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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하게 웃고 있는 북인도 코사니 마을 아이들
환하게 웃고 있는 북인도 코사니 마을 아이들 ⓒ 송성영

누군가 내게 미소를 지은 채 다가오면 그날은 종일 기분이 좋다. 북인도 코사니의 산책길은 사람을 만나는 길이기도 했다. 전혀 낯선 사람들과 미소를 주고 받는 길이었다. 1시간이 넘는 거리의 산책길에서 돌아오는 길목에서 학교에 가는 아이들을 만나게 된다. 그 아이들이 내게 보내는 미소는 불면증으로 시달렸던 전날 밤의 악몽을 잊게 해주는 묘약이었다.

낯선 세계로 떠나는 여행자들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다양한 성품을 내보인다. 어떤 이는 자신의 것을 빼앗기거나 잃어버릴까 봐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이들은 자신이 가진 돈을 펑펑 써가며 허세를 부리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을 무장 해제 하고 미소 띤 얼굴로 낯선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가진 것이 별로 없는 가난한 여행자인 나로서는 선택할 여지 없이 낯선 사람을 만나면 미소를 보낸다. 내가 미소를 보내면 열에 아홉은 미소로 화답했다.

맏언니 쫓아가다 울음 터뜨리는 아이, 여동생이 생각났다

 저만큼이나 어린 동생 손을 꼬옥 잡고 학교에 가는 아이
저만큼이나 어린 동생 손을 꼬옥 잡고 학교에 가는 아이 ⓒ 송성영

 학교에 가는 4남매 아직 학교에 갈 나이가 안된 어린 동생이 뒤따라 가고 있다.
학교에 가는 4남매 아직 학교에 갈 나이가 안된 어린 동생이 뒤따라 가고 있다. ⓒ 송성영

등굣길에서 내게 환하게 웃어주는 아이들을 만났다. 어린 동생의 손을 꼬옥 잡고 언덕길을 오르는 아이가 자신에게 미소를 보내는 낯선 이방인을 슬쩍 쳐다보다가 부끄러운 웃음을 보내준다. 녀석들의 등굣길을 따라가고 싶었는데 아이들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녀석들에게 겁을 주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따라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저만치 언덕길을 오르는 것을 바라본다.

이번에는 네 남매를 만났다. 녀석들도 언덕을 오르고 있다. 그 중 맏언니 쯤 돼 보이는 아이가 오빠와 언니들에 뒤 쳐져 따라오던 네댓 살 먹은 어린 여동생에게 뭐라 뭐라고 내가 알 수 없는 언어로 나무란다. 이제 그만 따라 오고 집으로 돌아가라 하는 것 같다.

맏언니의 걸음이 빨라지고 어린 동생은 점점 뒤처진다. 언니 오빠들이 저만치 언덕길 위로 사라져 가자 어린 아이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울음을 터뜨린다. 울음 소리는 점점 더 커진다. 잠시 후 맏언니가 언덕에서 내려와 어린 동생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타이른다. 아이는 맏언니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울음을 그치고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간다.

훌쩍거리며 집으로 향하는 아이를 보다가 문득 아주 오래 전 기억 속의 어린 여동생이 떠올랐다. 엄니는 내게 '국민학교'에 갓 입학한 여동생 손을 꼬옥 잡고 가라고 했지만, 난 오히려 그 어린 여동생을 구박했다. 누나들이 성냥개비를 올려놓곤 했던 유난히 길었던 속눈썹, 그 큰 눈을 꿈뻑거리며 빨간 '나이롱' 잠바 주머니에 두 손을 꼭 질러놓고, 불안하게 뒤따라오던 상고 머리 여동생이었다.

 언니 오빠 학교 길을 따라 나섰다가 결국 훌쩍이며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 내 어린시절 어린 여동생이기도 했다.
언니 오빠 학교 길을 따라 나섰다가 결국 훌쩍이며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 내 어린시절 어린 여동생이기도 했다. ⓒ 송성영

신작로조차 들어오지 않았던 그 시절, 낯선 세계로 향하는 두려운 발걸음으로 작은 오빠의 구박까지 받아가며 오솔길 저만치 뒤쳐져 따라오던 어린 여동생의 두근거리는 가슴이 아프게 전해져 온다. 북인도 코사니 마을 아이들의 등굣길은 내 어린 시절의 등굣길이었고 저 어린 여자 아이는 나의 여동생이기도 했다.

저만치 불안하게 뒤따라오던 어린 여동생의 모습에 시간은 멈췄지만, 그 여동생의 나이는 어느새 50대 중반으로 다가오고 있다. 수염 허연, 50대 중반의 중년 사내 눈에 눈물이 고인다. 착한 모든 것은 아프다. 슬프다. 아름답다. 아플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것을 떠올리면 가슴저려오고 바보처럼 눈물이 나는 걸 어찌하랴.

오랜 과거는 저 북인도 히말라야 만년설처럼 멈춰 있다. 시공간을 초월해 어린 여동생이 저만치 뒤 따라 올 것만 같다. 그 어린 여동생의 손을 꼬옥 잡아 주고 싶지만 뒤돌아보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40여 년의 세월이 있을 뿐이다.

젊은 엄마가 어린 남매를 데리고 길을 재촉한다. 내가 다가가 '나마스테' 인사를 하자 환한 웃음으로 화답한다.

"학교에 갑니까? 사진 찍어도 될까요?"
"……."

 엄마와 함께 학교에 가는 남매
엄마와 함께 학교에 가는 남매 ⓒ 송성영

 엄마는 교문도 없는 작은 학교에 들어서는 남매를 지켜 보고 있다.
엄마는 교문도 없는 작은 학교에 들어서는 남매를 지켜 보고 있다. ⓒ 송성영

젊은 엄마는 내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가던 길을 멈춰 서서 환하게 웃어준다. 어린 딸아이는 이제 갓 입학한 모양이다. 엄마가 딸아이의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고 있다. 코사니 마을에서는 갓 입학한 자식들을 학교 앞 까지 따라 나서는 부모를 종종 볼 수 있다. 엄마는 아이들이 교문도 없는 작은 학교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 뒷모습을 지켜본다.

두 칸의 교실이 전부인 작은 학교다. 그마저 한 칸은 복도나 다름없다. 교실이라 할 수 있는 한 칸은 열댓 명의 고학년 아이들이, 복도 교실에서는 다섯 명의 저학년들이 수업 준비를 하고 있다. 교실에는 책상도 걸상도 없다. 선생님의 책걸상이 전부다.

낡고 오래된 학교 입구에는 내가 알 수 없는 힌두어와 '1954' 라는 아라비아 숫자가 보인다. 아마 이 학교의 설립연도인 듯싶다. 올드 코사니 초등학교의 선생님은 단 한 분, 학교의 역사에 대해 간단하게 물어보려 했는데 교실 두 군데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수업 준비를 하는 바람에 차마 말을 걸 수 없어 사진 찍는 것만 허락을 맡았다. 뉴 코사니에는 우리나라 교육 체제로 말하자면 초등, 중등, 고등 과정의 번듯한 학교가 세 곳이나 있다. 아마 이곳 올드 코사니의 학교는 뉴 코사니가 생기기 이전부터 있었던 학교인 듯했다.

북인도 코사니에서 가장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책걸상도 없는 교실 바닥에 엎드려 공부하고 있지만 녀석들은 사진기 앞에서 환하게 웃는다. 종종 길에서 만났던 아이들도 보인다. 녀석들이 나를 알아보고 까르르 웃어가며 손짓을 한다.

"나마스테, 나마스테."
"나마스테!"

녀석들에게 건넸던 나마스테 인사말이 메아리로 돌아온다.

"고맙다. 고맙다."

 전교생이 20여명도 채 안돼는 올드코사니 '초등학교'
전교생이 20여명도 채 안돼는 올드코사니 '초등학교' ⓒ 송성영

 복도에서 공부하는 저학년 아이들
복도에서 공부하는 저학년 아이들 ⓒ 송성영

 복도 교실을 포함해 두 개의 교실이 전부. 책걸상도 없이 공부하고 있는 가난한 아이들이었지만 세상 모든 아이들처럼 웃음많고 장난끼 가득한 아이들이었다.
복도 교실을 포함해 두 개의 교실이 전부. 책걸상도 없이 공부하고 있는 가난한 아이들이었지만 세상 모든 아이들처럼 웃음많고 장난끼 가득한 아이들이었다. ⓒ 송성영

나는 녀석들의 환한 웃음에 거듭 거듭 고맙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나는 한국에서 저만 한 아이들과 함께 공부한 적이 있었다. 글쓰기 교실에서 나와 함께 공부한 아이들은 대부분 바닷가에 사는 가난한 집 아이들이었다.

낯선 이방인의 등장으로 교실이 떠들썩해지자 선생님이 회초리로 교탁을 탁탁 두드렸다. 아이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입을 다물고 제자리에 앉는다. 내가 만난 한국의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천방지축, 웃고 떠들고 장난치다가 학교 선생님의 엄한 회초리에 얼음땡 놀이를 하는 것처럼 금세 조용해지곤 했다.

어른들이 자신들이 일궈 놓은 부조리한 사회의 틀에 궤를 맞추기 위해 아이들의 웃음을 제어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언제든지 웃을 준비가 되어 있다. 아이들의 웃음을 빼앗아가는 것은 열악한 교육 환경이 아니라 어른들의 교육 방식인 것이다.

한국에서 아이들과 글쓰기 수업을 할 때 녀석들은 매 수업마다 떠들고 돌아다니기까지 했다. 내 수업 시간만큼이라도 자유로운 시간 맘껏 누려라, 위안을 가졌지만 한편으론 제대로 공부를 못하고 버릇까지 나빠지면 어쩌나 걱정도 했다. 하지만 그 걱정은 원래 생각대로 기우였다.

"바바지!" "노노, 엉클!"

 학교에서 돌아와 저녁답 동네 공터에서 노는 아이들
학교에서 돌아와 저녁답 동네 공터에서 노는 아이들 ⓒ 송성영

마지막 수업이 있었던 날이었다. 몇몇 말썽꾸러기 녀석들이 내게 편지를 썼는데, '말 안 듣고 떠들고 쌤 무시하고 돌아다닌 것을 혼내지 않아 감사하다'는 것이었다. 괴발개발로 글쓰기 했던 평소와는 달리 녀석들은 아주 반듯한 글씨로 또박또박 편지를 썼다. 녀석들은 알고 있었다. 다른 수업과 달리 글쓰기 수업을 함부로 했다는 것을. 녀석들은 입버릇처럼 수업 시간 내내 글쓰기 싫다고 했지만 이미 그 자유로운 시간을 누리며 자유로운 글쓰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른들이 억압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자성할 줄 알고 스스로를 일으킬 힘이 있다는 것을 내게 일깨워 주었다.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나서 나는 녀석들에게 '고맙다. 고맙다. 화내서 미안하다, 미안하다' 그 말만 되풀이 할 수밖에 없었다.

북인도 올드 코사니의 작은 학교를 나서면서 저 가난한 아이들에게 희망은 무엇일까. 떠올리다가 그만둔다. 인류 역사가 부르짖고 있는 '부질 없는 희망' 따위는 접어 두기로 했다. 어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삶의 방식으로 '아이들은 미래의 희망'이라는 그럴듯한 표어를 내걸고 아이들을 억압하곤 한다.

부조리한 세상을 누리고 사는 어른들이 말하는 희망은 아이들의 희망이 아니라 자신들이 정해놓은 희망일 뿐이다. 아이들에게는 본래 희망이나 절망이라는 단어조차 없다. 희망과 절망은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나는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삶의 답을 찾지 못할 때,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들의 자유로운 영혼을 껴안고 그 답을 찾곤 한다. 아이들의 자유로운 영혼은 내 오래된 영혼이다. 잃어버린 나의 자유로운 영혼이다.

숙소로 돌아와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나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내린다. 천둥번개까지 치고 우박이 떨어진다. 한 여름 날씨가 갑자기 써늘한 가을 날씨가 되었다. 한두 시간 퍼부어대던 비가 그쳤다. 맑은 가을 하늘이다.

늦은 오후 간디 아쉬람에 머물고 있는 가텀씨와 함께 코사니 상가에서 얼쩡거리다가 빵 한 줄과 토마토 1킬로그램을 사들고 숙소로 돌아오는데 갑자기 잠자리만 한 하루살이 떼들이 바글바글하게 날아다닌다. 저 하루살이 떼의 날갯짓으로 또 다른 하루가 죽음처럼 사라져 가고 있다.

숙소 앞 공터에서 아이들이 이리저리 뛰어 다니며 신나게 놀고 있다. 여자 아이들과 남자 아이들이 따로 따로 놀고 있는 것 같은데 가만 보니 함께 놀이를 하고 있다. 아이들과 뛰어 놀고 싶지만 어떤 놀이인지 알 수가 없어 주변을 서성거리며 사진만 부지런히 찍어댔다. 아이들이 놀이에 지쳐 갈 무렵 숙소로 돌아오는데 늘 그래왔듯이 앞 집 아이가 나를 보더니 그 자그마한 고사리 손으로 합장을 하며 내게 말한다.

"바바지!"
"노,노, 엉클!"

 나와 마주칠 때마다 '바바지'라 부르며 공손히 합장하는 숙소 앞집 아이
나와 마주칠 때마다 '바바지'라 부르며 공손히 합장하는 숙소 앞집 아이 ⓒ 송성영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얼굴이 화끈화끈 달라 올라 '아저씨'라 부르라 말한다. 인도어로 '바바지'는 사두, 스승을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인도의 수행자들처럼 긴 수염에 봉두난발한 내 겉모습을 보고 그렇게 부르는 듯했지만 내겐 너무나 과분한 호칭이었다.

가텀씨가 그 말뜻을 알려줄 때까지 나는 '바바지'가 뭔 뜻인지 전혀 몰랐다. 그냥 흰 수염 기른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줄 알았다(이곳에서 할아버지는 '부부'라 부른다고 한다). 녀석에게 늙은 할아버지가 아니라고 해명할 수도 없어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합장을 하며 '나마스테' 인사말로 빙그레 웃어주기만 했었다. 나는 참 무식하고 무심했다. 수행자들에 관심을 갖고 한 달 넘도록 인도를 떠돌아다니면서 '바바지'라는 그 쉬운 단어의 뜻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바바지'를 할아버지로 알아왔던 것처럼 대충 꿰맞춰 잘못 알고 내뱉거나 들었던 단어들이 또 얼마나 많을까 싶었다. 그 무지함으로 이곳 코사니에서 사귄 가텀씨나 부럼 선생에게 또 얼마나 많은 동문서답의 대화를 했을까. 하지만 그 동문서답으로 누군가에게 웃음을 줄 수 있었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싶다.

나는 숙소의 앞 집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고 하질 않던가. 거지 행색의 낯선 이방인에게 '바바지'라 불러주고 있는 너의 그 마음자리야 말로 '바바지'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 아이와 함께 내 불면증을 달래주는 웃음을 선사하는 모든 아이들에게 '바바지'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 어떤 듣기 좋은 말 한마디 없이 웃음 하나로 나의 아픔을 치유해 주는 스승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 머릿속에서 지어낸 관념에 불과한 말이었다. 그날 밤 오랜 시간 정전이 지속되면서 반딧불이 한 마리가 숙소 창문 틈으로 날아 들어와 아이들의 자유로운 영혼처럼 반짝 반짝 춤을 추었다.

○ 편집ㅣ조혜지 기자



#북인도 코사니#코사니 아이들 등굣길#아이들의 미소#바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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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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