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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읽은 한 여행기의 프롤로그에서 작가가 털어놓은 말은 이랬다. 여행을 떠나기 전 작가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다고. 다니던 직장엔 긴 휴가를 낸 상태였고, 결혼하지 않은 혈혈단신의 몸이기도 했다. 1년간의 여행, 딱 이것만이 그의 인생 앞에 놓여 있었다.

비행기에 오르며 그는 은근히 바랐다.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게 해줄 그 무엇이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기를.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미래엔 우연만이 가득하기를.

그는 1년이 지난 후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글을 썼다. 자신의 인생을 바꿔주지 못했던 그 1년간의 여행을 기록하기 위해.

나는 책을 읽으며 생각했었다. 과연 그는 정말 자신의 삶을 바꾸고 싶었던 게 맞을까. 그는 그를 다른 삶으로 이끌어줄 그 무엇을 진짜 만나지 못했던 걸까. 그저 그는 버리지 못했던 게 아닐까. 그가 남겨 놓고 온 모든 것들을. 그의 지난 인생을, 선택을, 판단을. 혹시, 그는 다른 세계로 날아가기엔 너무 무거운 과거를 지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을까. 우리처럼.

내 친구 역시 긴 유럽여행을 떠나기 전 내게 말했었다.

"내 삶에 무언가가 좀 벌어졌으면 좋겠어. 어떤 충격 같은 사건이. 그럼, 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야. 내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놀라지 마. 대신, 초대해줄게!"

여행 중 내 친구에게도 사건은 있었다. 그런데도 친구는 돌아왔다. 예약해 둔 비행기 표를 무를 수 없었다는 게 이유였다. 그리고 친구는 전화로 말했다.

"아무것도 없었던 인생인데. 이게 뭐라고 다시 돌아오고 말았네."

우연히 만난 포르트갈 여인, 그로 인해 시작된 새로운 삶

 <리스본행 야간열차> 영화 속 프라두 모습.
<리스본행 야간열차> 영화 속 프라두 모습. ⓒ 나이너스엔터테인먼트(주)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그레고리우스에게도 다른 삶을 살 기회가 한 번 주어진 적이 있었다. 중등학교를 졸업한 뒤 페르시아의 도시, 이스파한으로 가 공부를 할 열망에 들떴던 적이 그에게도 있었다. 그때 그레고리우스는 동양학자가 되려고 했다. 이스파한에 일자리를 알아놓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꿈을 포기했다. 동양의 사막에서 불어온다는 그 뜨거운 바람, 그 바람이 몰고 올 모래가 두려웠기 때문에.

이후 그레고리우스는 고전문헌학자가 되었다.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를 가르쳤다. 고지식하고 재미없는 이 선생은 아이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건조한 듯하면서 온화한, 실수를 모르는 완벽한 선생을 아이들은 존경했다. 학교 교장과 대학에도 그레고리우스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의 고전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그것을 내세우는 일 없는 그의 성품 때문이었다.

그레고리우스는 30년 이상 이 고등학교에서 일했다. 단 한 번 실수한 적도, 비난받을 일을 한 적도 없이. 그날도 지난 30년간의 아침과 다를 바 없는 아침이었다. 그는 우산을 쓰고 언제나처럼 8시 15분 전, 학교와 연결되는 키르헨펠트 다리로 들어섰다.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 중 그레고리우스가 포르투갈 여인을 만나던 순간.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 중 그레고리우스가 포르투갈 여인을 만나던 순간. ⓒ 나이너스엔터테인먼트(주)

그녀는 다리 난간에 팔꿈치를 대고 서 있었다. 비를 그대로 맞고 서 있었던 그녀의 얼굴에 분노의 감정이 스쳤다. 그러더니 쥐고 있던 종이를 구겨 다리 아래쪽으로 던져버렸다. 이후 그녀의 발이 신발에서 미끄러지던 그 순간, 그레고리우스는 우산을 놓쳤고 책가방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그녀가 그레고리우스를 발견했고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포르투갈에서 왔다고 했다. 그 날 이후 그레고리우스는 그녀를 다신 볼 수 없었다.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그레고리우스의 삶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 교실에 서서 언제나처럼 수업을 하려 했지만 그게 되질 않았다. 그레고리우스는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자신이 아이들의 미래에 얼마나 관심을 가졌던가. 그리고 이 아이들에게 남아있는 날들은 얼마나 많은가. 무수히 많은 일을 경험하게 될 아이들! 그런데 나는!

그레고리우스는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 시선을 던지고 천천히 교실에서 나왔다. 그의 삶을 지배하던 모든 것과 헤어지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본문 중에서

단 한 번도 일탈을 해보지 않았던 그레고리우스는 어색하게 거리를 배회하다 책방에 들어섰고 그곳에서 우연히 집은 책은 포르투갈어로 쓰여 있었다. 책방 주인이 그를 위해 번역해 준 글귀가 바로 위의 저 문장이었다.

'아마데우 이나시오 드 알메이다 프라두'라고 적혀 있는 책, <언어의 연금술사>의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 중 프라두의 책.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 중 프라두의 책. ⓒ 나이너스엔터테인먼트(주)

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형태와 색채와 멜로디를 주는 경험들은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본문 중에서

책의 저자는 마치 그레고리우스에게 말을 하는 것 같다. 그렇게 그레고리우스는 겹쳐진 두 번의 우연으로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싣게 된다. 그리고 책의 저자 프라두, 그레고리우스와는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았던 매력적인 포르투갈 귀족의 인생으로 빠져든다.

또 다른 가능성을 향한 여정

 <리스본행 야간열차> 표지사진.
<리스본행 야간열차> 표지사진. ⓒ 들녘
책은 전체적으로 그레고리우스가 프라두의 인생을 쫓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베일에 싸여 있던 자신을 알아가는 중이었다. 수많은 가능성 중 단 하나를 부여잡고 살아왔던 지난 삶에서 도망친 것. 아직 꽃피지 못한 다른 가능성을 향해 다시 한 번 손을 내미는 중이었다.

그렇게 5주간의 여행을 마치고 그레고리우스는 다시 본인의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미 그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는 알았다. 더는 이곳에 묶여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의 또 다른 가능성은 우연에 의해 이끌렸던 리스본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을 몇 년 전에 처음 읽었고 그 뒤로도 생각이 날 때면 다시 펴들었다. 나는 그레고리우스처럼 지금 이곳을 떠나 그 어떤 공간으로도 도망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책을 다시 읽을 때면 나는 잠시라도 지금 이 삶의 무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프라두의 정신은 의심과 고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그의 그 의심과 고민이 내게 삶을 가볍게 인식할 수 있는 지혜를 주었다.

내게 삶이 무겁게 여겨졌던 이유는 사실 단순했다. 내게 허락된 삶의 모습이 지금 이것 하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가야 할 길이 지금 내 앞에 놓여있는 이 길 하나라는 생각에 욕심이 생겼고 그 욕심이 실현되지 않을 것 같아 불안했다. 그래서 여유를 잃게 된 거였다. 여유를 잃은 삶은 세상 그 무엇보다도 무겁게만 여겨졌다. 하지만 프라두는 말했다. "우리 인생은 바람이 만들었다가 다음 바람이 쓸어갈 덧없는 모래알, 완전히 만들어지기도 전에 사라지는 헛된 형상"이라고.

나는 내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나갈 것이다. 삶은 언제든 다음 바람이 쓸어갈 덧없는 모래알이기 때문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 내가 하게 된 이 생각은 그레고리우스가 프라두를 이해하며 얻게 된 자각과도 같았다. 이 자각이 57년간 똑같기만 했던 그레고리우스의 삶을 또 다른 가능성의 세계로 이끌어 준 것이다.

우리를 다른 삶으로 이끌어 줄 환상 여행. 우리는 비행기 안에서 뿐만 아니라 매일 아침 거리를 나서면서도 이런 환상 여행을 꿈꾸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도 벗어나고 싶은 현실이, 이 무거운 현실이, 이게 뭐라고, 쉽게 버려지질 않는다. 그럴 땐 지금 이 현실을 집착할 필요가 없는 그 무엇, 수많은 가능성 중의 하나일 뿐인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그래서 가벼운 그 무엇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떠나기도 쉬울 테고, 또 머물러 있더라도 더 여유롭게 머물러 있을 수 있게 될 것이므로.

지난 2013년에 개봉했던 제레미 아이언스 주연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이 책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영화의 분위기와 내용은 책 못지 않게 지적이고 진지하고 매력적이다. 하지만 때로 어떤 책은 전체적인 줄거리로는 결코 그 책이 내포한 정신을 오롯이 드러내지 못하기도 한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이 책의 정신은 버릴 수 없는 모든 문장 하나, 하나에 새겨져 있다.

덧붙이는 글 | <리스본행 야간열차>(파스칼 메르시어/들녘/2014년 03월 25일/1만6천원)



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들녘(2014)


#리스본행 야간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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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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