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수업'은 미국 최초로 경구 피임약 노개스티메이트를 발견·개발한 재미과학자 한도원(84) 박사의 일대기입니다. 그의 삶은 험난한 시대를 살아온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의 삶이면서 귀중한 현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녘에서 보낸 소년기, 혈혈단신 탈출해 남녘에서 보낸 청년기 그리고 1955년 '8달러'로 시작한 미국 유학 생활 등에서 삶의 고비들을 극적으로 통과해온 그의 일생은 한 편의 잘 꾸며진 드라마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박사는 2002년 은퇴해 미국 플로리다 주 올랜도에 살고 있습니다. 그가 제공한 자료들과 구술을 토대로 기자가 스토리를 재구성합니다. 이 기사는 1인칭으로 서술됩니다. - 기자 말
한국 전쟁으로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내몰린 나는 염치를 무릅쓰고 친하게 지내던 급우 집을 찾아가 당분간 머물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다행히 평소 나를 칭찬하고 격려해 주던 '친구 어머니'는 따뜻하게 나를 맞이하여 안심하고 지내라고 했다.
다음 날 아침, 친구와 함께 도둑고양이처럼 길거리에 나가서 상황을 살펴보니 인민군 탱크들이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서울 시내를 구르고 있었다. 관공서뿐 아니라 웬만한 높이의 건물에는 이미 인공기가 걸려 있었고, 잔류한 일부 시민들이 길거리에서 깃발을 흔들며 인민군을 환영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한강 인근에 가보니 이미 다리란 다리는 인민군이 진을 치고 입구에서부터 차단막을 내린 채 지키고 있었다.
친구와 나는 집에 틀어박혀 있어야 했다. 소문에 인민군들이 닥치는 대로 젊은이들을 징집하여 전쟁터로 내보낸다고 했다. 곰곰 생각하던 끝에 우리는 후미진 방 하나를 골라 구들장을 들어내어 땅굴을 만들고는 그 위를 잡동사니로 위장했다. 우리는 땅굴에 들어가 지내며 서울을 빠져나갈 궁리를 했으나 딱히 방도를 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 숨어서 몇 날 며칠을 꼬부려 지내는 중에 양식이 거의 바닥나고 있었다. 밖에 나돌아다녀도 양식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터인데, 집에만 박혀 있으니 더더욱 난감한 지경이 된 것이다. 결국, 어떤 결단을 내릴 때가 되었다.
밖에서는 종종 탱크가 굴러가는 소리와 저벅저벅 걷는 소리, 여럿이서 고함치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한참 팔팔한 나이에 며칠 동안을 캄캄한 땅굴에서 지내자니 미칠 것만 같았다. 퀴퀴한 냄새와 탁한 공기를 더 이상 견디다가는 병이 나거나 지레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변소에 가기 위해 밖으로 나오거나 친구 어머니의 신호에 따라 잠시 바람을 쐬러 밖에 나오면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이런 와중에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잠시 시내를 나와 보니 피아간에 혼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멀리서 쿵쿵 포격 소리와 콩을 볶아대는 듯한 총격 소리가 30~40분간 들려왔다가 사라지고 다시 들려오곤 했다. 시내 곳곳에서는 미군 부대가 부산하게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이 곳곳에서 목격되었다. 수색 인근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일대 격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결국, 이 기회를 틈타 친구 집을 빠져나가는 것이 나를 위해서나 친구와 친구 어머니를 위해서도 안전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탈출 계획을 세운 다음 날, 내 계획을 친구 어머니에게 털어놓기 위해 땅굴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집안이 조용한 것이 이상했다. 바람을 쐬러 나간 친구는 보이지 않고 그의 어머니만 덩그러니 앉아 내가 나오는 것을 조심스럽게 지켜 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친구가 남겼다는 쪽지를 내게 보여 주셨다.
"친구 도원이를 집에 남겨두고 떠납니다. 남은 식량으로 먹고 자게 해 주세요. 시골에 살고 있는 할머니 집으로 피신해 있다가 조용해 지면 돌아오겠습니다."
평생 못 잊을 우정... 나 대신 먼 길 떠난 친구
친구의 갑작스럽고 기특한 행동에 그의 어머니와 나는 눈물을 훔쳤다. 친구는 나를 대신하여 일부러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시골 마을로 피신해 간 것이 분명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 당시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사전에 일언반구도 자신의 계획을 말하지 않았고 작별인사조차 하지 않고 기꺼이 길을 떠난 친구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인가! 평소 과묵하기만 했던 친구의 그 깊은 속을 지금도 헤아리기가 어렵다.
그러나 당시 받은 충격보다 훨씬 큰 충격을 수개월 후에 받았다. 친구가 군대에 징집되어 서울 인근 전투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나는 이미 여러 차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마음의 짐들이 적지 않았다. 게다가 나를 대신해 집을 떠난 친구가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층 무거운 부채감을 안게 됐다. 그의 어머니가 뼈를 깎는 슬픔을 겪었을 것을 떠올리면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친구가 나 대신에 스스로 집을 떠난 마당에 더 이상 집에 머물기가 미안하고 거북스러워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었다. 혹여라도 나를 숨겨준 사실이 발각된다면 친구의 어머니도 위험에 처해질 수 있는 일이었다. 친구 어머니에게 떠나겠다는 말을 꺼내자 한사코 말렸으나 내 뜻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는 순순히 허락하셨다. 친구의 어머니는 마치 아들이 떠나는 것인 양 슬픈 얼굴을 하시고는 나에게 담요와 태극기를 챙겨 주면서 "길을 가다가 혹 국군을 만나면 태극기를 내보이라"고 당부했다. 당시 일부 지역은 아직 퇴각하지 않은 인민군들이 잔류하고 있었고 어떤 지역에는 국군과 유엔군이 들어와 있었다.
효자동 친구 집을 떠나 을지로 삼정목에 있는 또 다른 친구의 삼촌 집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그 친구는 나처럼 북한에서 내려와 학교에 다니는 친한 친구였는데, 운수회사를 하고 있는 삼촌 집에 머물고 있었다. 길을 나선 후 나는 처음으로 전쟁의 참혹함을 몸소 목격하고 몸서리를 쳐야 했다.
광화문 근처를 걷다 보니 건물이 모두 파괴되어 휑하니 빈 벌판이 되어 있었다. 거리에서는 포탄 껍질이 발길에 챘고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방치된 시신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피범벅이 된 시체에서 뭔가를 뒤져서 달아나는 사람들이 있는 걸 목격하고는 몸서리를 쳤다. 비릿한 피 냄새와 시체 썩는 냄새, 폭격에 무너지고 그을린 건물 곁을 살얼음판을 걷듯이 조심조심 지나쳤다.
친구 삼촌 집을 향해 한참을 걷다 을지로 이정목 부근에서 인민군이 지키고 있는 검문소를 맞닥뜨리게 되었다. 간이 콩알만 해 지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품에는 태극기가 있었는데, 만약 들키는 날이면 잡혀가는 것은 물론,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들키면 뭐라고 둘러댈까 궁리하며 태연하게 검문소로 다가갔다.
인민군이 거총한 자세로 내 행색을 아래위로 훑어 보면서 위협적인 눈빛으로 어디로 가는지를 물었다. 나는 억센 평안도 사투리로 서울에 공부하러 온 학생이며 평안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심문하듯 가족사항, 다녔던 학교, 고향 동네 등을 물어보며 내가 북한에서 온 학생인 것을 확신한 듯 "미제와 반동 국군들이 닥치기 전에 빨리 여기를 빠져나가라"며 보내줬다.
평안도 사투리로 인민군 검문소 통과… 마산으로
무사히 검문소를 통과한 나는 한참을 헤맨 끝에 을지로 삼정목을 한참 벗어나 친구 삼촌의 집을 찾아냈다. 친구와 그의 삼촌은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자 깜짝 반가워하고는 "이렇게 살아 있어 다행"이라며 당분간 자기 집에 머물러도 좋다고 했다. 친구 삼촌이 사는 지역은 인민군이 물러가고 수복이 된 상태라서 다소 안심했으나 여전히 멀리서는 포격 소리와 총소리가 간간이 들려오고 있었다. 운수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친구의 삼촌은 여러 대의 트럭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육군병원에 징발당하여 의약품과 군용품을 실어 나르는 일을 주로 하고 있다고 했다.
몇 주 하는 일 없이 머무는 동안 친구 삼촌의 친척들이 여기저기서 몰려들어 집안은 온통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더 이상 그 집에 머물기가 미안할 지경이 되었고, 전황이 어찌 될지도 알 수 없는 일이어서 기회를 보아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부터 북쪽 끝까지 치고 올라간 유엔군이 밀리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육군병원이 통째로 마산을 향해 퇴각할 상황이 되고, 어느 날 물품 트럭이 군용품을 싣고 내려간다고 했다. 마침 친구 삼촌의 사위가 트럭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며칠 후면 물품을 싣고 내려간다고 했다.
마산으로 여러 대의 트럭이 떠나던 날 밤, 우리는 친구 삼촌의 사위가 운전하는 트럭에 담요와 물품 궤짝을 가득 실어 위장한 채 밤새 달려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마산은 피난민들과 군인들로 뒤섞여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을 자주 왕래하던 친구 삼촌은 미리 말해 둔 듯 어느 상가 2층에 딸려있던 여러 개의 방을 얻어서는 우리를 그곳에 묵게 했다. 마산은 한결 안전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여서 오랜만에 숨통이 트이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아래층 상가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황급히 달려 내려갔더니 미군 흑인 병사 다섯 명 이 주류 가게 점원 여자를 둘러싸고 있었다. 상당한 미인으로 보이는 여자는 사색이 되어 덜덜 떨고 있었다. 나를 본 미군 병사들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영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내가 "어느 정도는 할 수 있다"고 하자 안도하는 눈빛을 보이며 "네 누이가 참 예쁘게 생겼다"면서 통역을 좀 해 달라고 했다.
그들의 말인즉, 정종과 위스키를 사기 위해 가게에 들어가 카운터 앞에서 막 주문을 하려고 했더니 "네 누이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통에 자기들이 더 놀랐다"고 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흑인을 직접 본 적도 없고, 전쟁 와중에 기껏해야 먼 발치에서만 흑인을 보았을 여자 점원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덩치 큰 흑인들에 지레 놀라서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나는 점원 여성에게 이들이 당신을 해치려 한 것이 아니고 그저 술을 사려고 온 것뿐이라고 설명하자 금세 미안한 표정으로 사과했다. 서투른 영어 솜씨였지만 나의 통역 덕분에 흑인들은 오해를 풀게 되었고, 가게 점원은 여러 병의 술을 이들에게 팔게 되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의 해프닝으로 나는 다시 한 번 예상치 못한 행운을 맞이하게 되었다. 흑인들이 가게 문을 막 나서려는 순간, 내가 "일할 곳을 찾고 있는데, 좋은 곳 있으면 소개해 줄 수 없느냐"고 지나가는 말투로 툭 던지자 무뚝뚝해 보이는 흑인 하나가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따라오라고 했다. 크게 기대를 하지 않고 그들의 지프에 덜렁 올라탔다. 그런데 이번에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미 해병본부 장교식당 감독관 되다
나는 어디론가 그들을 따라 나셨는데, 가서 보니 미군 해병 본부였다. 그들은 나를 장교 식당 총 책임자로 보이는 상사에게 데리고 가서는 '착한 청년'이라고 소개해 줬다. 몸집이 크고 후한 인상의 상사는 5분여 동안 간단하게 영어 테스트를 하더니 한국인 식당 직원들을 감독하는 감독관을 맡아 달라고 했다. 식당에서 일하는 한국인들이 20여 명인데 이들 가운데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어서 애를 먹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느닷없이 미군 장교식당의 한국인 직원들을 감독하는 감독관이 되었다. 북한을 탈출해 온 이후로 위기의 때마다 놀라운 일이 벌어지곤 했는데, 이번에도 전혀 예상치 못한 반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고향 집 후창강턱에서 남으로 가는 트럭에 오를 때 어머님이 "하늘님이 너를 도우실 거다"라고 했는데,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나는 느닷없는 행운에 감사해 하면서 '누워서 떡 먹기' 같은 감독관 일을 하게 되었다. 내가 하는 일이란, 한국인 식당 직원들이 시간에 맞춰 출퇴근하는지, 구석구석 청소는 잘하고 있는지, 미군들이 요구하는 위생 기준을 잘 지키고 있는지, 식사 시 요구하는 대로 일을 잘 처리하는지, 식품 재료 보관소에 제대로 물품을 갖추고 있는지를 감독하는 등 사소한 일들이었다.
그런데 나에게는 또 다른 행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식당 감독관 일을 하는 것을 눈여겨본 상사는 나를 또 다른 자리에 추천하였는데, 당시로써는 가히 파격에 가까운 자리였다. 아마도 19세 한국 청년으로 전란 중에 나와 같은 '벼락출세'를 한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