하는 것이다.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2014년 세수 결손이 10조 원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세금 올리지 않고 '지하경제 양성화'와 정부지출 축소로 복지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고 장담했지만, 이제 여당 원내대표까지 나서서 '증세 없는 복지는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정부는 이제 '세금 더 내고 복지를 늘릴까' 아니면 '덜 내고 복지를 줄일까'를 묻는다. 얼핏 보면 의견을 구하는 것 같지만, 결론은 정해져 있다. 증세에 대한 반감을 이용해 복지 공약을 파기하려는 것이다. 이 점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복지과잉-국민나태론'에 잘 드러난다.
나는 배신감을 느낀다. 상대가 물 묻은 손을 빤히 바라보며, '손에 물 안 묻히고 불행해질래', '손에 물 묻히더라도 행복을 고집할래'라고 묻고 있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이건희 손자' 선별복지론
일부는 복지축소나 '선별복지'를 주장하며 '이건희 손자'를 들먹이기도 한다. 이건희 손자에게 왜 '공짜밥'을 먹이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희 손자라는 이유만으로 공립 초등학교와 중학교 다니는 것을 막아야 할까? 누구든 자식을 값비싼 학교에 보내는 것은 자유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상 의무교육 혜택을 빼앗을 수는 없다.
재벌가 사람들도 (원하면) 지하철이나 버스 이용이 가능하고, 교통카드에 같은 금액이 찍히는 것으로 안다. 이 회장이 애용하는 마이바흐도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같은 요금을 낼 것이다. 현대중공업 대주주인 정몽준 전 의원은 2조 원 대 재산가이지만, 국회의원 재직 당시 세비를 꼬박꼬박 타간 것으로 알고 있고, 이것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월급을 반납하거나 자선에 쓰는 것은 그의 자유다.
이건희 손자가 군대에 간다고 생각해 보자. 잘 모르겠지만, '이건희 손자'라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무상짬밥' 혜택을 빼앗으며 '도련님은 PX에서 사 드세요'하지는 않을 것 같다. 물론 그가 군대에 가게 될지는 별개의 문제다. 삼성가의 군 면제율이 73%에 이르기 때문이다.
나는 군 생활이 '꼭 해봐야 하는' 경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군대에 갔다 와야 사람 된다'는 생각은, 곰이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되는 것만큼 신화적 이야기다. 도리어 군에서 '비인간적'으로 변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맹목적인 복종과 물리적 폭력, 비민주적 효율, 정의 대신 힘에 순응하는 비겁함을 체화하기 쉬운 곳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사회에 퍼져 있는 폭력성과 비민주적 소통구조의 원인 중 하나가 사회 곳곳에 스며든 군대문화라고 믿는다. 따라서 군을 이상화하고 낭만화하는 보도와 오락프로그램에 큰 우려를 갖고 있다. 군대가 무의미하거나 쓸모없다는 말이 아니다. 사회가 집이라면, 군대는 울타리 위의 가시철망 같은 존재다. 철조망은 고마운 존재지만, 담 위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철조망을 거실과 아이들 공부방에 치는 것은 학대이며, 아름다움을 흠모해 몸에 두르고 다닌다면 '변태'다.
어쨌든 군생활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의무이기에, 복무, 보상, 면제의 절차는 합리적이고 공정해야 한다.
예수도 베푼 '무상의료'와 '무상급식'예수는 부자가 천국에 가는 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했다. 그가 '종북'이나 '좌빨'이어서 그렇다기보다는(그런 면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이익을 추구하다보면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시대가 바뀌고 문화가 달라져도 비인간적 탐욕을 버리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예컨대 <마태복음>에는 예수를 흠모하는 젊은 부자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예수에게 와서 구원의 길을 말해주십사 부탁한다. 답변은 간단했다. '네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면 하늘의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예수는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말했다.
부자 청년은 낯빛이 어두워져 돌아갔다. 예수를 아끼는 사람조차 제 재산은 '하늘의 축복+예수를 따르는 일'과도 맞바꾸기 어려운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사람에게 베푸는 것'과 '신에게 바치는 것'을 구분하지 않는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는 말이 이를 잘 말해 준다. 예수가 오늘 한국사회에 살았다면 어떤 욕을 먹었을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예수는 그저 '남을 도우라'고 말만 하지 않았다.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들에게 수시로 '무상의료'를 베풀었고, 배고픈 사람들에게는 대규모 '무상급식'을 펼치기도 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였다는 기적 말이다.
처음에는 예수의 제자들도 '무상급식'에 반대했다('무상급식 반대'의 원조는 새누리당이 아니었다).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각자 사먹으라고 하자'고 제안했다. 예수가 '그냥 주라'고 하자, 제자들은 '이 많은 사람들을 다 어떻게 먹이냐'고 항의했다.
이 사건에서 주목할 부분은 '모두'에게 먹였다는 사실이다. 마른 사람이나 통통한 사람, 배가 들어간 사람이나 나온 사람, 아침을 거르고 나온 사람이나 배터지게 먹고 나온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복지에 '기적'은 필요 없다국가 정책은 종교적 기적과 다르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옳은 말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해서는 성서학자마다 의견이 갈린다.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 문학적 비유라고 말하는 사람, 잘못된 번역 때문에 오해가 생긴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 사실이지만 '기적'은 아니었다는 등 여러 입장이 있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마지막의 '사실이지만 기적은 아니다'라는 견해다. 예수는 맨손으로 기적을 베풀지 않았다. 우선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음식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게 했다. 그때 나온 것이 소년이 싸 온 떡과 생선이었다. 예수는 이것을 들고 무리들 앞에 섰다. 앞의 학설에 따르면, 소년이 용감하게 도시락을 나누는 것을 보자, 부끄러워진 어른들이 감춰놓았던 음식을 슬그머니 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모든 사람이 먹고도 열 두 광주리의 음식이 남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복지를 '그냥 준다'고 약속했지만, 나는 그가 기적을 펼칠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기적은 필요없다. 한 나라의 일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면, 모두에게 돌아갈 충분한 음식이 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숨겨져 있다는 것이고, 숨긴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점이다.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탐욕'을 가진 부자들이 존재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렇기에 정부가 필요한 것이다. 예수처럼 대통령이 나서야 한다. 부지런히 일하는데도 한 사람당 3천만 원의 연소득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뭔가 크게 잘못된 것이다. 누진세 강화는 베풀지 못하는 강퍅한 부자들에게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는 선행인 동시에, '바늘귀'를 넓혀주는 일이다.
부자, 가난한 이 가리지 말고 밥을 먹여라. 더 낼 수 있는 사람에게는 더 내게 하라. 그때 모두가 행복해지는 '국민 행복시대'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