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정말 신기해요." 최근 난생 처음으로 물이 오르는 개나리와 매화를 본 K양은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주말 시골의 할아버지 집을 찾았다가, 코 앞에서 물오르는 나무들을 목격했다. "가지마다 녹색과 연두색 빛이 생생하게 살아 퍼져나가는 거예요. 멀리서 보면 죽은 나무 같은데, 가까이서 보니 그보다 더한 생명의 기운이 있을까 싶었어요."
긴 겨울 뒤 찾아오는 봄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또 약동하는 삶의 기운을 봄보다 실감나게 느낄 수 있는 계절도 없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백화방초는 사람들에게는 더 없는 눈 호강이다.하지만 식물들에게 봄은 호사의 계절만은 아니다. 여름과 가을을 거쳐 다시 겨울이 찾아오기까지 계속되는 '전쟁'의 출발점이 봄이기도 한 까닭이다.
식물들의 전쟁 상대는 한둘이 아니다. 갖은 새와 벌레들, 또 같은 식물끼리도 밀고 밀리는 싸움을 벌여야 한다. 예쁜 꽃과 아름다운 자태만 보고, 식물들의 전투력을 과소평가해서 안 된다. 단적인 예가 벌레의 대한 자위, 혹은 공격이다. 우리나라 농가에서 이른바 '해충'을 박멸하기 위해 흔히 사용하는 살충제는 대략 10종 남짓이다. 헌데 풀과 나무도 나름의 '살충제'를 내뿜으며 벌레들에 맞선다.
자연 살충제 내뿜는 식물들, 그 사활을 건 싸움그렇다면 식물들이 내뿜는 '자연 살충제'(natural pesticide)는 얼마나 될까? 익히 알려진 것만 50종이 넘는다. 수백 종의 벌레들을 물리치거나, 심하면 죽일 수도 있는 물질을 식물들이 분비하는 것이다. 식물들의 전쟁은 인간의 상상을 뛰어 넘을 정도로 입체적이다. 시각(빛), 청각(소리), 촉각(접촉) 등 사람을 포함해 동물들의 싸움에서 볼 수 있는 감각과 수단이 식물에서도 거의 다 동원된다.
'후각'(냄새)도 빠질 수 없다. 식물이 냄새를 맡는다고? 동물과 똑같지는 않지만 식물도 냄새를 맡는다. 식물들의 전투 방식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으니, 후각을 이용하는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흔히 접하는 토마토는 '헥스빅(HexVic)'이라는 자연살충제를 내뿜는다. 뿌리를 갉아먹는 나방의 유충을 퇴치하기 위해서다. 두 그루의 토마토가 있다고 가정하자. 한 그루가 유충을 공격을 받으면, 공기 중으로 'Z-3-hexenal(헥센알)이란 물질을 분비한다.
Z-3-hexenal은 사람도 맡을 수 있는 냄새를 풍긴다. 풀이나 나뭇잎을 으깨거나 상처내면 나오는 풋내가 바로 Z-3-hexenal 계통이다. 이 냄새는 사람만 맡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토마토 그 자신도 맡는다. 아직 벌레의 공격을 받지 않은 토마토는 '동료'가 분비한 Z-3-hexenal 냄새로 벌레의 공격이 이뤄지고 있음을 알아 차린다. 그리고 이 토마토 역시 헥스빅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헥스빅을 먼저 분비한 첫 번째 토마토의 벌레 치사율은 30% 수준이다. 이에 비해 두 번째 토마토의 벌레 치사율은 50%로 훨씬 높다. 두 번째 토마토의 살충률이 높은 건 '전투 준비'가 잘된 까닭이다. 즉 공격무기인 헥스빅을 미리 분비, 벌레의 기습에 대비한 탓이다.
헥스빅의 예처럼 식물이 냄새에 반응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로 '새삼'(dodder)과 토마토의 관계를 들 수 있다. 새삼은 기생식물이다. 새삼을 토마토 옆에 심으면 새삼은 냄새를 맡고 토마토 쪽으로만 자란다(
https://www.youtube.com/watch?v=NDMXvwa0D9E. 참고). 냄새가 작용하기 때문에 두 식물 사이를 빈 종이상자 같은 것으로 차단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보통 좋게 생각하는 식물 특유의 향들 가운데 열중 여덟 아홉은 자신을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식물들의 방어 수단으로 봐도 무방하다. 마찬가지로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다 생존의 한 방식이다. 또 진동과 가지를 흔드는 거센 바람을 '느끼는' 것도 다르지 않다. 우두커니 혹은 무심하게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 같아도, 식물 또한 주변과 끊임없이 교호하고 반응하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존재들인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위클리 공감(korea.kr/gonggam)에도 실렸습니다. 위클리 공감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발행하는 정책 주간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