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가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았음에도, '아마도 그럴 것이다'와 같은 추측으로 인해 어느 날 갑자기 끌려가 죽은 사람들이 있다. 그것도 국가에 의해서,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 당사자도 남겨진 가족도 원통할 일이다.
옛사람들은 흔히 나라를 어버이에, 백성들 즉 국민들은 자식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 비유를 빌어 표현하자면, 어느 날 갑자기 이무 것도 모르는 자식을 부모가 모진 폭행을 해 죽인 꼴이다. 대체 이 파렴치한 만행을 어떤 이유와 변명으로 이해시킬 수 있을까?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대한민국 국군과 경찰, 반공 극우 단체 등에게 학살당한 수많은 사람들 이야기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망자만 국민보도연맹원이나 양심수 등을 포함해 4934명. 10만 명에서 최대 20만 명으로 추정되는 민간인들을 살해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국민보도연맹대학살사건' 이다. 이 사건은 그러나 지난 수십 년 동안 가해 그 주체인 국가에 의해 철저하게 은폐되었다. 가장 큰 피해자인 가족들은 입에 올려서도 안 되었다. 입에 올리는 그 자체가 죄가 될 정도로 금기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묻혔었다.
국가에 의한 학살, 어떻게 잊혀졌나이 학살사건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말 전국 각지에서 피해자들의 시체가 발굴되면서. 이로 실제 있었던 사건임이 확인됐다. 그리고 2009년 11월, 정부는 비로소 국가기관에 의해 민간인이 희생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북멘토 펴냄)은 이 '보도연맹학살사건'을 알리는 만화다. 작가는 <노근리 이야기 1>, <꽃>, <홍이 이야기>, <짐승의 시간> 등을 그린 박건웅씨.
특히 '한국 근현대사의 숨겨진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만화로 풀어내는 작업을 계속해 오고 있다'는 저자의 <짐승의 시간>은 '민주주의자 김근태가 남영동에서 견뎌낸 22일을 기록한(저자 프로필에서)' 작품으로 2014 부천만화대상 수상했다.
덧붙이면, <노근리 이야기 1>은 한국 전쟁 중에 미군에 의해 수백 명이 충북 영동 노근리 쌍굴에서 학살당한 것을 주제로, <꽃>은 빨치산의 이야기, <홍이 이야기>는 제주 4·3 항쟁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최용탁의 동명 단편소설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이 원작이다. 작가는 '자신이 죽어야 하는 이유도 모른 체 죽임을 당한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그 가족들의 비극'에 특히 주목한다. 책은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한 그 며칠과 남겨진 가족들이 남편 혹은 아들의 시신을 찾아 헤매는 비극적인 며칠 동안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앞서 작가의 <노근리 이야기 1>을 접한바 있다. 그래서 작가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독자라면 별생각 없이 넘겼을 '한 평범한 형제가 사건이 나던 날 동네 뒷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동네 사람 누군가 지서로 모이라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것'부터 남다르게 와 닿았다.
"우리 근현대사에는 사람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다. 역사가가 도저히 서술할 수 없는 부분, 사진가도 렌즈를 갖다 댈 수 없는 광경, 사진을 찍었다 한들 차마 들여다 볼 수 없는 장면이 너무나 많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단 며칠 사이에 떼죽음을 당했는데, 그 죽음을 애도해도, 기억해서도 안 되는 나라에서 인문학의 붐이 분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힘들지만 직시해야 할 사건이 국민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이요, 그것을 아이와 어른이 모두 보기 쉽게 다룬 첫 책이 바로 박건웅의 만화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이다. 만화이지만 이 책이 담고 있는 구체성과 사실성, 특별히 36~37쪽의 연행 장면은 민간인 학살의 죽음이 갖는 집단성과 개별성을 함께 보여주는 놀라운 그림이다." - 한홍구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추천의 글'흑과 백만으로 표현된 목판화의 거칠고 투박하면서 담담한 그림'은 작가의 특징이다. 등장인물들이 학살의 순간에 느끼는 두려움과 고통을, 가족들이 느끼는 고통과 비극을 최대한 전달하고자 필요한 것만 담담하게 전하자 극과 그림을 최대한 억제한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 더 처절하게 와 박힌다.
어린 물푸레나무의 기억, 다시 우리에게화자는 사건 당시 만 4년이 채 안되었던 어린 물푸레나무 한 그루. 형제가 몇 시간 전까지는 땔감을 하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던 곳이나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그 몇 시간 후 순식간에 시체의 골짜기로 변한 곳에서 살아가는 물푸레나무 자신이 며칠 동안 보았던 것들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그 순박한 형제들도 희생되었을 것이라, 그래서 더 처절하게 스며든다.
아울러 지금도 자신의 뿌리에 엉켜있는 그때 희생당한 사람들의 사람들에게 잊혀져버린 뼈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낸다. "그 뼈들은 아주 단단해서 좀체 썩지 않을 것이다"란 말과 함께. 물푸레나무의 마지막 이 말은 가해자이면서도 은폐하고 금기시함으로써 더 깊은 학살을 지속적으로 잇고 있는 가해자들을 향한 일종의 경고로 들린다면 지나칠까.
"산청, 함양 민간인 학살사건을 저지른 서른이 채 안 된 국군 지휘자는 자랑스럽게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나는 그저 위에서 시켜서 한 것일 뿐이고, 지금도 그것이 나라를 지키는 애국이라고 생각한다.'저는 생각합니다. 기억하는 것.어쩌면 그것만이 거대한 힘을 가진 국가폭력에 우리가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오직 기억하는 것이 망각의 시대 뒤로 숨은 추악한 진실을 끌어내고 학살자들을 정의의 심판대에 세울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작가의 말' 중에서다행히 그나마 누군가 기억하고 있었던 덕분에 세상에 알려지고 진상규명을 향한 물꼬가 트였다고 한다. 국가기관이 국민을 상대로 처참한 만행을 저질렀음에도 부끄러운 변명마저도 없이 묻혀버렸던 1950년 7월 그 날의 비극을 다양한 연령층이 알 수 있도록 쓴 이 만화가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촛불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권한다.
덧붙이는 글 |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최용탁 지음 / 박건웅 그림 / 북멘토 펴냄 / 2015.05 / 1만4000원)
'제18회 부천국제만화축제(2015.8.12.~8.16) 특별전에서 작가의 <짐승의 시간>에 그려진 끔찍한 고문과 그 현장 장면들이 전시될 예정이라고 한다. '2014 부천만화대상 수상자의 영예'로 마련되는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