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사학으로 비리가 끊이지 않아 학내 구성원과 갈등을 지속했던 선인학원은 1994년 시·공립화 됐다. 선인학원이 한때 거느린 학교는 14개, 그곳에 다닌 학생이 3만 6400여명, 교직원이 1만 4000여명에 달했다.1980~90년대 인천은 '노동자의 도시'로 불렸다. 전국에서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사람이 많았던 인천엔 맞벌이부부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맞벌이부부 자녀들이 다닌 학교의 상당수가 선인학원 수중에 있었다. 이로 인해 인천교육은 추락했다. 선인학원이 지금까지 그대로 존치됐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 기자 말겉만 웅장한 학교 건물들, 실내 화장실도 없어인천이 직할시로 승격하고 인구수가 100만 명을 넘어선 1981년, 선인학원 중·고등학교 재학생 수는 인천시 전체 중·고교 재학생 수의 23%, 사립 중·고교 재학생 수의 47%를 차지했다. 그만큼 인천 교육에서 선인학원의 비중은 대단했다.
그런데 고교 평준화정책 실시로 '은행 알 추첨'이나 '컴퓨터 추첨'에 의해 학교를 배정받는 상황이 되자, 학부모들은 불안에 떨었다. 자녀가 선인학원 소속 학교에 배정받을까봐였다. 선인학원 소속 학교에 배정되면, 그 집안은 초상집 분위기가 됐다.
당시 선인학원 내 건물들은 웅장하고 화려해보였다. 하지만 학생들은 아주 싫어했다. 외형만 보기 좋았을 뿐 건물 내부 상황은 열악했기 때문이었다. 내벽 공사를 하지 않아 황량하기 이를 데 없었고, 시멘트로 마감한 교실과 복도 바닥엔 늘 뿌연 먼지가 일었다.
학교가 밀집해 있어 운동장 사용을 놓고 학교간, 학생간 신경전이 벌어졌다. 초등학생은 중학생에게, 중학생은 고등학생에게 쫓겨나기 일쑤였다. 체육수업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특히 실업계인 운봉·운산·항도고교엔 실내 화장실이 없었다. 학생들은 쉬는 시간만 되면 건물 밖에 설치해놓은 재래식 화장실을 향해 뛰어가야 하는 처지였다. 상수도도 외부에 있어, 여름철엔 수도꼭지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고등학생들이 울분을 표출했다. 1980년 '서울의 봄'으로 불린 민주화 분위기에 힘입어 이 세 고교 학생 1500여 명은 3월 22일 운동장에서 ▲백인엽 축출 ▲교내 민주화 ▲실습시간 연장 ▲보충수업료 인하 ▲무능 교사 퇴진 등 8개 요구조건을 내걸고 시위를 벌였다. 시위에 참여한 학생 수는 나중에 5000여 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흥분한 학생들은 학교 유리창을 부수고, 경인전철 제물포역 앞 도로로 진출해, 지나가던 버스 유리창을 파손하기도 했다. 출동한 경찰에 의해 시위는 겨우 중단됐다.
백인엽은 학생들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겠다고 했지만, 그 날로 세 학교에 무기한 휴강을 조치를 내렸고, 5·18 광주항쟁 이후 전국으로 확대된 비상계엄을 틈타 학생 대표들을 퇴학 조치했다. 시위를 선동했다는 이유였다.
대학도 마찬가지로 열악한 환경... 학원 자율화 등 요구하며 시위대학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1980년 초반까지도 인천대 일부 건물엔 화장실이 없어, 고등학생처럼 쉬는 시간에 화장실을 찾아 건물 밖으로 나가야했다. '캠퍼스 낭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입학하니까 본관 앞에 개가 짖는 가정집이 있었어요. 아침에 등교할 때 아주머니가 세수하고 계신 거예요. 8층에서 화장실 가려면 1층까지 내려가 그 집 옆 화장실에 가야했어요." - 정명락(독문과 84학번)씨 증언.1979년에 개교한 인천대엔 실내 화장실과 상수도가 없었다. 결국 8~10층 짜리 건물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은 화장실에 가기 위해 1층으로 내려가 밖으로 나가야 했다. 인천전문대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인천전문대 학생들은 고등학생처럼 교복을 착용하는가 하면, 두발 단속과 등하교 지도를 엄격하게 받았다. 학생자치활동도 규제받았다.
결국, 개교한 지 2년밖에 안 돼 인천대에서 학내 민주화 시위가 시작됐다. 1980년 3월 31일 오전 10시, 인천대생 500여 명은 학원 자율화와 학생자치권 강화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전개했다. 이날 학생 150여 명은 강의실에 모여 철야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학생들은 '설립자가 학교운영에 간섭하지 말 것'과 교수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교수 처우 개선 내용은 ▲교수협의회를 교내 최고기관으로 승격 ▲교수의 인격 존중과 처우 개선 ▲ 교수실을 1인 1실로 할 것 등이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하는 학생 눈에도 교수들의 처우가 딱해 보였던 것이다.
"백인엽의 평판이 워낙 좋지 않아 (시위) 처음부터 '백인엽 퇴진'이었어요. 학원 문제는 건드리기만 하면 터질 상황이었습니다. 강의실, 복지시설 할 것 없이 고등학교만도 못했으니까요. 정치·사회적 논의가 부상하면 그쪽으로 쏠리면서도 이(=학원) 문제는 늘 남아있었죠" 고도원(미술학과 84학번)씨 증언다음날에는 인천전문대생 200여 명이 학원 자치권 강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사태가 확산되는 조짐을 감지한 백인엽과 재단은 4월 2일부터 10일까지 임시 휴강을 조치했다. 학생회도, 이념서클도 없는 상태에서 일어난 자발적 시위는 이렇게 무력하게 끝났다.
운동권 조력 없는 자발적 학원 민주화 투쟁인천대 학원 민주화 투쟁의 특징 중 하나는 지도나 중심 세력이 없는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개교한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학교에서 500여 명이 모여 시위를 벌이고 철야농성까지 했다. 이를 지도할 이념서클 등, 배후세력이 있었을 법하지만, 당시 학원 민주화 투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서울 소재 유명 대학이나 다른 지역 소재 국·공립 대학의 경우 유신시절부터 민주화 투쟁을 벌여온 역사와 전통이 있었다. 이른바 지하서클이나 이념서클에서 사회과학 학습과 토론 등을 하며 비판의식을 키운 학생들이 있었는데, 인천대는 그런 역사를 가진 학교가 아니었다. 인천대 첫 이념서클이라 할 수 있는 민속학연구회(탈반)는 1983년 여름에야 서클로 등록됐다. 말 그대로 자연발생적으로 학생들이 대학 내 모순을 깨우치고, 그걸 극복하기 위해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1980년에 서울농대에서 인천교회 쪽을 통해 '프락션(일종의 '강제 개조작업')'이 들어왔어요. 그러나 우리는 받지 않았죠. 자체적으로 사회모순을 느끼고, 공부하고 실천하면서 학원 민주화 싸움을 했죠." 심상준(독문과 80학번)씨 증언.관선 이사 파견과 학원 정상화 노력민주화를 짓밟고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은 취약한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부정비리 척결을 들고 나왔다. 비리 사학인 선인학원은 당시 문교부 특별감사를 받았다. 상상을 초월한 비리가 적발돼, 백인엽은 결국 구속됐다. 백인엽은 선인학원을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밝혔다. 선인학원 이사회도 국가 헌납을 의결했고, 이사 전원이 사퇴했다.
문교부는 1981년 4월 13일 선인학원에 처음으로 관선 이사들을 파견한다. 관선 이사들은 학교법인 기능 축소와 정상화를 단행했다. 학교장 중심으로 학원을 운영했고, 인사문제도 쇄신했다. 미진한 학교 공사도 추진하는 등, 엉망이 된 학원 운영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특히 당시 이규호 문교부 장관과 김민하 인천대 학장 등은 선인학원 국·공립화에 관심을 보였다. 선인학원 모든 재산을 국가에 귀속시키고, 소속 학교 중 인천대와 인천전문대는 국립대학, 초·중·고교는 공립학교로 전환하는 방안을 강구했다.
하지만 그해 7월부터 청와대 비서실의 이른바 '신군부' 핵심 인물들이 문교부의 국·공립화 추진계획에 제동을 거는 한편, 관선 이사에 백인엽의 형인 백선엽을 포함하게 하는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광주시민을 총칼로 짓밟고 정권을 찬탈한 지 몇 달밖에 되지 않은 신군부의 압력에 굴복해 문교부는 7월 11일 1차 5회 이사회를 열어 선인학원 이사회 정원을 7명에서 8명으로 한 명 늘리는 것으로 정관을 개정했다. 이어 백선엽이 이사로 선임됐다.
학생들의 투쟁과 신군부의 비리척결을 계기로 백인엽을 학원 운영에서 배제했지만, 그의 형이 이사로 선임되면서 선인학원의 민주적 운영과 국·공립화는 일장춘몽(一場春夢)이 됐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사인천(isisa.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