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을 향해 주먹이라도 한 방 날리고 싶던 그 날, 나는 회사 문을 나서는 동시에 '엉엉'하고 울고 말았다. 중학교 시절이 끝나면서 고등학교 배정을 받았을 때 왜 하필 그 고등학교냐며, 왜 세상은 내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느냐며 목청껏 울었던 그 날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10년 만에 나는 다시 소리내 울고 있었다.
이런 울음은 '아, 왠지 울음이 날 거 같아'하는 예고편이 없다. 참고 참던 것을 더는 못 참게 됐을 때, 내 안의 어떤 커다란 주머니가 더는 내 억울함, 슬픔을 감당하지 못하게 됐을 때, 그럴 때 순식간에 확 터지는 울음이 '엉엉' 울음이다.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와 우는 본인조차도 놀라게 하는 그런 울음.
나와 같이 회사를 나서던 친구 둘은 귀신이라도 본 듯 깜짝 놀라며 나를 끌고 회사 옆 어디 으슥한 구석으로 꽁꽁 숨어들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친구들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가슴 속엔 응어리진 이야기가 가득했지만, 나는 그저 이렇게만 말했다.
"아우, 세상이 뭐 이러냐!"세상 속에서의 나의 위치를 아마 그때쯤 확실하게 깨달았던 것 같다. 대체로 모든 상황에서 나는 '네'를 말해야만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장소란 협소했다. 그 장소는 나와 비슷한 위치에서 역시나 '네'라고 할 친구들, 가족들 앞뿐이었다.
이후 나는 다시는 그렇게 울지 않는다. 내 안의 주머니가 더 커져 이제는 웬만한 슬픔도 거뜬히 받아줄 정도가 되어서인지도 모르겠지만, 다시는 그렇게 울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대신 더 자주 '아니오'라고 대답하기 위해 나를 단련한다. '엉엉' 우는 대신 허공을 향해 어퍼컷이라도 날린다. <플라이 대디 플라이>의 스즈키 하지메를 떠올리면서 말이다.
폭행당한 딸...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샐러리맨, 마흔일곱 살, 168cm의 키에 체중은 65kg. 평범한 보통 직장인의 삶을 살아가던 스즈키의 유일한 행복은 아내와 딸이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일상을 뒤흔드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다. 딸 하루카가 맞았단다.
놀라 달려온 병원에는 세 남자가 서 있다. 이런 일은 흔한 일일 뿐이라고 말하는 세 남자의 뻔뻔한 태도. 스즈키는 강해 보이는 그들에게 자기도 모르게 주눅이 들어버린다. 딸을 이렇게 만든 놈은 그런 그에게 조소를 보내고, 스즈키는 아무 저항도 못 하고 무기력하게 그들을 돌려보내고 만다.
이날부터 스즈키의 일상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잠을 자지 못하고 밥도 먹을 수 없었다. 스즈키와 아내, 딸의 행복은 산산이 부서졌다. 그런데 그놈은? 딸을 이렇게 만든 그 놈은 유명 배우인 부모와 학교의 비호 아래 승승장구하고 있던 고교 최고의 권투 선수 이시하라. 어른들은 돈으로 이시하라의 세계를 공고히 보호해주고 있었다. 스즈키는 그렇게 가만히 놔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모한 짓을 벌이고 만다.
드디어 등장하는 '더 좀비스'. 재일한국인 소설가 가네시로 가즈키의 최고 히트상품은 단연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인 더 좀비스이다. 가네시로 가즈키의 연작 <더 좀비스> 시리즈는 몇 년 전 <레볼루션 No.0>으로 막을 내렸지만 내 마음속 '더 좀비스'는 여전히 팔딱팔딱 살아 숨 쉬고 있다.
일본 내 삼류 꼴통 고등학교 학생들인 '더 좀비스' 멤버들이 유쾌한 몸짓으로 일본의 경직된 학력 구조에 아슬아슬한 균열을 가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내 몸을 간질인다. 저절로 환호성이 난다. 너희를 응원한다고, 너희는 할 수 있다고 소리쳐주고만 싶다.
웃으면서도 모험할 수 있다는 것을 그 아이들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함께 하면, 머리를 좀 쓰면, 조금 무모해지면, 세상엔 못 할 것도 없다는 것을 그 아이들은 알고 있었고, 그건 비단 아이들에 한한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스즈키 역시 할 수 있었다.
부엌칼을 들고 이시하라에게 덤벼들 작정이었던 스즈키는 그만 학교를 헷갈린 바람에 더 좀비스와 만나게 된다. 미나가타, 이다라시키, 가야노, 야마시타 그리고 박순신. 스즈키 앞에 얼굴을 내민 아이들은 스즈키가 원하지 않는대도 스즈키를 돕기로 나선다. 아이들은 말한다. "최고의 무대를 만들어 보겠습니다"라고.
"공포는 기쁨이나 슬픔과 똑같아서 그냥 감각일 뿐이야"
뭘 어떻게 돕는다는 거지? 이시하라와 1대1 대결을 할 수 있게끔 도와주겠단다. 단지 필요한 건 스즈키의 피나는 신체 훈련뿐. 이를 위해 준비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재일한국인 박순신. 2006년에 개봉됐던 한국 영화 <플라이 대디>에서 이준기가 맡았던 역이 바로 박순신이다.
스즈키는 회사에 한 달 반의 휴가를 내고 박순신의 지휘 아래 특훈을 시작한다. 달리기, 복근 운동, 팔굽혀펴기, 앉았다 일어나기, 발끝으로 계단 오르기, 10m 밧줄 오르기, 볼 피하기, 펀치 훈련 등 운동과는 아예 담을 쌓고 살았던 사십 대 후반의 스즈키에게는 불가능할 것 같았던 목표들도 하루, 이틀, 삼일, 한 달이 지나니 가능한 목표들이 되었다.
이러한 신체훈련과 함께 진행된 것이 또 있었으니 그건 바로 박순신표 정신 훈련. 고등학교 2학년 생이 하는 말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박순신의 촌철살인 명언들은 해이해지려는 스즈키의 정신을 바짝 조여주었다. 그중 몇 개를 꼽아보자면.
"왜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 때문에 벌벌 떨어! 공포는 기쁨이나 슬픔과 똑같아서 그냥 감각일 뿐이야! 나약한 감각에 사로잡히지 마!""자신의 상상력을 믿을 수 없으면 싸우지 않는 게 좋아. 아저씨는 죽을 때까지 누군가의 상상에 꼭두각시처럼 춤을 추며 살아가면 그만이야.""한 가지를 고집하거나 거기에 너무 심취하게 의존하면 유연성을 잃게 돼.""생각이나 힘이 너무 넘치면 모든 것을 무로 돌려버릴지도 몰라.""좋았어. 그렇다면, 오늘부터 아저씨의 세계를 만들어야지."훈련으로 달라진 스즈키, 그리고 결전의 날
한 달 반의 훈련이 끝나고 찾아온 격전의 날. 이시하라의 학교에서는 조회가 열리고 있었다. 더 좀비스와 그의 친구들 50명은 스즈키를 위해 학교를 점령한다. 조회를 받고 있던 아이들과 더 좀비스와 50명은 커다란 원을 그려 그 안에 이시하라와 스즈키를 위한 무대를 만든다. 자, 드디어 콧방귀를 뀌고 있는 이시하라와 잔뜩 위축 된 스즈키와의 싸움이 시작됐다. 과연, 누가 이길까. 뭐, 당연하다. 스즈키가 이겼다.
어떻게 이겼냐고? 자세히 말해줄 수는 없고 힌트는 순신과 스즈키와의 아래 대화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저씨가 다른 세계로 들어가서 펀치를 소용없게 만들면 돼. 그렇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이시하라의 세계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돼. 왼손 잽을 피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이시하라를 어떤 세계로 끌어들일 거야?""나의 세계."기진맥진해진 채 땅에 널브러진 이시하라. 스즈키는 방금 강한 자들이 만들어 놓은 공고한 하나의 세계를 깨뜨린 참이었다. 그가 깨뜨린 그 세계는 스즈키와 같은 약한 자들의 세계를 파괴해 놓고도 미안해하거나 양심에 가책을 느끼거나 반성하지 않은 세계, 아니 도리어 그들의 약함을 비웃는 세계였다. 그런 그 세계 앞에서 우리 스즈키들은 매번 '네' 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 거대한 세계가 스즈키 발아래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허공을 향해 날렸던 스즈키의 어퍼컷이 제대로 명중한 거였다. 이시하라의 세계에 제대로 꽂힌 어퍼컷 덕분에 스즈키는 '네'가 아닌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었다. 나는 너희가 사는 세계 따위엔 관심조차 없다고. 그러니 너희도 내 세계에 끼어들지 말라고. 내 세계에서 내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킬 수 있으면, 그거면 된다고. 그러니까!
"다시는 내 딸에게 접근하지 마. 알겠어?"더는 강요된 '네'를 하고 싶지 않은 날, 입을 꾹 다물고 참고 또 참아야 하는 날, 터질듯한 분노와 무력감이 함께 가슴을 짓누르는 날, 이런 날엔 차라리 유쾌해지고 싶다. 그럴 땐 더 좀비스를 읽는다. 그러면 내 주먹에도 힘이 좀 들어가는 느낌이다.
덧붙이는 글 | <플라이 대디 플라이> (가네시로 가즈키/ 북폴리오/ 2006. 02. 10/ 8천500원)
'책 한 잔 하고 싶은 날' 연재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