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1년 계획에 없던 중국어 공부를 처음 시작한 후, 이듬해 중국 랴오닝성 진저우시 현지대학교에 입학한 32살 늦깎이 유학생입니다. 올해 7월 졸업을 앞두고, 이후 중국을 더 가까이 느끼고자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가 경험한 중국의 일상생활과 유학에 얽힌 에피소드를 담담하게 풀어나갈 예정입니다... 기자말
중국대학은 4학년 1학기에 실습을 나간다. 우리 학교는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을 경우에는 한 학기를 온전히 실습으로 보내야 하며 대부분 학교가 지정한 곳으로 간다. 이에 비해 외국인은 본인이 실습할 장소를 스스로 찾아도 되고, 학교에서 보내주는 곳으로 가도 된다. 비교적 선택의 폭이 넓다. 외국이든 중국이든 실습을 했다는 증명서만 있으면 되기에 반년동안 한국에서 실습하는 한국 학생도 있다.
처음엔 호텔에서 실습을 하기로 했다. 적지만 월급도 나오고 숙식도 제공받는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언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건은 만족스러웠지만,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번듯한 곳도 좋지만, 내가 보지 못했던 중국의 속살을 느끼고 싶었다. 고민 끝에 호텔에서 실습은 포기했다. 대신 잘 곳도 월급도 없는 초등학교를 선택했다.
외국의 초등학교를 교생으로 체험한다는 것은 결코 흔한 경험이 아니다. '중국의 초등학교는 어떨까? 무슨 교육을 받을까?' 수많은 궁금증과 기대를 안고 학교로 향했다.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에 가슴이 설렜다. 물어물어 교문에 도착했을 때 그 떨림이란!
교문 앞에 교장선생님이 마중 나와 있었다. 간단한 인사치레용 커피믹스상자를 드렸다. 선물 겸 잘 봐달라는 작은 뇌물(?)인 셈이다. 교장은 사람 좋게 껄껄 웃으며 나를 학교 안으로 안내했다. 철컹. 굳게 잠긴 교문이 열리며 중국에서 실습생활이 시작됐다.
외국인이 중국인에게 중국어를 가르친다고?
'나는 사범대생이니까 교생실습을 나갈 거야. 그 곳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워야지!'
커다란 포부를 안고 내린 내 결정에 뿌듯해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외국인이 중국인을 가르친다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게다가 내 전공은 한어언문학과(중어중문학, 한국의 국문과에 해당), 중국 학생들에게 모국어인 중국어를 가르쳐야 한다. 오히려 내가 배워도 모자를 판인데 말이다.
학교 측도 난감했을 것이다. 외국인이 실습을 온 것이 처음이니 어떤 일을 시켜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일반적인 중국 대학생들은 담당 선생님을 보조하고 수업을 참관하면서 담당교사의 지도에 따라 가르친다. 하지만 외국인이 중국인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는 모양새라니!
나를 앉혀놓고 선생님들이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공연히 조용한 학교에 평지풍파를 일으켰나 싶어 슬금슬금 눈치가 보였다. 삼십 분가량 진지한 토론이 오간 후, 마침내 결론이 나왔다. 중국어 수업뿐 아니라 교양과목인 미술, 음악 등 모든 수업을 참관할 수 있게 해 중국의 학교생활을 실컷 경험할 수 있도록 하되 방과 후나 점심시간을 이용, 간단한 한국어를 가르치며 교생의 본분도 잊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고마웠다. 외국인을 배려한 훌륭한 방법이었다.
꿈을 위해 달리는 대륙의 어린이들
수고스럽게도 선생님 한 분이 학교 곳곳을 소개해줬다. 진저우(锦州)시에 위치한 평화소학교는 우슈(武术, 중국의 고유 전통 무술)와 서예로 유명하다. 우슈를 배우기 위해 일부러 이곳으로 진학하는 학생도 많다고 한다.
운 좋게도 학생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초등학생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동작이 날렵해 입이 벌어진다. 미래의 이연걸인 아이들은 사리지 않고 허공과 바닥으로 온몸을 내던진다. 거의 무협영화의 한 장면이다. 초등학교 때 아무 생각 없이 뛰어 놀았던 나를 생각하니, 꿈을 위해 어릴 때부터 노력하는 아이들이 멋있어 보인다.
운동장은 한국과 달리 흙이 없었다. 가장자리에는 트랙이 크게 한 바퀴 깔려있고 그 밖의 공간은 모두 시멘트 같은 것으로 메워져 있다. 그나마 건물 앞 화단이 황량함을 어느 정도 감춰주고 있다. 귀퉁이엔 학생들이 가꾸는 작은 농원이 있었는데, 가지나 토마토 등이 탐스럽게 매달려 있다. 선생님이 "다 익은 것은 학생들과 수확해 나누기도 한다"며 토마토 몇 개를 따서 건넨다. 먼지를 닦고 한 입 깨무니 달큼하니 키운 정성이 느껴졌다.
초등학교 때 학교 안에서 키우던 동식물이 생각났다. 농원에 자란 잡초를 뽑거나 똥을 치웠던 힘든 기억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토끼는 귀엽긴 했지만 냄새가 지독하고 성격이 포악해 만지지 못해 아쉬웠다. 작은 고구마를 캐 친구들과 웃음으로 나누던 추억도 뒤따른다. 다른 나라에서 이런 저런 어릴 적 기억이 피어오르는 걸 보면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하다.
어디서나 주목받는 한국인, 잘 해낼 수 있을까?
어느덧 점심시간이 다가 왔다. 선생님은 분주히 발길을 재촉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오르며 살펴보니 각 반 복도마다 철제 도시락이 담겨진 상자들이 나란히 놓여 있다. 선생님과 학생들을 위한 점심급식이었다. 교실에서 식사를 마치고 각자 자신의 도시락 통을 씻어 돌려놓는 것도 재미있는 풍경이었다.
학교마다 사정은 다르지만 우리 초등학교는 유료급식이다. 때문에 점심시간에 밖에 나가 밥을 먹는 아이도 있고, 부모가 도시락이나 먹을거리를 가져와 교문 앞에서 아이에게 먹이는 광경도 흔하다.
처음이라 어리둥절 하는 나를 위해 선생님이 직접 도시락을 챙겨주었다. 교무실의 본인 자리를 내주며 앉아 먹으라고 한다. 괜히 자리까지 뺏은 것 같아 미안해 손사래를 치니 괜찮다며 아예 나가버린다. 고마웠지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덜렁 혼자 먹고 있자니 민망하고 쑥스러움이 밀려온다.
게다가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시선들. 모두들 신기한 눈길을 보내는 탓에 밥이 어디로 넘어가는지 모르겠다. 내 도시락만 하얀색 일회용 용기여서 왠지 더 외로웠다. 밥에서 스티로폼 맛까지 느껴진다. 실습생은 돈을 내고 따로 시켜 먹는 거라 차이가 있다고 한다. 한 끼에 7위안(약 1300원). 밥은 공짜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래도 싼 가격에 만족했다.
그럭저럭 식사를 마치고 앞으로 내가 있어야 할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문을 두드렸다. 선생님 두 명과 먼저 온 중국실습생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선생님이 나를 소개하자 순식간에 관심이 쏠렸다.
"젼더한궈런마? 전머라이쩔? (진짜 한국인이야? 어떻게 여기 온 거야?)"
여성들인 실습생들은 이외에도 한국에 대한 여러 궁금증을 쏟아내고서야 자기소개를 했다. 나와 같은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하는 대학원생들이었다. 20대 중반인 명랑하고 친절한 그녀들과 친해지기는 어렵지 않았다. 덕분에 첫 만남부터 폭풍 수다를 떨었다. 선생님들도 사람 좋은 웃음으로 인사를 건넸다.
순조로운 출발에 마음이 풀리며 기분도 좋아졌다. '선택이 나쁘지 않았구나. 앞으로 조금 더 용기 있는 선택을 하고 살아도 되겠다'는 자신감도 생겨난다. 누구도 선택한 길의 끝은 모른다. 지금의 나는 십 년 전에 상상했던 내가 아니다.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아서 인생이 더 스릴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