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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일상이었다면, 길면 길고 짧으면 짧다 할 수 있는 시간.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이 최초 확진자 발생 이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대응 민관합동 긴급점검회의를 개최하기까지 걸린 시간. 메르스 사태가 '국가재난'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는 동안, 국가의 지도자가 손놓고 그 시간을 보냈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아니, 절망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것 같다. 확진자 발생일인 지난 5월 20일 이후 박근혜 대통령의 일정을 보자.
5월 21일 목요일 - 오후 : '믹타(MIKTA)' 외교장관 접견5월 22일 금요일 - 오전 : 충남 창조경제혁신센터 출범식, 오후 : 충남지역 창조경제 실현을 위한 산학연 오찬, 천안 고용복지플러스센터 현장방문5월 26일 화요일 - 오전 : 제22회 국무회의, 오후 : 나카오 타케히코 아시아개발은행(ADB) 총재 접견5월 27일 수요일 - 오전 : 일자리 창출을 위한 중소기업인과의 대화, 오후 : 일자리 창출을 위한 중소기업인과의 오찬, 문화가 있는 날 행사5월 28일 목요일 - 오전 : '카리모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 내외 국빈방문 공식환영식, 단독 정상회담, 오후 : 협정서명식, 미국 하원의원 대표단 접견5월 29일 금요일 - 오전 : 제22차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무인 이동체 및 엔지니어링 산업발전 전략보고회)6월 1일 월요일 - 오전 : 대통령 주재 수석비서관회의, '가오 후청' 중국 상무부장 접견, 오후 : '한일 현인(賢人)회의' 대표단 접견, '디디에 부르크할터'스위스 외교장관 접견6월 2일 화요일 - 오전 : 전남 창조경제혁신센터 출범식, 전남 창조경제혁신센터 시찰, 오후 : 전남지역 창조경제 실현을 위한 산학연 오찬
이렇게 길게, 대통령의 일정을 확인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과연 메르스 사태가 이렇게 확산되기까지 보고체계가 작동했는가, 세월호 이후 그렇게 강조됐던 '컨트롤 타워'로서 청와대가 역할을 다했는지 여부의 단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진자 판정 이후 오찬 자리만 몇 번인가. 메르스 대응 민관합동 긴급점검회의가 잡힌 3일 오전까지도 ADD 안흥시험장 방문 및 오찬을 해야 했을까. 창조경제혁신센터 출범식은 매 지역을 순회 방문해야 하는가.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27일 자신이 만들었다고 자부심을 느낄지 모를 '문화가 있는 날' 행사에 참석, 허영만 화백과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환자와 환자 가족들, 그리고 지금도 불안에 떨고 있을 국민들이라면 어이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JTBC <뉴스룸> 손석희 앵커는 3일 방송에서 이렇게 꼬집었다.
"3차 감염자까지 발생해 모두가 크게 걱정했던 어제(2일) 대통령은 전남 여수를 방문했습니다. 창조경제혁신센터 개소식 축사를 위해서였습니다. 재난 컨트롤타워의 중심에 있어야 할 국무총리 자리가 비어 있는 와중에서였습니다."14일과 골든타임, 박근혜 대통령은 무얼 했나
그리고 '골든타임'. '유체이탈화법'으로 명성을 더해가는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초기부터 즐겨 쓰는 표현이 바로 '골든타임'이다. 이 표현이 공식석상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취임 직후인 2013년 4월 17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정무위원회 소속 새누리당 의원들과의 오찬 자리에서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의 골든타임은 지켜지지 못했다.
메르스 사태 역시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지난 5월 26일 열린 제22회 국무회의에서 역시 메르스 관련 대책은 언급조차 없었다. 늦장 대응으로 질타를 받고 있는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박 대통령이 국무회의 당시 불호령을 내렸다면, 느슨해진 방역체계를 좀 더 조일 수 있지 않았을까.
총리 직무대행은 어떠한가. '총리 잔혹사' 시대에 총리 직무대행을 맡은 최경환 부총리 역시 확진자 발생 13일 만인 2일 범정부 대책회의를 주재하긴 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유럽 출장길에 올랐다. 3일부터 양일간 열린 '2015 OECD 각료 이사회' 참석을 위해서다. 이 출장은 5박6일 일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3일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주재한 관계 대책회의 역시 허탈하기는 마찬가지다. 앞서 지난 1일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특유의 화법으로 일반론을 설파했던 박 대통령은 확진 환자 수를 틀리게 말한 것으로 밝혀져 원성을 사고 있다. 대책회의 자리에서의 발언 역시 질타를 받고 있다.
"그동안 여러 문제점들에 대해, 또 국민 불안 속에서 어떻게 확실하게 대처 방안을 마련할지 이런 것을 정부가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정부"와 "대통령"을 분리하는 특유의 영혼 없는 화법에 사태 해결의 의지가 있기나 한 것이냐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그 "정부"가 바로 "대통령"이라는 본인이라는 지적이 줄을 잇고 있다.
"메르스 사태는 제2의 세월호 참사"
"그동안 세월호 사건을 맞이하면서, 우리가 전반적인 사회의 문제점, 특히 관료사회의 무사안일, 무능 이런 부분이 이런 사건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전면적인 혁신을 하자라고 하면서 1년을 지나왔는데... 1년이 지난 시점에 와서 메르스 사태를 보면서 제2의 세월호 참사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4일 평화방송 라디오 <열린세상 오늘 윤재선입니다>에 출연한 새누리당 정병국 의원은 직접적으로 '세월호 참사'를 언급했다. 이번 메르스 사태의 정부 대응책을 두고 야당은 물론 여당과 보수언론까지 대통령과 정부의 무사안일을 꼬집고 나섰다.
3일 열린 새누리당 최고중진연석회의에 참석한 이재오 의원 역시 "첫 번째 환자가 사망한 날 청와대는 무엇을 했나"며 직격탄을 날렸다. 4일자 <조선일보> 사설은 그런 점에서 무척이나 흥미롭다.
"박 대통령은 대책 회의에서 '실태를 파악하고 국민에게 알리라'는 식의 홍보를 강조했다. 과연 대통령의 현실 인식이 국민이 느끼는 불안감과 일치하고 있는지 많은 사람이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중략)이제 대통령은 주저 말고 과단성 있는 행동을 해야 한다. 지금은 토론·논의보다는 행동이 절실한 때이다. 대통령은 방진복(防塵服)을 입고 현장을 방문해서라도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국민을 안심시킬 수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중략) 박근혜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은 이미 세월호 참사 때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메르스 사태에서까지 국민으로부터 불신당하면 정권은 회복 불가능한 구렁텅이로 빠져버릴 것이다. 정권이 결정적인 고비를 맞았다는 것을 대통령만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 (<조선일보> 6월 4일자 사설 '대통령은 '방역 獨裁' 욕 먹을 각오로 과단성 있게 행동해야 중에서' )보수언론들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행동을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과연 <조선일보>의 주문대로 박근혜 대통령이 '방진복 촬영'이라도 불사할지 지켜볼 일이다.
'메르스 확산 지도' 퍼지는 이유, '무정부' 정부 때문
청와대는 4일 메르스 대비 당·정·청 긴급회의를 열자는 새누리당 지도부의 제안을 사실상 거절했다고 한다. 대신, 정부는 민간 전문가도 참여하는 메르스 종합 대응 태스크포스를 컨트롤타워로 세우고, 이를 지원하는 '범정부 메르스 대책 지원본부'를 조직한다고 밝혔다.
4일 현재 확진 환자 35명, 사망자 3명, 그리고 확산되는 의심 환자와 국민들의 불안... 컨트롤 타워가 제대로, 신속히 작동하기를 바라는 것이 국민들의 다 같은 마음일 것이다.
개인이 만든 '메르스 확산 지도'가 4일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연유도 마찬가지다. 그간 정부는 메르스 관련 정보를 제대로 공개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층 더 국민들의 혼란을 가중시키며 괴담 양산을 자처해 왔다. 무정부 상태를 보여준 이 정부의 위기관리능력에 대한 불신이 메르스 확산 지도라는 일종의 집단지성에 의한 정보 공유의 형태로 퍼지고 있는 것이다. 3일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이 홈페이지에 공개한 메르스 상황판 역시 같은 맥락이다.
늦은 대응으로 확산을 키운 것도 모자라, 일부 여당 의원들과 야당, 그리고 다수의 국민이 원하는 메르스 관련 정보에 대한 비공개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박근혜 정부. 그런 행태에 많은 국민들이 2003년 사스 발생 당시의 상황을 되돌아 보고 있다. 급속도의 전파 속도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발생하지 않았던, 그래서 세계보건기구로부터 사스 예방 모범국 평가를 받았던 그때 말이다.
SNS 상에서는 메르스 첫 사망자의 아들로 보이는 이의 글이 회자 되는 중이다. 그 장문의 글은 평택 내 병원들과 질병관리본부의 '나 몰라라'식 대응이 어머니를 죽였다는 절규에 가깝다. 14일 미국 방문을 계획 중인 박근혜 대통령이 그때까지 그러한 국민들의 호소를 들을 생각이 없다면, 다만 자신이 2004년 김선일씨 피랍 사건 당시 내뱉었던 말만이라도 곱씹어 보길 바랄 뿐이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국민들은 노무현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에 분노하며 국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갖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