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유산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장사지내고 온 딸 리종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품이 전달됐습니다. 아버지가 남긴 유품은 당신 평생, 12살(1936년 9월 28일) 때부터 87세(2010년 10월 29일)까지, 무려 74년에 걸쳐 쓴 일기였습니다.
날마다 꼬박꼬박 쓴 일기는 아니었습니다. 몇 년씩 건너뛴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느 일기와는 달리 아버지가 쓴 일기는 오로지 몸에 대해서만 쓴 아주 특별한 일기였습니다. 아직은 솜털이 보송보송한 사춘기 이전부터 죽음을 눈앞에 둔 노년까지 당신의 몸에 관한 일기(기록)는 그 자체가 생로병사의 여정입니다.
여자에게 바치길 원했던 <몸의 일기>
아버지는 당신 스스로 부르주아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파자마를 입은 채로 아침을 먹는다는 건 생각도 못했던 세대. 아버지는 반드시 샤워하고, 면도하고, 정장을 제대로 차려입고서야 나타날 정도였다고 합니다.
자신을 스스로 아주 엄격하게 자제하며 살아오신 아버지. 그런 분이니 자식들에게 당신의 몸을 보여준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생전의 아버지는 국제적 명성을 쌓은 석학이었습니다. 이미지에 걸맞게 과묵하고 냉소적이고 대쪽같이 곧은 분이었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남자가 아니면 경험하거나 관찰할 수 없는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자신의 몸으로 겪은 은밀한 비밀 같은 날을 몸의 일기로 기록합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동생 도도의 오줌 줄기가 멀리 나가지 않아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직접 고추 껍질을 까고 오줌 누는 것까지 시범 보이는 개구쟁이 소년이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13살 5개월 7일째 되던 날(1937년 3월 17일 수요일) 일기를 썼습니다. 당신 생에 있어 처음으로 경험한 몽정을 "살갗 위에서 말라버린 정액이 갈라진다. 그 모양이 꼭 운모 같다"고 기록했습니다.
자위는 '곡예의 단계'... 적나라한 기록자위행위를 할 때 아주 절묘한 순간이 있다. 난 그걸 곡예의 단계라 부른다. 사정하기 바로 전, 그러나 아직 사정을 하지는 않은 순간 말이다. 분출할 준비가 된 채 대기하고 있는 정액을 온 힘을 다해 억누르는 것이다.귀두의 끝이 빨개지고, 귀두 자체가 엄청나게 부풀어서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을 때, 음경을 손에서 놓아버린다. 음경이 떨리는 걸 내려다보면서 온 힘을 다해 정액을 붙들고 있다. 주먹을 꽉 쥐고,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고 있다 보면 내 몸도 함께 떨린다. 바로 이 순간이 곡예의 단계다. -<몸의 일기> 본문 100쪽 중에서성장한 아버지가 느낀 오르가슴은 숨넘어갈 듯한 짜릿함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때로는 상대방을 위해 느낀 '척'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아버지는 모나와 여섯 번 관계를 가진 날, 일기에 '행복한 피로감'이라고 썼습니다.
50세가 된 아버지는 이 일기를 공개해야 한다면 여자들에게 바치고 싶다고 합니다. 대신 당신도 여자들이 몸에 관해 쓴 일기를 보고 싶다고 합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아버지는 코에 용종이 생기고, 얼굴에 검버섯이 피어나고…. 몸은 젊어서 하는 하품과 나이를 먹어서 하는 하품을 달리 받아들입니다.
66세가 된 아버지는 '플라타너스 나뭇잎으로도 정액을 받았던 사춘기 시절을 회상'합니다. 하지만 몸은 어느새 망각과 건망증 그리고 이런저런 질병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10대부터 80대까지, 늙어가는 남자의 몸
나이가 86세 11개월 27일로 접어들던 2010년 10월 7일.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쓴 일기는 "마침내 리종에게 남기는 글을 마무리했다. 글을 쓰는 건 지치는 일이다. 만년필 무게가 천근만근이다. 글자 한 자 한 자가 등정이요, 단어는 산이다"입니다. 아버지는, 아버지 몸은 이렇게 늙어 갔습니다. 며칠 후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남자 몸과 발육에 관한 내용이 본문에 많습니다. 남자의 성에 관한 글도 아주 많습니다. 남성의 심리와 생리학·의학 등 전문적인 내용까지도 철철 넘쳐납니다. 어쩌면 아버지는 여자들에게 남자의 몸을 알려주고 싶어 당신의 몸을 그토록 꼼꼼하게 기록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버지가 딸에게 유품으로 전한 <몸의 일기>는 당신이 진짜로 궁금해한 여자 몸에 대한 반문입니다. 또한 남자 몸을 궁금해할지도 모른 모든 여자를 위한 답일지도 모릅니다.
소설일지언정 <몸의 일기>는 남자의 몸을 투영해 주며, 남자의 몸을 알려줍니다. 상상으로 더듬어 보는 남자 몸, <몸의 일기>로 만나는 아버지는 운모 조각 만큼이나 신비롭고 곡예의 순간만큼이나 짜릿합니다. 남자와 남자의 몸이 궁금한 사람들에게 좋은 해답이 될 것이라 기대됩니다.
덧붙이는 글 | <몸의 일기> (지은이 다니엘 페나크/ 옮긴이 조현실/ (주)문학과 지성사/ 2015.7.17./ 1만7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