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사태 속에서 주군인 선조 임금을 잘 보좌해 나라를 지켜낸 류성룡. 그는 선조 임금의 1급 참모였다. 이에 그가 어떤 면모를 가진 신하였는지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다.
현재까지의 방영분을 기준으로 할 때, KBS 주말 드라마 <징비록>에서 보여준 류성룡의 대표적 면모 중 하나는 임금 앞에서 당당하게 말하는 충직한 신하의 모습이다. 일례로, 지난 2월 22일 방송된 제4회에서 류성룡은 공안 사건인 정여립 역모 사건에 관해 언급하면서 "이것이 조작 사건일 줄 아시면서도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용하셨습니까?"라고 임금에게 따져 물었다.
선조가 "이토록 참담하고 방자한 질문을 하느냐!"고 인상을 찌푸리자, 류성룡은 "죽음을 각오하고 진언하는 것"이라며 강인한 의지를 표출했다. 그러자 선조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누가 과인한테 이렇게 말하겠느냐?"며 두터운 신임을 표시했다. 이런 장면에서 나타나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고 충언하는 담대한 참모의 모습이다.
그렇게 죽음을 각오하고 충언했으니 '임금을 보좌해서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것도 가능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어딘가 좀 이상하다. 충언하는 사람도 대단하지만, 충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찌 보면 더 대단하다. 그러므로 죽음을 각오하고 충언하는 신하를 옆에 두는 군주는 충언을 수용할 줄 아는 포용력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선조가 그런 임금이 아니었다는 점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자기보다 인기 있는 이순신·김덕령 장군을 투옥한 사실이나 마음에 안 드는 아들 광해군이 전쟁 지휘를 잘하자 일부러 광해군의 입지를 불안하게 만든 사실 등에서 잘 드러난다. 선조는 마음이 그렇게 넓은 군주가 아니었다.
그런 인물에게 "조작 사건일 줄 아시면서도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용하셨습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질문의 당사자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이런 점을 생각하면, 드라마 속의 류성룡이 보여주는 면모가 실제 기록과 얼마나 일치할까 하고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드라마와 역사 속 류성룡, 어떻게 다를까류성룡이 선조 앞에서 어떤 면모를 취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류성룡의 생애를 정리한 <류성룡 졸기>가 그것이다. 이 기록은 북인당 정권(동인당 분파)이 광해군 집권 기간에 남긴 <선조실록>과, 광해군의 북인당 정권을 전복한 서인당 정권이 남긴 <선조수정실록>에 각각 수록돼 있다. <선조실록> 수정판인 <선조수정실록>은 인조 '쿠데타'(인조반정)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서인당이 과거사를 재조명한다는 취지에서 편찬한 것이다.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의 편찬 주체는 서로 다르다. 앞엣것을 편찬한 북인당과 뒤엣것을 편찬한 서인당은 상호 적대적 관계였다. 하지만 두 실록에 수록된 <류성룡 졸기>의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뒤의 것이 좀 간략하다는 점과 표현상의 강약이 있다는 점만 빼면, 류성룡에 대한 평가는 앞엣것이나 뒤엣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이것은 류성룡 평가에 관한 한 각 당파의 관점이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류성룡을 직접 겪어본 세대가 그에 관해 대체로 일치된 시각을 갖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두 실록에 수록된 <류성룡 졸기>에 따르면, 실제의 류성룡도 이따금 선조 임금에게 충고를 했다. 하지만, 드라마 속에서처럼 충고를 하지는 않았다. 그가 충고하는 방식은 드라마와는 판이했다.
<선조실록>에 수록된 <류성룡 졸기>에 따르면, 류성룡은 아주 극진하고 겸손한 자세로 임금에게 충언을 했다. 일반적으로 선비 출신의 관료들은 임금에게 충고할 때 강직한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류성룡은 그런 태도가 아니라 극진하고 겸손한 태도로 임금의 잘못을 지적했다. <징비록> 제4회에서처럼 목숨을 걸고 성토하는 게 아니라, 아주 부드럽고 낮은 자세로 임금의 잘못을 지적했던 것이다.
또 류성룡은 충고를 하긴 했지만, 임금의 결정적 약점은 지적하지 않았다. <선조실록>의 <류성룡 졸기>에서는 류성룡이 직간(直諫)을 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선조수정실록>의 <류성룡 졸기>에서도 그가 임금에게 바른 대로 고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이런 기록을 보면, 류성룡은 임금에게 충고를 하기는 했지만 임금이 받아들일 만한 충고만 하는 신하였다. 어떤 경우에도 치명적 약점은 건드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임금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한도에서만 극진하고 겸손하게 충고하는 신하였다.
류성룡의 맞춤형 대처법
그런 모습을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류성룡 입장에서는 그것이 최선이었을지도 모른다. 임진왜란 직전에 이순신·권율 장군을 적시에 추천한 것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류성룡은 사람의 숨겨진 내면과 실력을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류성룡은 선조 임금 역시 그렇게 냉철하게 파악하고 맞춤형 대처법을 구사했을 것이다.
류성룡이 보기에, 선조는 적당한 충고는 받아들일 수도 있어도 비위를 건드리는 충언은 받아들일 수 없는 군주였을 것이다. 그는 그런 임금을 자극해서 공연히 문제를 일으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선조 같은 용렬한 인물을 모실 때는 잘 타일러가면서 바른길로 이끄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류성룡의 대처법이 옳았기 때문인지, 속 좁고 변덕스러운 선조도 류성룡에 대해서 만큼은 비교적 일관된 태도를 취했다. <선조실록>의 <류성룡 졸기>에서는 "임금의 관심이 조금도 식지 않고 항상 귀를 기울여 류성룡의 말을 들었다"고 했다. 변덕이 심한 선조도 류성룡한테 만큼은 극진히 대한 것이다. 이것은 류성룡이 선조의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적당한 수준의 충언을 했기 때문이다.
선조가 류성룡의 충언에 대해 거부감을 갖지 않은 이유와 관련해 또 다른 측면을 고려해볼 수 있다. 그것은 류성룡의 능력이 선조에게 도움이 될 뿐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선조가 두려워한 신하는 이순신 장군이나 김덕령 의병장 같은 인물이었다. 이들은 전쟁이라는 비상시국 속에서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이들은 유능한 동시에 인기가 좋거나 자기 조직이 있는 신하들이었다. 그래서 임금의 경계를 받은 것이다.
특히 김덕령의 경우에는 전쟁 발발 이듬해인 1593년 연말과 1594년 연초의 1개월 사이에 무려 3천 명 정도의 자기 병력을 확보하는 놀라운 조직력을 발휘했다. 당시 그의 나이가 26세였고 직업은 고시생(과거 시험 준비생)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조직력은 세상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결국 그는 뚜렷한 증거도 없이 반역 혐의로 고문을 받는 중에 사망했다.
류성룡도 분명히 유능한 신하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똑똑하기로 유명했고 관료가 된 이후에도 핵심 요직을 거치며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선조수정실록>의 <류성룡 졸기>에서는, 그가 어찌나 일을 잘했던지 "이리저리 대처함에 있어서 민첩하고 빠르기가 흐르는 물 같았다"고 했다.
그 정도로 유능했기 때문에 자칫하면 류성룡도 선조의 미움을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열 살 연하의 임금으로부터 변치 않는 사랑을 받았다. 그 비결은 그가 오로지 임금의 총애에만 의존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류성룡은 유능한 관료였지만, 대중적 인기를 끌거나 자기 조직을 만들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임금의 총애가 출세의 최고 발판이었다. 그래서 그는 선조가 보기에 유능하지만 위험하지는 않은 신하였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신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임금의 관심이 조금도 식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류성룡에 대한 선조의 총애가 굳건했던 것이다. 그래서 류성룡은 선조에게 충언을 하고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목숨을 걸고 충언하여 임금을 바른 길로 이끄는 참모도 있고, 임금의 비위를 맞추고 적당히 타일러 가며 바른 길로 이끄는 참모도 있다. 드라마 <징비록> 속의 류성룡은 앞의 경우에 해당하고, 실제 역사의 류성룡은 뒤의 경우에 해당한다. 류성룡은 드라마에서처럼 그렇게 멋있게 충언을 하는 참모는 아니었지만, 선조 같은 용렬한 임금을 움직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참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