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꽃놀이 하러
장인어른의 두 번째 제사를 맞아 식구들과 함께 내려온 경남 산청 처가. 그냥 서울로 올라가자니 아쉬운 마음에 식구들을 태우고 더 남쪽으로 향한다. 내려오면서 쬐었던 봄기운에 직감적으로 남쪽 마을의 꽃들을 떠올린 까닭이다. 아니나 다를까 언론에서는 때마침 광양 매화마을 축제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산청에서 하동까지는 약 1시간 남짓 거리. 문제는 하동에서 광양까지였다. 하동에서 광양을 가려면 섬진교로 섬진강을 꼭 건너야 하는데 오전 10시부터 그곳은 이미 많은 차들로 꽉 막혀 있었다. 다리 너머를 보니 섬진교부터 시작해서 광양 매화마을까지 도로는 그곳이 주차장인지, 도로인지 분별할 수 없는 정도였다.
넋을 잃고 그 어마어마한 차량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때마침 출발할 때서부터 잠들었었던 아이들이 일어나 찡찡대기 시작했다. 배도 고픈데, 차는 움직이지 않고. 좁은 차 안에 묶여 있으려니 좀이 쑤신 탓이었다.
몇 번이나 아이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주었지만, 어디 그게 아이 탓이던가. 결국 우리 부부는 핸들을 돌리기로 결정했다. 지금도 이 수준이라면 광양 매화마을을 가더라도 매화는커녕 수많은 인파들만 보게 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차라리 하동에서 건너편 광양 매화마을을 보는 게 낫겠거니.
섬진교 앞 삼거리를 지나니 도로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한산해졌고, 우리는 무작정 매화가 많아 보이는 마을로 차를 몰았다. 비록 광양만큼은 아니었지만, 수많은 매화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고 충분히 장관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도 매화로 유명한 하동 먹점마을이라고 했다.
올해 들어 처음 본 봄꽃.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차를 세우고 매화 밭으로 들어가니 그곳에는 이미 우리처럼 광양 매화마을을 포기한 많은 상춘객들이 각각 매화 앞에서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열심히 아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는데 까꿍이가 묻는다.
"엄마, 꽃놀이가 뭐야?"
"응~ 이렇게 차를 타고 걸어 다니면서 꽃을 보는 게 꽃놀이야."
"피. 이게 무슨 꽃놀이야, 이렇게 해야지 꽃놀이지"
녀석은 그러면서 땅바닥에 흩뿌려져 있던 매화 꽃잎을 모아들더니 공중에 뿌리며 즐거워했다. 누나가 하는 모습을 보더니 머슴아 두 녀석들도 덩달아 같이 꽃을 뿌려댔다.
그래, 나도 네 나이 때는 꽃이 좋은 줄 몰랐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우리도 꽃처럼 질 수밖에 없다든 사실을 실감하면서 매년 벌어지는 이 기적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기꺼워하며 꽃놀이를 하게 되었지. 개인적으로는 군대에서 맞은 꽃피는 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나도 이 정도인데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들은 이 봄꽃이 얼마나 눈부시게 아름다울까.
하동공원에서 바라본 광양매화마을
정신없이 꽃비를 내리는 녀석들을 겨우 추스르고 다시 하동 읍으로 향했다. 오면서 보았던 그 끔찍한 교통체증이 두려워 차라리 도로 표시판이 없는, 지도에만 있는 산길로 차를 몰았다. 비포장도로에, 차 한 대도 겨우 지나갈 수 있는 만큼의 비좁은 길이었지만, 또 그 나름대로의 운치와 멋이 있었다. 아내는 어렸을 때 자기가 바로 이런 곳에서 놀았다며 저수지 둑에서 한껏 봄기운을 느꼈다.
멀리 하동까지 왔는데 어찌 그냥 갈 수가 있겠는가. 하동의 명물 재첩국 한 그릇씩을 먹고 식당에서 나오니 하동읍내는 장터로 시끌벅적했다. 곳곳에서 봄나물을 팔고 있었고 고소한 파전에 막걸리 한 잔이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장터 먹거리의 온갖 유혹을 이겨내고 우리가 향한 곳은 하동공원이었다. 차마 광양매화마을은 갈 수 없었고,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그 맞은편의 하동공원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장관이라 하니 그곳으로 차를 몰았다.
또 꽃놀이를 간다고 찡찡대는 아이들을 겨우 달래고 올라간 하동공원. 그곳은 하동 읍을 조망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비록 광양 매화마을만큼은 아니었지만 여러 봄꽃들이 꽃망울을 피우고 있었고 하동읍을 휘휘 돌아가는 섬진강의 유려한 모습과 하동송림, 하얀 모래사장 등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강 건너 보이는 광양 매화마을. 비록 오늘은 수많은 차량들과 인파들이 광양 매화마을을 덮고 있었지만, 하얀 매화의 모습만으로도 남도의 봄기운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이 추운 겨울이 언제 지나는가 싶더니, 이젠 진짜 봄이로구나. 이렇게 몇 주 지나고 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무더운 여름이 올 텐데 조금이라도 꽃놀이를 하면서 봄을 만끽해야 되겠거니.
한편 아이들은 차를 타지 않는 것만 해도 기꺼워하며 천방지축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엄마, 아빠가 왜 저 흔한 꽃을 보며 감탄하는지 모르겠다는 눈치였지만 어쨌든 겨우내 집안에만 있었던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려는 듯 뛰고, 또 뛰었다. 좀 넘어지면 어떤가. 다시 일어나서 뛰면 될 것을.
하동공원에서 내려와 다시 산청으로 향했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고속도로 대신 국도를 택해 굽이굽이 차를 몰았다. 비록 속력을 내지 못해 조금 더 시간이 걸렸지만, 대신 산골짜기마다 스며들은 옅은 봄내음을 맡을 수 있었다. 이제 며칠이 더 지나고 나면 이 스산한 나뭇잎마다 파란 싹이 돋아다며 싱그러운 봄의 향연이 펼쳐지겠거니. 시간은 그렇게 또 흘러가고 우리의 청춘은 그렇게 새로운 이야기를 쓰게 되겠지.
봄의 아쉬움을 간직한 채 도착한 산청 처가. 숨을 고르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제만 해도 깜깜무소식이던 마당 어귀 목련이 어느새 꽃봉오리를 슬며시 내밀고 있었다. 봄 햇볕이 따뜻하긴 진짜 따뜻한가 보구나. 자, 이제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