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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위원장이 계속 (로그파일) 원본을 공개하라고 하는데 그걸 공개하면 목숨을 잃는 사람이 생긴다."지난 28일 새누리당 정보위 여당 간사를 맡고 있는 국정원 출신의 이철우 의원이 당 원내대책회의에서 새정치민주연합 국민정보지키기위원장 안철수 의원을 겨냥해 한 말이다. 로그파일 속에 국정원의 대북 공작 협력자 이름이 포함되어 있어 그게 노출되면 협력자들이 사형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어서 이철우 의원은 로그파일 속에 들어있을 휴민트(HUMINT, 인적 정보)들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며 북한의 현영철 전 인민무력부장이 지난 4월 고사총으로 사형됐을 때 국정원이 이를 정보위에 신속히 보고한 사실을 예로 들었다. 휴민트들 덕분에 그런 고급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만큼 그들을 보호해야한다는 뜻이리라.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다. 어쨌든 이번에 문제가 된 RCS프로그램이 전적으로 '대북대테러 용'이라는 국정원의 말이 진실이라면, 로그파일의 공개는 휴민트들이 노출될 가능성을 높이고, 이는 국가 안보에도 분명 악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상하다. 말인즉슨 옳은데, 정부여당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려니 뭔가 찜찜하다. 목숨 운운하는 이철우 의원의 저 말이 협박처럼 느껴진다. 왜일까? 그건 하필 그들이 '휴민트'를 거론했기 때문이다.
휴민트를 붕괴시킨 사람들우리 사회에서 휴민트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언급되었던 때는 2011년 12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사망했던 때였다.
당시 청와대와 정부는 김정일의 사망을 사전에 인지하지 못해 비난을 받았다. 이와 관련해 당시 원세훈 국정원장이 국회 정보위원회에 출석해 김정일의 사망을 'TV를 보고서 알았다'고 해 많은 사람들을 더 경악하게 만들었었다. 한 국가의 정보부 수장이 일반 국민들과 다를 바 없다니. 아직까지도 북한을 '주적'으로 분류하고, 북한과 관련된 정보는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국정원이 어찌 그 지경까지 되었던가.
이와 관련하여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한 원인은 바로 휴민트의 붕괴였다. 북한 고위급들의 정보는 이 휴민트들을 통해 얻을 수밖에 없는데, MB정부 등장 이후 남북관계가 파탄나면서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10년 동안 자연스럽게 남북을 오고가며 만들어졌던 휴민트들이 방치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MB정부는 국정원을 장악하기 위해 정보계와 무관한 원세훈과 같은 인사들을 발령 내고 조직개편을 벌였다. 이것 역시 휴민트가 붕괴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국정원에서 대북 정보 수집 및 분석을 담당하는 3차장실이 대폭 축소되고, 내부 요원 200명 중 실무자들은 국내 파트로 전출되었다. 고위급 역시 축출되면서 대북정보 수집이 아예 구조적으로 힘들어진 것이다.
대신 MB정부는 그만큼의 예산을 첨단 전자 장비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는 '시진트'에 쏟아 부었는데 그 결과는 '최악'이었다. 천안함 사건(물론 북한이 공격을 했는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다만 그것이 진짜 북한의 행위라면 당시 우리 정보부는 이를 인지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과 연평도 포격은 물론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때조차 관련 정보를 재빠르게 인지하지 못했다.
국정원은 오히려 휴민트를 희생해서 얻게 된 시진트 기술을 북한 첩보보다 국내정치에 더 활발하게 이용했다. 2012년 대선 당시 소위 '댓글부대'가 그 대표적인 예다. 최근 문제가 된 해킹프로그램 역시 그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정부여당이 지금에 와서 휴민트를 보호해야 한다고 운운하다니.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10년 동안 구축된 휴민트들을 방치했던 이들이, 지난 2014년 '간첩 증거조작' 사건에서 휴민트 탓을 하며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오리발을 내밀던 이들이, 이제 와서 휴민트를 무척이나 아끼는 것처럼 그들을 핑계 삼아 정보공개를 반대한다.
그러니 어찌 이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과연 정부여당은 휴민트들을 제대로 관리하고 있는가? 물론 MB정부와 박근혜 정부는 다를 수 있겠지만, 2013년 '대선개입', 2014년도 '간첩 증거조작', 올해 해킹 프로그램 구입과 관련된 '민간인 사찰' 의혹 등으로 바쁜 국정원이 과연 그런 여력이나 있었을까?
국정원 요원들의 목숨부터 걱정해라
휴민트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듯한 이철우 의원이 발언에 이질감을 느끼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번 사건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국정원 직원 임 과장 때문이다.
비록 혹자들은 임 과장 자살과 관련해 그가 죽기 전 타고 있었던 마티즈가 이상하다느니, 그에 대한 실종 신고 자체가 이상하다느니 하며 음모론을 제기한다. 그 모든 걸 차치하고 중요한 점은 '국정원 직원이 자살을 택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만 했을까?
그가 유서에서 밝힌 이유는 간명하다. 그가 모든 책임을 지고 있었고, 그가 속한 국정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란다. 기다렸다는 듯 국정원이 임 과장의 책임을 한껏 내세우며 그의 유서가 틀리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도 일반 국민 입장에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국정원 내 한 개인이 이 엄청난 프로젝트 전체를 책임진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매우 정치적이고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을 한낱 과장급 인사가 그 위에 결제도 맡지 않고 그냥 벌였다는 게 말이 되는가? 한 국가의 정보 전체를 관할하는 조직이 정작 그 내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만큼 허술하다는 뜻인가?
또, 백번 양보해서 이 말도 되지 않은 상황이 실제로 벌어졌다고 치자. 제대로 된 정보조직이라면 한 개인이 어떤 프로젝트의 책임을 혼자 짊어지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 했을 때, 이를 저지했어야 한다. 그것은 결국 음지를 지향하는 조직 구성원이 노출되는 최악의 상황이며, 오랫동안 그 요원을 만들기 위해 투입된 자원을 허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한 명의 정보 전문가를 만들기 위해 국정원은 얼마나 많은 세금을 썼을 것인가.
그러나 국정원은 그의 자살을 거의 방조하다시피 했다. 전문가가 정보를 삭제하는데 디가우징이 아닌 딜리트 키를 선택할 만큼 우왕좌왕하고 있는데도 조직은 그를 대신해 책임지지 않았다. 오히려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씌우기 위해 분주했다.
임 과장이 죽자마자 그의 죽음을 방패삼아 이번 사건을 덮으려고 하는 국정원의 모습은 결국 그와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 그러니 임 과장이 부득이 자살을 택할 수밖에. 아마도 2014년 '간첩 증거조작'사건에서 국정원 요원이 자살했던 것 역시 이와 같은 메커니즘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이다. 과연 이런 정보조직에서 누가 충실히 자신의 임무를 소화할 수 있을까? 조직이 책임지지 않고, 문제가 생기면 오히려 개인의 탓으로 모는 조직문화에서 누가 대담한 결정을 하고, 그것을 오롯이 자신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을까? 정보조직이 잘 굴러가기 위해서는 조직에 대한 신뢰와 팀워크를 기반으로 해야 하는데 지금 국정원은 스스로를 그것을 해하고 있다.
요컨대 지금 국정원이 할 일은 내부의 조직문화를 다시 쓰는 일이다. 그들이 보호해야 하는 이들은 휴민트가 아니라 내부의 조직원들이다. 휴민트야 다시 구축하면 되지만, 조직에 대한 구성원들의 신뢰가 사라지면 그 조직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휴민트들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지금은 국정원 요원들의 목숨을 더 걱정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