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청소년 특별면 <너, 아니?>에 실렸습니다. <너, 아니?>는 청소년의 글을 가감없이 싣습니다. [편집자말]
 마인 강이 흐르는 프랑크푸르트
마인 강이 흐르는 프랑크푸르트 ⓒ 임하영

결국,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한 이후 나는 일어나지 못했다. 기침과 콧물, 그리고 몸살까지 삼중고가 겹쳐 온종일 오들오들 떨며 이불을 덮고 침대 위에서 지냈다. 당연히 계획했던 모든 것들을 포기해야 했다. 괴테 하우스를 비롯한 수많은 박물관과 미술관, 그리고 유럽중앙은행에 방문하는 일은 모두 그림의 떡이 되어버렸다.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는,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었다. 여행 중에 건강을 제대로 챙기지 않은 이유도 있을 테고, 무엇보다 한국에서 체력적으로 좀 준비를 해놓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벌써 몸에 탈이 난 듯했다.

페펙의 삼촌이 제약회사에 다니시는 덕분에 한국에서 가져온 약과 더불어 프랑스 약, 독일 약 등 다양한 의약품을 몸속에 투입했다. 하지만 몸 상태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머리는 찌르는 듯이 아팠고, 열이 펄펄 끓기 시작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이러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은 아닌지 불길한 생각도 머리를 스쳤다.

그래도 나에겐 욕심이 있었다. '그래, 그러면 조금 더 쉬자'라는 생각과 '안 돼,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라는 생각이 마음 한쪽에서 끊임없는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누구의 손을 들어주어야 할까 고민하다 적당한 타협점을 찾았다. 그 내용은 두 가지다. 1번,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동안 푹 쉬고 나 혼자는 절대 나가지 않는다. 2번, 그렇지만 가족 다 같이 나가는 경우이거나 누군가 혹시 같이 나갈 테냐고 물어보면 같이 간다.

아니나 다를까 침대에 종일 누워있으면, 그중 몇 번은 누군가 와서 '우리가 지금 나가는데, 혹시 같이 갈 의향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면 무조건 "Yes"라고 대답한 후 아픈 몸을 일으켜 함께 집을 나섰다. 항상 나가고 나서 후회했다. 그렇지만 지나고 보면 잘한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미리 계획을 세워놓은 일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프랑크푸르트 시내에 있는 어느 단독주택의 방 천장 무늬뿐만 아니라 그 도시 자체에 대한 인상을 머릿속에 남기고자 열심히 노력했다.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보고 들으면서 느낀 몇 가지를 글로 옮겨본다.

파리에 익숙해져 있던 나, '아차' 싶었다

 마인 강변에서 보내는 한가로운 주말
마인 강변에서 보내는 한가로운 주말 ⓒ 임하영

하나, 독일 사람들은 프랑크푸르트를 그냥 프랑크푸르트라 부르지 않고 꼭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Frankfurt am Main)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옛날 동독 지역 오데르 강 언저리에 또 다른 프랑크푸르트(Frankfurt, Oder)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프랑크푸르트란 프랑크족이 건너온 여울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독일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프랑크푸르트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거대한 고층빌딩에 수많은 금융기관이 밀집해있는, 명실상부한 은행과 상업, 그리고 운송의 중심지이지만, 도시 자체가 그리 예쁘지 않고, 번잡스럽고 각박해서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단다. 심지어 '추하다(ugly)'라는 표현까지 쓰는 사람도 있었는데, 서울에서 태어난 나에게는 다 그리 와 닿지 않는 말이었다. 서울의 번잡함과 각박함을 따라올 만한 도시는 아마 세상에 별로 없을 듯하다.

둘, 파리에서 막 건너온 나에게, 사실 독일인의 사고방식은 조금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특히 교통신호에 관한 것이 그랬다. 사실 파리에서는 사람들이 신호를 잘 지키지 않는다. 보행자들이 더 그렇다. 그렇기에 파리에서 신호를 지키는 사람을 보면 관광객이거나 독일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파리에 얼마나 있었다고, 나도 금세 이런 무질서에 익숙해지고 말았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맞은 첫째 날, 나는 마인 강을 건너 어느 조그만 거리에 이르렀고, 빨간불임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적으로 건널목을 건넜다.

조금의 자기변호를 덧붙이자면 거리는 한산했고, 횡단보도의 길이는 1.5미터 정도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양옆으로 다가오는 차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이 별로 없었음에도 등 뒤로 무언가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차'했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뒤였다. 그 직후 똑같은 건널목에 어떤 인도인 아저씨가 등장했다. 그 아저씨도 나처럼 별생각이 없음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그때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후 벌어진 일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 그 이후로 내가 신호를 잘 지키는 '모범 어린이'가 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셋, 그런데도 프랑크푸르트는 참 활기차고 매력적인 도시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도시 '그 자체의 풍경'에서 오는 감동은 다른 도시들보다 덜할지도 모르지만 나름 깨끗하고, 우아하고, 기품있는 도시임에는 분명하다. 다음에는 프랑크푸르트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로스차일드 가문에 대해 더 많은 공부를 하고 돌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이렇게 며칠에 걸쳐 휴식을 취한 끝에도 나의 몸 상태는 별로 진전되지 않았고, 걱정은 산더미처럼 커져만 갔다. 이제 다음 도시인 하이델베르크로 떠나야 하는 때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페펙의 숙모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더 머물러도 된다고 하셨지만, 이대로 한 번 풀어지면 꽤 오랜 시간 동안 주저앉게 될 것 같아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하이델베르크행 버스를 예약했다.

지난 며칠간 나를 돌봐주고 챙겨주고 걱정해주신, 나보다 먼저 프랑크푸르트를 떠나실 예정이었던 페펙의 숙모님이 마지막으로 나를 꼭 안아주셨다. 항상 건강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신다.

"네 그동안 정말 감사드려요. 그리고 아픈 모습만 보여드려서 죄송해요."

이렇게 프랑크푸르트에서의 마지막 밤이 흘러갔다.


#여행#프랑크푸르트#마인강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