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들고 어딘가를 응시하는 한 남자의 석상. 손에 컴퍼스와 스케치북을 든 그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와 함께 사랑스러운 자부심이 배어 있습니다.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 보이는 남자. 그 남자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나도 고개를 돌립니다.
눈부신 푸른 하늘 아래 빛나는 오렌지빛 쿠폴라. 그렇습니다. 그는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던 피렌체의 두오모,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쿠폴라를 완성한 브루넬레스키입니다.
앞서 몇 번이나 밝힌 것처럼 내 생애 첫 여행지로 이탈리아를 선택한 이유는 피렌체 때문입니다. 내 오랜 꿈의 도시, 피렌체. 이 도시를 처음 알게 된 오래 전 학창 시절부터 나는 이 도시의 모든 것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리움의 중심에는 당연히 두오모(대성당),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이 자리 잡고 있었죠.
두오모를 향한 내 그리움에 비하면, '천국의 문' 공모를 둘러싼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의 흥미진진한 경쟁 일화나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의 두 주인공, 준세이와 아오이의 마지막 약속은 그 그리움을 더 짙게 해준 애잔한 향수일 뿐이었습니다. 닿을 수 없는 인연의 연인을 향한, 결코 쉽게 다가서지 못하지만 그래서 더 간절한 그리움, 그것이 두오모를 향한 내 그리움의 본질이었습니다.
쿠폴라 천장화가 손에 잡힐 듯서둘러 아침을 먹고 호텔을 나섰습니다. 어제 '지오토의 종탑'에서 행여나 손에 잡힐 것 같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서성였던 '두오모'의 쿠폴라(Cupola, 둥근 돔형 지붕). 오늘은 바로 이곳, 브루넬레스키의 사랑과 자부심이 서려 있는 곳에 오르는 것으로 첫 일정을 시작합니다.
줄을 설 것도 없이 가장 먼저 입구에서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가 쿠폴라에 오릅니다. 463계단 중 한 계단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한 걸음, 한 걸음에 온 신경을 집중합니다. 가슴 속으로 파고 들어와 온몸을 휘돌아 나가는 두오모 속 공기도 놓치고 싶지 않아 숨마저 조심스럽게 쉽니다. 한참을 오르다 보니 쿠폴라 내부 천장화가 손에 잡힐 듯 다가옵니다.
최초의 근대적 미술사가이자 화가인 조르조 바사리가 그린 <최후의 심판>입니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 비해 평가가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미켈란젤로를 만나지 못한 내 눈에는 이마저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입니다. 또한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운 인체 묘사에서 조금씩 매너리즘으로 나가고 있는 후기 르네상스 회화의 경향도 엿볼 수 있어서 '미술 기행'을 지향하는 나에게는 놓칠 수 없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발걸음이 멈추지 않습니다. 바사리의 <최후의 만찬>으로 아무리 시선을 고정해도 쿠폴라를 오르는 내 다리를 이끄는 건 오로지 쿠폴라 뿐입니다. 쿠폴라의 성당 내부 부분을 빠져 나오자 드디어 브루넬레스키의 천재성이 눈앞에 나타납니다. 이른바 '브루넬레스키의 돔'이라고 불리는 '이중 돔' 구조가 바로 그것입니다.
1296년 인근의 경쟁 도시, 피사와 시에나의 화려한 '두오모'에 자극받은 피렌체인들은 자신들의 국력에 걸맞은 두오모를 건설하기 시작합니다. 처음 설계와 공사를 맡은 사람은 아르놀도 디 캄비오입니다. 캄비오 이후 종탑을 세운 지오토와 안드레아 피사노, 프란체스코 탈렌티 등 초기 르네상스 건축 명장들의 역량이 총동원돼 150여 년의 공사 끝에 완공된 피렌체의 두오모.
1400년대 초까지 두오모 공사는 쿠폴라를 올리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었죠. 84미터 높이의 건물 위에 직경 45미터의 거대한 둥근 지붕을, 그것도 8각형의 기단 위에 올리는 것. 언뜻 봐도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이 난공사를 해결하기 위해 피렌체인들은 수많은 논의와 공모전을 치릅니다. 하지만 뾰족한 해결책을 찾지 못해 갈팡질팡하고 있던 1420년 브루넬레스키가 나타났습니다. 10여 년 전, '산 조반니 세례당'의 청동문 부조 공모에서 기베르티에게 패하고 난 뒤 로마로 떠났던 브루넬레스키 말입니다.
브루넬레스키의 쿠폴라
로마 시절, 조각가 도나텔로와 함께, '판테온'을 비롯한 고대 로마의 건축물들과 유적들, 그리고 비잔틴과 고딕 양식의 건축들까지 낱낱이 분석해 그것들의 구조와 공간적 특징들을 파악했던 브루넬레스키. 그는 피렌체인들에게 독창적인 기법을 제안합니다. 그것은 바로 쿠폴라의 얼개틀(비계) 없이 쿠폴라를 세우겠다는 것. 그러자 돌아온 것은 정신병자 취급이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던 브루넬레스키는 결국 1421년부터 자신의 방식대로 쿠폴라를 올리기 시작합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436년, 브루넬레스키는 피렌체인들 앞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피사의 두오모와 고딕 양식의 시에나의 두오모를 넘어선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거대한 쿠폴라를 선보입니다(400만 개 이상의 벽돌이 사용된, 두오모의 쿠폴라는 목재 지지구조 없이 지어진 최초의 팔각형 돔이고,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돔이었으며, 오늘날에도 세계에서 가장 큰 석재 돔입니다). 그 순간, 피렌체 르네상스가 온 세상에 선포되었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브루넬레스키의 쿠폴라는 이중 구조였습니다. 무게를 분산하기 위해서였죠. 조금 더 무거운 안쪽 지붕과 가벼운 바깥쪽 지붕이 서로를 받치고 있기 때문에 하중이 분산돼 이처럼 거대한 쿠폴라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두 지붕 사이에 고리 모양의 테두리들을 여러 층 쌓아 올려 두 지붕의 사이의 안정성을 높였는데, 지금 내가 오르고 있는 통로와 계단이 그 고리 구조의 일부입니다. 건축 공학적 기능에 실용적 기능까지 더한 고리 구조. 브루넬레스키의 천재성이 또 한 번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링크를 클릭하시면 쿠폴라의 구조와 건축 과정에 대해 간단하게 정리된 영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영어로 돼있지만 화면만 봐도 어느 정도 짐작가능 하실 듯합니다).
그런 브루넬레스키의 천재성과 의지와 노력이 스며있는 내부 쿠폴라에 손끝을 대봅니다. 오래된 석탑에서 돌의 온기와 생명력을 느꼈다는 누군가의 글이 떠오릅니다. 만질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가까이에서 보는 것도 쉽지 않은 회화나 조각과 달리 건축물은 이렇게 만질 수도 있고, 그 속을 거닐 수도 있고, 심지어 그 속에서 함께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건축물은 그렇게 그것을 향유하는 이들의 호흡과 함께 오랜 세월을 거쳐 완성돼 가는 시간의 예술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두오모를 흠뻑 느끼다그렇게 많은 것을 떠올리며 한참을 올라가자 어느 순간 눈앞에 파란 하늘이 빛나더니 오렌지빛 피렌체가 펼쳐집니다. 분명히 어제 오후, '지오토의 종탑'에서 한 번 경험한 풍경이건만 나는 또 숨이 멎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어제와 반대로 그 종탑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섭니다.
왜, '꽃의 성모 마리아 성당(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인지 알 것 같습니다. 파랗고 투명한 하늘과 눈부신 아침 햇살 아래 온통 오렌지빛으로 반짝이는 피렌체는 그 자체로 꽃이었습니다. 오랜 그리움 속의 연인을 만나서였을까요? 그 눈부신 아름다움 속에서 나는 연방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쿠폴라에 오르기 전 만났던 브루넬레스키가 한없이 부러워집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가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단지 자신이 올린 쿠폴라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수만 가지 사연과 지난한 삶을 거쳐 그의 쿠폴라에 올라 피렌체와 르네상스를 만나는, 나와 같은 수많은 사람. 아무도 큰 소리로 환호하지 않는,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보다 깊은 가슴 울림을 느끼는 그들의 행복이 그의 쿠폴라와 함께 빛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브루넬레스키는 분명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을 겁니다.
쿠폴라에서 내려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전체를 한 바퀴 빙 돌아봅니다. 어제, 종탑만 오르고 일부러 외면했던 내가 밉지도 않은지 두오모는 그 아름다운 속살들의 작은 한 부분도 남김 없이 모두 보여줍니다. 나는 마음껏 두오모를 느낍니다. 마치, 첫 문화 유산 답사에서 부석사 무량수전과 감은사지 3층 석탑을 보고 사춘기 소년마냥 가슴 설렜던, 이십대 청춘 시절로 돌아간 듯합니다. 김동률의 노래처럼 '이런 설렘을 평생에 또 한 번 느낄 수 있게 해 줘서' 브루넬레스키가, 두오모가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성당 전체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 이제야 파사드(건물의 정면)를 제대로 봅니다. 1587년 파괴된 이후 19세기 말에 겨우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파사드는 자기보다 500살이나 많은 '지오토의 종탑'과 어우러져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파사드 맞은편의 '산 조반니 세례당'이 마침 전면 보수 공사 중이라 세례당, 종탑, 두오모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피렌체 건축의 향연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게 그저 아쉬울 따름입니다. 이제 성당 정문을 열고 두오모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쿠폴라는 정문이 아니라 다른 곳을 통해 올라갈 수 있습니다).
화려한 외관과 달리 로마 십자가 형태로 꾸며진 두오모의 내부는 매우 소박합니다. 오늘날이야 위대한 문화 유산이자 여행지이지만, 두오모의 본질은 누가 뭐라 해도 예배 공간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엄숙한 가톨릭 성당으로서의 분위기를 드러내기 위해 일부러 고딕 양식을 도입한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더구나 대부분의 진품 예술품들을 '오페라 델 두오모 박물관(Museo dell Opera del Duomo)'으로 옮겨 놓은 탓에 조금은 심심한 느낌마저 듭니다. 그래도 쿠폴라에 오르는 도중 만났던 천장화, 바사리의 <최후의 심판>과 1364년 피렌체와 시에나 사이에 벌어졌던 '카시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잉글랜드 용병 대장을 그린 파울로 우첼로의 작품, <존 하쿠드의 기마상>은 놓칠 수 없는 작품들입니다.
특히 도메니코 디 미켈리노의 <단테와 신곡>은 국문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작품입니다. 자신은 보지 못했던 15세기 피렌체의 풍경 앞에 서서 명저 '신곡'을 들고 작품 속 배경인 천국과 지옥을 가리키는 단테의 모습에서는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탄생시킨 대작가로서의 면모가 느껴집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단테 연구자이기도 했던 브루넬레스키는 천국에 대한 단테의 묘사에서 쿠폴라 건축의 영감을 얻었다고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단테가 바라보고 있는 피렌체의 모습에는 당연히 브루넬레스키의 쿠폴라가 있습니다.
이제, 성당을 나서 다시 브루넬레스키 상을 지나 미켈란젤로의 또 다른 '피에타'와 기베르티의 <천국의 문> 원본, 그리고 도나텔로의 목조각상 <막달레나 마리아> 등 피렌체 르네상스 조각가들의 진품이 있는 '오페라 델 두오모 박물관'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요? 아니면 쿠폴라에서 본 황홀경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탓일까요? 두오모를 한 바퀴 돌았으면서도 박물관이 보수 공사 중이란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것입니다. '산 조반니 세례당'도 보수 공사 중이라 그냥 스쳐 지나쳤는데 두오모 박물관까지 그냥 지나쳐야 하니 그 아쉬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어차피 모든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겠다는 것 자체가 지나친 욕심. 아쉬운 마음을 다 잡고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향합니다. 미켈란젤로를, 다비드를 만나러 갑니다.
덧붙이는 글 | 2014년 12월5일부터 2015년 1월4일까지 이탈리아 미술기행을 다녀왔습니다. 6-2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