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는 종종 '두려움'의 동의어로 통한다. 대부분의 다른 질병들과 달리, 바이러스로 인해 생기는 병은 이렇다 할 "약이 없다"는 점에서 때때로 인간에 치명적인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바이러스와 인간은 불구대천의 원수지간 일까? 얼핏 생각하면 '바이러스=가해자', '사람=피해자'인 거 같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인간이란 동물은 유전자 차원에서 따지면, 약 1/10 정도는 '바이러스'이다. 예컨대 일상적으로 만나는 직장 동료나 친구가 '겉으로는' 사람 모습을 하고 있지만, 게놈 기준으로는 '인간과 바이러스'의 연합체로 보는 게 보다 정확하다는 얘기이다. 바이러스는 유전물질(DNA, RNA)을 중심으로 이뤄진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쯤 되는 존재이다.
헌데 DNA로 이뤄진 인간의 게놈 가운데 최대 10%는 원래 바이러스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옛날 옛적 인간의 몸에 침투한 바이러스가 아예 우리의 유전자 안에 끼어 들어와 자리잡게 됐고, 그 유전자가 대대손손 물려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바이러스 감염 역사는 실은 인간 '탄생' 이전부터 시작됐다. 예를 들어 사람과 침팬지의 공통 조상들도 바이러스에 감염되곤 했다.
애초부터 사람이란 생물은 바이러스를 안고 사는 게 숙명이었을 수도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진화과정에서 살아 남기 위해 유전자 변이를 거듭해 왔는데, 변이된 유전자 가운데 103개가 바이러스 감염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기후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변이된 유전자 11개에 비해 훨씬 많은 것이다. 거칠게 이를 해석하면, 빙하기처럼 갑작스럽게 찾아온 기후변화보다 바이러스의 내습이 인간의 생존에 훨씬 위협적일 수 있다는 점을 방증한다.
적대하면서 동시에 공존해 온 관계그러나 오늘날의 인간들이 있기까지 바이러스가 일방적으로 사람들에게 피해만 입히지는 않았다. 예들 들어, 지구상에서 한때 현대 인류의 가장 큰 잠재적 경쟁자였던 네안데르탈인이 절멸한 데는 바이러스가 결정적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고 짐작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대략 30만년 전 지구상에 출현했다가 4만년전 갑자기 사라진 네안데르탈인은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는 여러 미스터리를 던져 놓고 있다.
네안데르탈인 멸종한 데 반해 오늘날 인류의 조상(호모 사피엔스)들이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특정 바이러스에 대해 호모 사피엔스가 더 강한 저항력을 갖고 있었다고 추론하는 학자들도 있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바이러스 감염에 따른 네안데르탈인의 사망률이 호모 사피엔스에 비해 단 2%만 높았다 해도, 네안데르탈인은 바이러스 전염이 시작된 뒤 불과 1000년 안에 절멸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슬픈 일이지만, 네안데르탈인까지 거슬러 올라 갈 것도 없이 유럽인들의 침탈 이후 사망한 북중미 원주민 가운데 많게는 90%가량이 바이러스 등 감염성 질환에 따른 것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유럽인들이 이미 저항력을 갖춘 바이러스 질환이 저항력이 없었던 원주민 사회에 급속히 퍼져 나가면서 순식간에 엄청난 원주민 희생자가 발생한 것이다. 인간과 다른 생물간의 경쟁, 혹은 인간 그룹과 그룹의 경쟁에서 바이러스가 한쪽의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한 셈이다.
관점에 따라선, 현대 인류는 바이러스와 싸움으로 튼튼하게 단련된 몸을 갖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사람의 몸 속에 들어있는 유전자 가운데 최대 10%가 원래는 바이러스 유전자였다는 점은 현대 인류가 최소한 지금까지는 바이러스와 싸움에서 이기고 살아 남은 '생물 종'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바이러스와 인간은 그러고 보면 적대하면서 동시에 공존해 온 관계이다.
덧붙이는 글 | 위클리 공감(korea.kr/gonggam)에도 실렸습니다. 위클리 공감은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행하는 정책주간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