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에서 놀라운 즐거움을 맛보게 되는 순간이 있다. 사람과의 만남에서, 우연히 켠 TV에서, 영화나 만화, 소설을 보다 그런 경험을 마주하게 되면 짜릿하게 퍼지는 만족감이 몸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모두 합쳐 250페이지가량 되는 짧은 소설 <프래니와 주이>도 내게 그런 경험을 선사해준 고마운 책으로 기억될 것이다.
<프래니와 주이>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책의 출판사 역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호밀밭의 파수꾼>부터 언급하는 게 옳은 순서일 것이다. 저자인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가 불멸의 작품이 된 <호밀밭의 파수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거니와 두 소설이 내용과 형식에서 상당한 유사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더라도 <호밀밭의 파수꾼>에 대한 설명을 <프래니와 주이>의 소개에 앞서 해야만 하겠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이어지는 <프래니와 주이>
퇴학 이후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48시간 동안을 주인공인 홀든 콜필드의 시점에서 그린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은 문학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필경 들어봤을 명작이다. 물질적 가치와 경쟁으로 가득한 세상에 반감을 느끼는 소년의 내면을 이 소설은 그야말로 거침없이 묘사해냈다. 서른두 살의 샐린저를 일약 세계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한 이 소설이 불러온 반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사춘기의 격렬한 열정과 사회에 대한 순수한 통찰로 세상에 저항하기 위해 가출을 결심한 소년, 홀든 콜필드. 가출 기간 사회의 온갖 위선을 마주한 그는 거침없는 욕설로 시대를 비판하고 저항하려 하지만 이내 욕설은 절규로 바뀌고 그는 조금씩 정상에서 비정상의 자리로 밀려나기 시작한다. 그런 그를 구원하는 건 여동생 피비. 홀든은 위선에 찬 세계에서 절망할 때면 항상 여동생과 호밀밭의 파수꾼을 떠올린다. 언젠가는 자신이 호밀밭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어 동생처럼 순수한 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지는 걸 막겠다고 다짐하곤 하는 것이다.
그에게 피비는 호밀밭의 파수꾼이나 다름없다. 위선적인 사회에도 물들지 않은 아름다운 아이, 그는 그 순수를 동경하고 그 순수는 그를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부여잡는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동생과 같이 순수한 아이들을 지키고 싶어 스스로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기를 꿈꾸는 소년의 성장기이며, 동시에 순수를 꿈꾸는 아이를 부적응자로 내모는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프래니와 주이>의 주제의식도 정확히 이와 맞닿아 있다. 좀처럼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미성숙한 개인이 소설의 주요한 소재이며 이를 해소하는 전기를 마련해주는 인물이 주인공의 형제라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몇 차례의 긴 대화가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독백으로 끌어가는 <호밀밭의 파수꾼>과 형식적 차이가 있으나 유사점이 더욱 커 샐린저의 작품임을 모르고 읽는다 해도 이내 그를 떠올릴 수 있을 정도다.
<프래니와 주이>는 1965년 이후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격리된 채 어떠한 작품도 발표하지 않아 은둔의 작가라고도 불리는 샐린저의 소설이다. 단편인 <프래니>와 중편 <주이>를 묶은 것으로 그의 다섯 편의 출간작 중 세 차례나 다룬 글래스 집안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샐린저의 소설 가운데선 <호밀밭의 파수꾼>만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나 작가의 무르익은 사상과 문장이 반영됐다는 점에서 <프래니와 주이>의 가치도 작지 않다고 평가받는다.
샐린저가 쓴 대부분의 소설이 그렇듯 <프래니와 주이>도 자전적인 내용에 바탕을 두고 있다. <호밀밭의 파수꾼>과 마찬가지로 어떤 방식으로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미숙한 인물이 주인공이며 그 주변엔 허위로 가득찬 기성세대가 있어 끊임없이 잔소리를 쏟아낸다. <프래니와 주이>의 경우엔 주인공이 20대로 설정되어 있지만, 이들의 삶이 비틀린 시점이 어린 시절이란 점에서 샐린저 특유의 문제의식이 고스란히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 부조리한 세상과 대면해 방황하는 소년의 내면이 <호밀밭의 파수꾼>의 중심이었듯 <프래니와 주이>의 주인공들 역시 어른들의 세상에 정착하지 못한 채 부유하고 있는 것이다.
프래니와 주이는 글래스 집안의 자식들로 소설은 이들 각각의 이야기를 각기 한 편으로 꾸리고 있다. 먼저 등장하는 단편 <프래니>는 글래스 집안의 막내딸 프래니가 주인공이다. 그녀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주연을 맡고 있는 미모의 여대생으로 글래스 집안의 다른 아이들처럼 철저한 교육 속에 길러진 매력적인 스무 살 여성이다. 소설은 프래니가 남자친구인 레인과 오랜만에 만나 점심식사를 하는 장면을 다루는데, 한 장소에서 웨이터 등을 제외한다면 두 명의 인물만 등장함에도 흥미진진한 대화를 통해 읽는 이의 관심을 사로잡는다는 점이 특징이다.
<주이>는 프래니의 오빠인 주이의 이야기로 <프래니>의 이야기가 펼쳐진 이후 시점을 배경으로 한다. 이 작품에선 프래니가 어째서 레인에게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했는지가 드러나며 글래스 집안사람들을 비틀리게 만든 요소들이 엄마와 주이, 프래니 등의 대화를 통해 암시되기도 한다. 요컨대 <주이>는 <프래니>와 한 짝인 소설로 <프래니>는 <주이>에 대한 인상적인 전채요리이며 <주이>는 <프래니>를 완성시키는 훌륭한 메인요리가 되는 것이다.
두 소설은 <프래니>에선 프래니와 레인, <주이>에선 엄마인 베시와 주이, 프래니 등 소수의 인물만이 등장함에도 풍부한 대화를 통해 이야기를 끊임없이 확장시킨다. 카페와 욕실, 방 안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제한된 수의 인물들이 극단적인 갈등을 표출하고 이내 봉합된다는 점에서(물론 상당수는 파국으로 흘러가기도 하지만), 마치 반세기 전에 서구에서 유행한 응접실 연극을 보는 듯도 하다.
한국에선 '특별한 이야기' 아니야특별한 교육을 받은 영재로 묘사되는 글래스 집안 아이들이 주요 화자로 등장하기에 자칫 따분하고 단조롭게 느껴질 수 있는 상황을 풍성한 소재와 재치있는 대사를 통해 풀어가고 있는데, 이것이 마치 샐린저 자신의 문화적 소양을 과시하기 위한 장치로 느껴질 정도다. 소설 속에선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등을 '고민 없이 생각나는 대로 그냥 쓴 뛰어난 작가들'이라 언급하는 대목도 등장하는데 이 책을 읽다 보면 샐린저가 그러한 점에서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생각까지도 든다.
아버지와 형의 지나치게 엄격한 교육방식은 물론 결코 소통하지 않고 강요만 해온 어머니에 대한 분노로 미쳐버리기 직전인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꼭 소설 속 특별한 경우만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자기가 원하는 삶의 방향을 선택하기도 전에 부모와 사회에 의해 치열한 트랙 위로 내몰려 전력으로 경주하고 있을 소년·소녀가 세계 어느 곳보다 많은 게 우리의 현실이 아니던가. 나 역시 소설을 읽으며 공감한 부분이 적지 않았다. 아마도 십 년 전이라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인내심이 바닥나 어느덧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는 주이와 프래니의 모습이 그랬고 강요하지 않으려 해도 어느새 강요하고 있는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도 그러했다.
당혹스러운 건 60여 년 전에 쓰인 이 소설이 영재교육을 받은 특별한 이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에도 한국 사회에선 결코 일부의 이야기처럼 여겨지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이들의 고민과 고통, 절망과 절규는 이미 우리 가운데 상당수가 경험했고 경험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루에 두세 개씩 학원에 다니고 밤늦게 집에 돌아와서는 다시 새벽같이 학교로 나가는 아이들이 정상처럼 여겨지는 한국사회에서, 프래니와 주이의 이야기는 샐린저가 의도한 것처럼 특별하게 읽히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오래전 샐린저가 경고한 세상을 이미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호밀밭을 지키는 단 한 명의 파수꾼도 만나지 못한 채 세상의 온갖 순수한 것들이 절벽으로 밀려 떨어지는, 그런 세상을 말이다.
아래는 인상적인 대목들.
"어쩌다 한 번이라도, 정말 어쩌다 단 한 번이라도, 지식은 지혜로 이어져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혐오스러운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는, 좀 겉치레로라도 정중한 조그마한 암시라도 있었다면, 내가 그렇게까지 우울해지지 않았을 거라 생각해. 그런데 그런 암시가 전혀 없었어! 원래 지혜가 지식의 목표여야 한다는 것을 대학에서 귀띔으로라도 일러주는 일이 없었다니까. '지혜'라는 말 자체가 언급되는 걸 거의 듣지 못했어! 재밌는 얘기 하나 해줄까? 정말 재밌는 얘기 듣고 싶어? 거의 사 년이나 대학을 다니는 동안, 이건 절대적인 사실이야, 거의 사 년의 대학생활 동안 내 기억에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것을 들은 것은 유일하게 1학년 정치학 시간에서였어! 그런데 그 표현이 어떻게 사용됐는지 알아? 주식시장에서 한재산 모은 후 워싱턴으로 가서 루스벨트 대통령의 자문이 되었다는 어느 훌륭하고 멍청하신 원로 정치인 이야기를 하면서였어. 정말이야! 대학 사 년 동안 기껏! 이런 일이 누구에게나 일어난다는 말은 아니지만, 이 생각을 하면 나는 너무 화가 나서 죽을 것만 같아" -186, 187p처음엔 단편적으로, 그러다가 아예 똑바로, 그는 창문 아래 다섯 층 밑 길 건너에서, 한 장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작가도, 연출자도, 제작자도 끼어들지 않고 펼쳐지고 있는 연기였다. 꽤 큰 단풍나무 한 그루가-이 거리에서 운이 좋은 쪽에 있는 네댓 그루 중 하나였다-여자 사립 고등학교 앞에 서 있었는데, 그 순간 일고여덟 살 정도의 여자아이 하나가 그 나무 뒤에 숨고 있었다. 아이는 짙은 파란색 리퍼 재킷에 빵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모자는 반 고흐의 <아를의 방>에 있던 침대 위 담요와 아주 흡사한 빨간색이었다. 아이의 빵모자는 사실 주이의 위치에서는 물감을 한 번 톡 칠해놓은 것처럼 보였다. 아이로부터 4~5미터 떨어진 곳에 아이의 개가, 줄이 달린 초록색 개목걸이를 한 어린 닥스훈트 한 마리가 아이를 찾기 위해 킁킁 원을 그리며 정신없이 맴돌고 있었고, 개줄이 그 뒤에서 질질 끌리고 있었다. 헤어짐의 괴로움은 개에게 거의 견딜 수 없는 것이었기에 마침내 주인 아이의 냄새를 맡게 되었을 때에는 아주 긴 시간이 흐른 것만 같았다. 다시 만난 기쁨은 둘 모두에게 아주 큰 것이었다. 닥스훈트는 작게 짖으며, 희열로 춤을 추듯 앞으로 몸을 움찔거렸고, 아이는 마침내 무언가 개에게 큰소리로 외치며 나무를 두르고 있는 철사 울타리를 서둘러 넘어가 개를 안아 올렸다. 아이는 그들만의 은어로 몇 마디 개를 칭찬한 후 개를 내려놓고 줄을 잡았으며, 둘은 즐겁게 서쪽으로 피프스 애비뉴와 센트럴파크를 향해 걸어가며 주이의 시선에서 벗어났다. 주이는 창문을 열고 밖으로 몸을 내밀어 둘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라도 있는 것처럼, 창유리 사이 가로대에 반사적으로 손을 올렸다. 그런데 그 손엔 시가가 쥐여 있었고 주저하는 사이 시간이 흘러가고 말았다. 그는 시가를 한 모금 빨았다. "젠장." 그가 말했다. "세상엔 좋은 것들도 있어, 진짜 좋은 것들 말이야. 우리 모두 바보 멍청이들이라 딴 길로 새버리지만. 늘, 늘, 늘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우리의 형편없고 별 볼 일 없는 에고로 끌어당기면서." -192, 193p 덧붙이는 글 | <프래니와 주이>(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지음 /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15.08. / 1만3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