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수업'은 재미과학자 한도원 박사(84)의 일대기 입니다. 한도원 박사의 삶은 험난한 시대를 살아온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의 삶 자체이면서 귀중한 현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녘에서 보낸 소년기, 혈혈단신으로 탈출하여 남녘에서 보낸 청년기, 그리고 1955년 '8달러'로 시작한 미국 유학생활 등, 삶의 고비들은 극적으로 통과해온 그의 일생은 한편의 잘 꾸며진 드라마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도원 박사는 2002년 은퇴한 후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가 제공한 자료들과 구술을 토대로 기자가 스토리를 재구성합니다. 이 기사는 1인층으로 서술됩니다. - 기자말일대기를 쓰는 목적
참 잠깐인 듯 했는데 뒤돌아보니 긴 세월이었다. 내가 미국에 첫발을 디딘 때는 1955년 3월이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이 2015년이니 딱 60년 세월이 흘렀다.
우여곡절 끝에 얻은 미국행 비자를 쥐고 여의도 비행장을 떠나 사흘 만에 미국에 도착하던 그날, 내 수중에 가지고 있던 돈은 8달러가 전부였다. 나는 마중 나온 교수 집에서 점심을 먹은 그날 오후 2시부터 4달러를 주고 작업화를 마련하여 곧바로 잔디 깎는 일로부터 길고 긴 미국생활을 시작했다.
수업이 있을 때나 방학을 가리지 않고 각종 아르바이트 잡일을 하며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여 석·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이 자랑하는 세계적 제약회사인 존슨앤존슨에서 연구원으로 시작하여, 각종 권위 있는 상을 받으며 승급에 승급을 거듭했다. 1989년에는 미국 최초로 경구 피임약 노개스티메이트(norgestimate)를 발견·개발하는 개가를 올렸고, 설립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회사로부터 제약 연구가 최고의 영예인 '존슨 메달'을 받았고, 석좌연구가 지위에 오르기도 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2002년 70세에 은퇴하여 이제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각종 질병들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하면서 더 늦기 전에 나의 일대기를 써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도 10년 이상이 더 흘러버렸다. 더 이상 늦출 수 없다고 생각하던 어느 날, 은퇴지인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우연한 기회에 한 기자를 만나게 되었고, 그의 권유로 나의 일대기를 쓰기로 했다.
처음 일대기를 쓰려던 결심을 한 것은 그저 나의 자녀들과 후손들을 위해서였다. 일제와 한국전쟁 등 험난한 시대를 살아온 우리 세대들은 누구나 그렇듯이 자녀들이 고생을 모르고 자라서 세상을 너무 안이하게 살아간다는 생각과, 자신들의 선대가 나름대로 끼쳐온 긍정적인 영향을 모른 채 고마움을 잊고 산다는 단순한 생각에서였다. 또 하나는, 혹 나의 자녀들이 뚜렷한 목표를 갖지 못하여 방황하고 한 번 뿐인 삶을 허투루 살아가고 있지 않나하는 노파심이 자주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개인적이고 국소적인 이유가 나의 일대기를 쓰게 된 까닭의 전부는 아니다. 대충 나의 영문 일대기를 읽고 들었던 기자가 말하기를 "험난한 시대를 살아온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의 삶 자체 그대로가 우리의 귀중한 현대사"라면서, 특히 남과 북, 그리고 이국에서 삶의 고비 고비들을 극적으로 통과해온 나의 삶 자체가 갖는 무게가 적지 않다고 했다.
그는 나의 일대기를 일컬어 "재미를 더해 주기 위해 누군가가 연출한 한편의 광대한 드라마"라고 했고, 내 삶을 '보이지 않는 손이 연출한 8달러의 기적'이라고까지 하며 일대기를 기록으로 남길 것을 권유하고 격려했다.
북한에서의 유소년 시절을 보냈고, 혼란한 해방정국에서 청년기의 삶에 이어 20대 초반에 도미하여 숨 가쁘게 살아 온 평생이었다. 뒤돌아보니 나의 삶 자체가 우리의 현대사의 한 부분임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연배의 한국인들 치고 엄청난 삶의 곡절이 없는 분들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삶 역시 마치 꺼져가는 등불이 되살아나듯 앞뒤가 꽉 막히고 캄캄한 상황을 헤쳐 나왔다.
마치 내가 나고 자란 곳에 가까이 있던 압록강변에 끝없이 펼쳐져 있던 갈대와 같은 게 나의 삶이라고 표현하면 어떨지 모르겠다. 갈대는 세찬 광풍이 불면 땅에 닿을 정로 휘어지기는 하지만 결코 꺾이지 않는다. 나 역시 고비마다 극적으로 되살아나는 체험들을 여러 번 했다. 젊은 시절에 특정 종교의 신을 믿지는 않았으나, 삶의 고비에서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을 여러 번 받았다. 그때마다 나는 분연히 일어섰고 기도했다. 그리고 그 기도의 끝에서 나는 "내 배를 채우는 삶으로 만족하기 보다는 누군가를, 많은 사람을 돕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었다.
나는 열심히 살았고, 내가 택한 길을 후회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목적이 분명한 삶을 살았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불완전한 자신을 안고 끊임없이 선택하고 결단하며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진지한 삶을 살았다. 나의 이야기가 누군가에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삶의 원기가 되기를 바란다.
나의 어머니, 그리고 후창리 내 고향
나는 1931년 11월 20일 평안북도 후창군 후창면(현재는 양강도 김형직군 김형직읍)에서 아버지 한성범 어머니 조완옥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업으로 집을 떠나 만주에서 머물렀고, 종종 바람처럼 집에 들렀다가 사라지곤 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농토가 있었던 데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근면하고 부지런한 성정으로 집안 형편은 유족했다. 여러 사람에게 소작을 주었을 만큼 지주 집안으로 친지들과 친구들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어머니는 소작농들을 꼼꼼하게 관리하여 객지의 아버지가 집안 대소사를 모두 맡길 만큼 함경도 특유의 억척 여성이었다. 생활이 풍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6남매 모두의 입성이나 먹을 것 등을 손수 챙기셨고, 자식들이 비뚤어지지 않도록 노심초사 하였다. 특히 누구보다도 교육열이 대단하여서 가까운 곳 강계보다는 안주 지역의 학교에 자녀들을 보낼 정도였다.
나는 집과 가까운 후창 유치원과 후창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안주 중학교에 입학하여 기숙사에서 지냈다. 방학 때면 집에 돌아와서 지내며 어머니의 보살핌을 듬뿍 받고 개학하면 학교로 돌아가곤 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있다. 내가 방학하여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는 버선발로 뛰어나와 "아이고 우리 장남 왔네, 어찌 이리 말랐음매!"라며 맞아들이고는 보약을 달이고 내가 좋아하던 엿과 떡을 만든다고 야단이었다.
어머니는 특히 장남인 나를 상전 대하듯 했다. 집안의 기둥이었고 모범생으로 자라며 기대를 한 몸에 받았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직접 짓는 농사일이 만만치 않았으나 장남인 나에게는 농사일을 거들게 하거나 함부로 심부름을 시키는 일도 없었다. 나는 늘 집안 어느 구석엔가 틀어박혀 책을 읽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너무 책만 읽어 건강을 해칠 것을 염려한 어머니는 해가 지면 전깃불을 끄고 억지로 잠을 청하게 했다. 나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잠든 틈을 타서 몰래 전깃줄을 밖으로 끌어내 책을 읽곤 했다. 내가 밤을 새워 읽고 있던 책들은, 학교 공부를 위한 교과서들 외에도 세계문학전집들이 대종을 이루었다. 아버지가 종종 들러 가져다 주신 문학전집들은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 산골마을 소년에게 미지의 삶에 대한 끝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주기에 충분했다.
한쪽이 긴 ㄷ자 집 한구석 내 방 벽은 온통 책으로 둘러쳐져 있었고, 종종 친구들에게 생색을 내며 빌려주곤 했다. 읽던 책 중에 정말 소중하다 싶으면 늘 휴대하며 읽고 또 읽곤 했는데, 1947년 남쪽으로 내려올 때도 한 권의 책을 가지고 내려왔다. 1934년에 일본 중앙공론사에서 나온 톨스토이의 전집 가운데 '영생의 길'이란 일어 소설로, 나는 지금도 이 책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어렸을 적 나는 의사가 되어 병들고 가난한 이들을 돕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의 이런 꿈을 기특하게 여기셨고, 동생들도 나를 자랑스레 여기고 아버지처럼 따랐다. 어머니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라던 초등학교 시절을 기억하면 잊히지 않는 장면들이 떠오르곤 한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절로 나오면서, 마음 한켠으로는 울컥하는 감정이 솟는다.
나는 학교에 갔다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부터 찾곤 했는데, 어머니가 즉각 대답을 안 하거나 안 보이면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어머니는 이게 애잔하면서도 귀여웠던지 종종 장난을 치시곤 했다. 일부러 대답을 안 하시고는 내가 울음을 터뜨리면 기다렸다는 듯이 "내, 요기 있음매!" 그러며 웃음 띤 얼굴을 삐죽 내밀곤 하셨다. 웃음과 울음이 범벅이 된 얼굴로 엄마 품으로 달려가면 얼싸 안아주시던 어머니. 나는 이런 어머니의 모습을 1947년 어느 날 북녘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온 이후 다시 뵙지 못했다.
내가 살던 고향 후창은 40여 호쯤이 있던 산골 마을이었다. 동네 앞쪽 길게 뻗은 깊은 골짜기 사이로 두만강 지류인 후창강이 흐르고 있었다. 봄철이면 개나리 진달래가 온 동네를 물들였고 내 또래 여자 아들은 야산에서 쑥을 뜯거나 고사리를 꺾으러 산에 오르곤 했다. 여름이면 동네 친구들과 멱을 감거나 대나무로 발을 엮어 만든 망이나 작살로 고기를 잡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해질녘까지 고기를 잡다 잠시 허리를 펴서 눈을 돌리면 산 아래쪽으로 물보라가 생기는 모습들을 보며 신기해하곤 했다. 동생들이 "형아야! 어머니가 밥먹으로 오래!"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서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겨울철에는 동네 뒤로 빤히 보이던 완만한 경사의 산 능선에 싸인 눈밭에서 노루잡이를 하던 기억도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친구들 여럿이서 노루를 에워싸고 냅다 내몰라치면 얼마 가지 못해 힘에 겨운 듯 눈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고 박장대소를 하곤 했다. 나는 종종 아버지가 사다준 스키로 시원하게 뻗은 산허리를 타며 즐기거나 얼어붙은 후창강에서 스케이트를 타곤 했다. 종종 젖은 몸을 말리려 불을 피우고는 미리 가져간 감자를 넓적한 돌판 위에 올려 구워 먹던 기억도 난다.
비록 학교에 가면 일본식 규율에 따라 훈련도 받고 비행장 노역으로 공부 반 일 반으로 지나던 일제 치하였고, 피곤하고 핍절해 보이는 이웃들의 고단한 삶의 그림자들이 깊게 드리웠으나, 나의 어린 시절은 어머니의 무한대의 사랑과 유족한 살림 덕분에 영롱하고 아름답던 추억들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리고 세상모르고 살던 나에게 1945년 8월 15일이 어느 날 성큼 다가왔다. 막 연애소설에 재미를 붙이던 14세 때였다. 36년 세월 동안 일제의 압제를 이래저래 적응하며 살아오던 많은 사람들에게 해방은 기쁨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고난과 슬픔의 시작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플로리다 <코리아위클리>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