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어떻게 우리 고모와 우리 집안의 가계를 더 잘 알고 있어요?"지난날 대학 시절 철학을 공부하던 후배가 지질학을 공부하던 나에게 내비친 의구심이다. 어느날 그 후배의 정체와 집안 내력을 알고 나서 나는 더 참지 못하고 욕심을 드러냈다. 고모를 오래 흠모해온 열렬한 팬의 입장이라며 은근히 후배를 겁박했다.
"혹시 집에 고모가 보시던 헌 책이나 한 권 가져다 주지 않을래?"그런 선배가 측은해보였던지 책 대신 고모의 성균관대 교수 시절 명함을 한 장 가져다주었다. 아마 나는 그때 마치 어린 아이처럼 기뻐서 펄쩍 뛰었을 것이다. 이후 내내 부적처럼 지갑에 고이 간직하며 품고 다니던 그 명함은 지금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후배는 바로 수필가 전혜린의 조카다. 그러니까 전혜린의 오빠 아들이다. 프랑스에서 영화공부를 하고 지금은 어느 지방 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뮌헨 하면 일단 두세 사람이 떠오른다. 단연 전혜린이 가장 먼저다. 그리고 대학원 지도교수와 울리히 벡. 셋의 공통점은 뮌헨대학 동문이라는 것. 그러니까 뮌헨에서 생각나는 사람을 묻는다면 열에 일곱여덟번은 전혜린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내게 뮌헨이라는 도시는 사실상 전혜린을 향한 추념의 무대다.
뮌헨은 유고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와 '이 모든 것을 또 다시'에 새겨넣은 전혜린의 표표한 에세이의 산실이다. 전혜린과 전혜린의 글이 나의 청년기에 살포하고 전염시킨 독특하고 격조높은 에스쁘리(Esprit)의 육묘장 같은 공간이 곧 뮌헨인 셈이다.
2014년 봄, 뮌헨에 잠시 머물렀을 때 머릿속에서 한시도 그녀는 떠나지 않았다. 그만큼 전혜린은 나에게, 내 삶에 특별한 존재다. 무엇보다 전혜린은 나에게 매우 특별한 한국인이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런 깊은 글을 쓰고, 그런 높은 생각을 하는 한국인은 본 적이 없다.
전혜린 없는 뮌헨에서 슈바빙의 자장을 느끼다
그녀는 의외로 콤플렉스 덩어리처럼 보인다. 어느새 자기의 의식 밑의 심층에 뿌리박히는 선민의식, 또는 엘리트 의식이 컴플렉스가 되어버렸다. 그녀 스스로 그 사실을 잘 깨닫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의 한국인을, 특히 한국 여성을 대표해서 이국 독일에서 그녀 혼자 감당해야했던 주홍글씨처럼.
관찰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녀의 태생과 국적의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갈수록 고립주의, 독선주의의 진심이 글과 삶 속에서 도드라지게 표출되었다. 읽을수록 더욱 더 그녀의 글은 힘들게 읽혀진다. 그리고 어김없이 비수처럼 심장에 와서 박힌다. 괜히 미안해진다.
사실 겉으로 보면 거의 맹목적으로 보이는 유럽중심주의와 개인주의적 성향 때문에 비평가들의 비판도 적지 않다. 그러나 나는 가급적 이해하려 한다. 아니 거의 이해된다. 그녀의 문학정신이 1960년대 당시 동아시아의 변방 한국이라는 나라의 근대적 속물성으로부터 스스로 방어하기 위한 불가피하고 절박한 선택이었음을.
그래서 그녀는 1960년대 한국사회의 속물성과 끝내 불화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으로서의 생활현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에 태어나 21세기까지 내내 한국에서만 살고 있는 나도 한국사회의 속물성이 이토록 힘겹다. 하물며 아득한 미개의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속물사회에 인식과 행동이 갇혀 산 그녀의 심정이야.
게다가 가정사도 그리 당당하지 않다. 전혜린의 아버지는 친일파였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에서 그 이름 석자를 발견할 수 있다. 천재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의 경찰이자 조선총독부 관리로 출세가도를 달렸다. 해방 후에도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변호사로 호의호식했다. 그런 잘난 아버지의 딸로서 많이 힘들고 아팠을 것이다.
뮌헨에서 특히 알테 피나코테크(Alte Pinakothek) 미술관에 들어서면서 전혜린의 자장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슈바빙(Schwabing) 대학가 거리가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체연수단의 일정상 슈바빙을 들를 시간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 실망했음은 물론이다.
이제 슈바빙도 변해서 지난날의 낭만적이고 자유로운 파리의 몽마르트나 한국의 대학로 같은 공간이나 환경이 아니라는 가이드의 위로는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슈바빙은 슈바빙일 테니까. 그래도 슈바빙은 전혜린의 생애사가 묻어있는 특별한 공간임은 변함없는 역사적 사실이니까.
1950년대 중후반에 뮌헨대학 최초의 유일한 여학생이었던 전혜린, 니체와 루살로메를 공부하며 제로제(Seerose)를 자주 드나들고 영국공원(Englischer Garten)을 자주 거닐었던 전혜린. 한국에서든, 독일에서든, 절대 평범하고 싶지 않았던 전혜린. 늘 다르게 살고 싶었던 전혜린. 그러나 그녀는 일찍이 요절,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노을이 새빨갛게 타는 내 방이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운 일이 있다. 너무나 아름다워서였다.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에 갑자기 울었고 그것은 아늑하고 따스한 기분이었다. 또 밤을 새고 공부하고 난 다음날 새벽에 느꼈던 생생한 환희와 야성적인 즐거움을 잊을 수 없다. 나는 다시 그것을 소유하고 싶다. 완전한 환희나 절망, 그 무엇이든지..."나도 이 나라에서든, 다른 나라에서든 다르게 살고 싶다. 완전한 환희나 절망, 그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지금 이대로만 아니면 된다. 오로지 지배나 통제는 결코 당하지 않으면서, 뭐라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그 무엇 하나를 소유하고 싶거나 그 무엇 하나로 존재하고 싶다.
안전한 독일사회에서 위험한 한국사회 경고한 울리히 벡뮌헨에서 생각나는 다른 사람은 대학원 지도교수와 울리히 벡이다. 다만 그 지도교수 이야기는 차마 입에 올리고 싶지 않다. 우리나라 대학사회에서 교수직으로 저지를 수 있는 모든 병폐와 비리가 한 몸에 체화된 사람으로 기억한다. 낭만적이게도, 전혜린이 다닌 뮌헨대학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지도교수로 결정했으나 인생사 최악의 선택이었다.
그는 사람을 상대하지 않고 자연을 상대하며 조용히 살고 싶어 선택한 지질학을 미련없이 포기하게 만든 사람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공공의 적 같은 나쁜 사람이다. 아직도 그 대학의 명예교수로, 내게는 끔찍한 트라우마로 건재하다. 내가 50년 넘게 살아본 한국사회에서 그런 유형의 사람은 적지 않다.
2015년 새해 첫날 갑자기 사망한 세계적 사회학자 울리히 벡도 뮌헨 사람이다. 한국에서는 '위험사회'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말하는 '위험사회'란 사회적 인간이 몰락하고 불안하고 불안정한 개인만 남아 서로 경쟁하고 다투는 사회를 말한다. 근대화 이후 발생한 대형 사고의 구조적 문제가 알고 보면 거의 그 지점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계급정체성이 약해지고 가족 유대가 불안정해지는 개인화 시대를 걱정하는 울리히 벡이 제시한 해법은 새로운 정치다. 새로운 정치는 급진적으로 개인화된 '정치적 시민(citoyen)'들이 기존의 제도들에 대항하는 새로운 시민사회의 발현을 뜻한다. 이때 정치는 더 이상 생활과 분리되는 제도정치에 갇히지 않고 생활과 융합하는 '생활정치'로서 기능한다는 것이다.
가령 세월호 참사에서 한국이라는 위험사회에서 생활하는 한국인, 한국 국민들은 새로운 정치적 지형이 열릴 때 비로소 그 사회의 주체로 거듭 날 수 있을 것이다. 그 경지는 희생자나 그 유가족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아니라서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이 아니라, 모두가 국가나 정부에 대한 피해자라는 공감을 서로 공유할 때 가능하다.
울리히 벡은 한국에 와서 한국인에게 직접 경고문을 전달하기도 했다. 한국을 대표적인 위험사회로 진단하고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유럽이 150년에 이룬 근대화를 50년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압축적으로 이뤘기 때문에 다양한 위험에 노출돼 있다고 과학적으로 지적했다.
특히 위험 앞에서 국가나 정부 같은 조직의 무책임이 드러나는 경우 심각한 무정부상태에 빠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국가 기관이나 제도는 국민의 신뢰를 잃고 위험은 더욱 증폭된다고 걱정했다. 세월호 참사와 그 이후 정부의 무대책이 그 징후이자 표본이라는 것이다.
뮌헨 뒷골목에서 발견한 휴지와 담배꽁초
독일 농촌공동체연수단에 끼어 열흘 남짓 주로 독일 남부지역을 돌아보는 동안 길거리에 휴지 한 장 떨어진 걸 볼 수 없었다. 속도 무제한의 아우토반에서는 교통사고는커녕 교통위반 사례도 전혀 목격할 수 없었다. 한국인의 시각으로는 결코 자연스럽지 않았다. 사람 사는 곳에 사고가 없을 수가.
내가 혹 잘 못 보았나 싶어 독일에 사는 교포 가이드에게 확인했으나 잘 못 본 게 아니라는 것이다. 독일 사람들은 다들, 원래 그렇다는 것이다. 독일의 국민들은 법과 질서와 원칙을 목숨처럼 지킨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활의 일상과 환경이 정리정돈이 잘 되어있다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독일은 도시든, 농촌이든 생태공원 같은 풍광이다.
그러다 뮌헨 시청사에서 호프브로이하우스로 걸어가는 뒷골목 쯤에서 드디어 길에 떨어진 휴지와 담배꽁초를 발견했다. 동양의 관광객이나 외국에서 건너온 불법체류자들 소행일 수도 있을 것이나 어쨌든 반가웠다. 독일도, 뮌헨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확고한 물증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뮌헨은 베를린과 함부르크에 이어 독일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다. 독일인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도시라고 한다. 12세기 이래 바이에른 왕국의 주도로서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등의 여러 문화가 융합된 궁정문화의 보고다. 이자르(Isar) 강변의 아테네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개중에서도 세계 6대 미술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미술관 중 하나인 알테 피나코테크(Alte Pinakothek)는 놓칠 수 없다. 1836년에 문을 연 르네상스양식의 고건축물로 14-18세기 유럽회화를 중심으로 세계 각국의 미술품 약 7000점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루벤스 컬렉션으로 세계 최고라는데 독일화가로 자화상으로 유명한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의 컬렉션만 실컷 관람했다. 화풍이 익숙하지는 않았으나 나쁘지는 않았다. 맞은 편의 노이에 피나코테크(Neue Pinakothek), 피나코테크 데어 모데르네(Pinakothek der Moderne)는 기약할 수 없는 다음 기회나 가망이 없는 내세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뮌헨의 중심 마리엔 광장(Marien Platz)에 접어들자 수많은 관광객들이 일제히 오직 한 지점을 올려다보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뮌헨시 신 시청사(Neues Rathaus)에 내걸린 춤추는 인형시계 글로켄슈필(Glockenspiel)의 공연을 보려는 것이다. 인형들은 빙글빙글 돌아가며 통 만드는 사람의 춤과 기사의 마상 시합 등의 모습을 재연한다. 매일 오전 11시에 10분간, 5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 여름철에는 정오 12시와 오후 5시에도 글로켄쇼필의 공연을 볼 수 있다.
호프브로이하우스는 술집이 아니라 흑역사의 고발자
신 시청사(Neues Rathaus)는 얼핏 관공서처럼 보이지 않는다. 겉모습은 수백 년이 더 된 박물관처럼 고색창연하고 웅장한 고딕건축물이다. 하지만 완공한 지 100년이 좀 더 되었을 뿐이다. 1867∼1909년에 건축하면서 벽면의 곳곳에 천사와 사람들 조각을 장식해놓았다. 청사 안팎을 돌아보며 조각마다 하나하나 다른 자세와 표정을 살피는 재미가 있다.
뮌헨의 신 시청사는 서울시 신청사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쓰나미 같이 공격적인 형상의 흉물이라는 악담까지 쏟아진 애물단지 서울시 신청사가 자연스레 겹쳐진다. 따뜻하고 중후한 질감의 석조건축물 외벽은 차갑고 무미건조하게 느껴지는 서울시 신청사 유리 외벽과 차원이 다르다. 뮌헨시와 서울시의 정치인, 공무원, 건축가의 철학과 품격의 차이만큼 일 것이다.
시청사 안쪽으로 들어가니 몹시 괴로워하는 인간상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민생고에 시달리는 시민들의 모습을 형상화해놓은 것처럼 느껴졌다. 공무원은 그 모습을 보고 한시도 시민의 고단한 삶을 잊지 말자는 의도가 읽힌다. 마리엔 광장 중앙에 우뚝 솟은 뮌헨시의 황금빛 마리아의 탑(Mariensaule)이 그 인간 조각 군상들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공무원의 행정을 감시하고 있다.
마리엔 광장 주변에 역사문화적 명소가 많다. 시청사 뒤편의 프라우엔키르헤(Frauenkirche) 성모교회는 양파 모양으로 솟은 청동 돔 때문에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독일인 출신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대주교를 지낸 곳으로 뮌헨의 랜드마크로 자리잡고 있다.
마리엔 광장에서 걸어서 5분 남짓 거리에는 세계 최대의 맥줏집 호프브로이 하우스( Hofbräuhaus am Platzl)가 있다. 지난 1980년대 어느 대학 앞마다 그런 이름의 호프집 한둘 씩은 반드시 있었으리라. 그래서 낯설지 않았다. 하우스 맥주를 곁들여 독일식 족발 학센(haxen)으로 점심을 먹었다. 애초 1589년 개장한 바이에른 왕실의 전용 양조장이었다. 그리고 훗날 왕실에서 운영하는 술집이었다. 이제는 뮌헨을 찾는 관광객들의 필수 탐방코스가 되었다.
지난날 그 근처에 살았다는 모차르트는 물론 레닌, 그리고 히틀러도 이 술집을 찾았다고 한다. 특히 1920년 아돌프 히틀러와 국가 사회주의 단체는 호프브로이하우스 3층에 있는 연회장(Festsaal)에서 첫 모임을 가졌다. 나치로 약칭되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azi Party)의 탄생비화가 여기서 시작된 셈이다.
나아가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한반도 분단, 친일파와 숭미파 발호의 비극이 어쩌면 이 맥줏집에서 시작된 셈이다. 그렇다면 호프브로이하우스는 그냥 일개 맥줏집이 아니라 세계 현대사를 바꾼 역사의 현장이다. 한국에서는 제대로 증언하거나 고발하지 못하고 있는 제 조국과 조상의 부끄럽고 뼈아픈 흑역사를 묵묵히 그러나 영원히 고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