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부상 사흘째, 민박집에서 챙겨준 아침을 먹고 나서 마지막 남은 약을 먹고 있는데 비노트씨가 의사를 데리고 왔다. 그는 내 무릎 관절을 굽혔다 폈다 해가며 무릎 부위를 이리 저리 뒤틀어 본다. 그리고는 힌두어가 뒤섞인 영어로 장황하게 설명한다. 그 말을 다 알아 들을 수 없었지만 대충 정리해 보면 이랬다.
"정밀검사를 해봐야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무릎 인대가 심하게 파열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방치하면 나중에 고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팡이를 짚고 걸어도 상관없겠죠?""당분간 베란다를 왔다 갔다 할 정도는 괜찮습니다."그는 무릎 관절을 심하게 움직이지 말라고 경고하더니 조만간 걷는데 큰 지장이 없을 것 같다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진료비를 얼마나 줘야 하냐고 물었더니 처방약과 함께 받겠다고 한다. 비노트씨를 통해 약과 함께 보낸 계산서를 보니 진료비로 100루피를 청구했다.
점심 무렵에 가텀씨가 숙소로 찾아왔다. 의사가 다녀갔다고 말하자 가텀씨는 진료비를 얼마나 줬냐고 묻는다. 100루피를 줬다고 했더니 가진 놈들은 모든 걸 돈으로 환산한다며 줄 필요가 없었다고 말한다.
"여기까지 와 준 것만 해도 고맙죠.""여행 기간이 아직 많이 남았는데, 돈을 아껴 써요."그가 화제를 바꿔 키득키득 웃어가며 농담조로 술 한 잔 하자고 하길래 얼마든지 좋다고 말해줬더니 손을 내젓는다. 그는 늘 유쾌하다. 그는 내게 형님이었고 친구였고 선생이었다. 코사니에 머물면서 그와 함께 거의 매일 같이 오후 산책을 했다. 그 덕분에 그는 내 엉터리 영어를 가장 잘 알아듣는다.
그와 함께 웃고 떠들다보니 무릎 통증조차 사라지는 듯 했다. 그는 내가 밤마다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더니 통증에 아주 좋다는 약초를 꺼내며 말했다.
"그럴 줄 알고 내가 당신 주려고 약초를 구해 왔소. 잠자기 전에 복용해 보시오." 그날 밤 나는 부작용이 생기면 어쩌나 다소 불안한 마음으로 그 약초를 복용했다. 하지만 그가 말한 대로 불면증이나 통증 없이 간만에 까무룩 잠들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약초의 부작용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무겁기만 했던 몸조차 개운했다. 무릎을 굽혔다 폈다 할 때를 제외하고는 크게 통증을 느낄 수 없었다.
딱히 약초 때문만은 아닐 것이었다. 통증에 효과가 좋은 그 약초와 함께 평소 복용하지 않던 소염제, 진통제 등의 양약을 삼시세끼마다 꾸준히 복용한 것과 비노트씨의 정성어린 찜질 덕을 톡톡히 본 것이었다.
어제 보다 한결 가벼운 몸으로 베란다로 나섰다. 지팡이를 짚고 베란다 주변을 걸었다. 월세방 계약 기간이 나흘 남았다. 최소한 절룩거리면서라도 걸을 수 있도록 몸을 다스려 놓아야 한다. 코사니에서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다. 한 군데 오래 머물러 있으면 몸이 늘어져 주저앉고 싶어진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몸과 마음의 병을 더 키울 수 있다. 고통스럽게 지팡이에 의지해서라도 코사니를 떠나야 한다.
무릎 부상 나흘째, 몸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다. 가텀씨와 함께 지팡이를 짚고 산책길을 나섰다. 어린 소년이 저만치서 굴렁쇠를 굴리며 다가온다. 녀석은 나를 알고 있다는 듯 배시시 눈인사를 한다. 녀석이 잠시 멈춰서 평소와는 달리 절룩거리는 나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쳐다본다. 녀석의 어께를 가볍게 툭 치며 장난을 걸고 있는 나를 가텀씨가 말했다.
"생각보다 무릎 회복이 빠르네요.""코사니에 와서 매일 걸었던 것이 큰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그래도 조심하세요."30여분 정도 걷다보니 왼쪽 다리가 저려오고 지팡이를 짚은 오른쪽 팔에 통증이 몰려와 산책길을 되돌아 왔다. 탄두리 치킨을 시켜 먹은 길거리 움막 점포의 사내에게 다시 오마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없었던 것이 못내 아쉬웠다.
움막 점포까지는 너무 먼 거리다. 1시간 이상을 걸어야 한다. 늘 웃고 있는 그 사내와 작별 인사도 못하고 떠나야 할 것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매일 아침 산책길에서 마주쳤던 등굣길 아이들과 아스팔트 노동자들 또한 더 이상 만날 수 없다. 민박집 근처로 되돌아 올 무렵 가텀씨에게 부탁했다.
"일정대로 내일 모레 송별회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부럼선생에게 전해주세요." "부럼씨네 집에 가려면 언덕길을 올라야 하는데 괜찮겠소?""이틀 정도 지나면 지금보다 걷기가 수월 할 것 같습니다."가텀씨는 다리가 불편하니 요기식당에서 송별회를 하자고 한다. 하지만 나는 부럼선생 부인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코사니를 떠나기 전에 나를 가족처럼 대해 줬던 부럼 선생네 가족을 만나고 싶었다.
다음날은 좀 더 시간을 늘려 걸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도 걸었다. 하루가 다르게 무릎과 더불어 몸 상태가 좋아지고 있음을 실감했다. 예정대로 코사니를 떠나기로 단단히 굳힌 마음작용도 한몫 했을 것이었다. 코사니를 떠날 날을 이틀 앞두고 산 중턱에 자리한 부럼선생네 집으로 향했다.
평소 같았으면 성큼 성큼 거침없이 올랐던 언덕길이 고난의 길처럼 다가왔다. 숨이 차오르고 무릎은 힘에 부쳤다. 하지만 큰 탈 없이 부럼 선생네 집에 도착했다. 부럼선생 부인인 래카라인과 함께 락시미 아쉬람에서 공부하고 있는 독일인 여학생 래샤와 폴란드 여학생들이 푸짐한 상차림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쉽게도 민박집 비노트씨와 코사니 상가의 철물점 부럼씨가 빠져 있었다.
코사니에서 좋은 인연을 맺은 여덟 사람이 모였다. 다들 래카 라인이 요리한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가텀씨가 키득키득 익살스럽게 웃어가며 술병을 꺼냈다.
"송! 오늘 당신을 위한 자리인데 우리만 술을 마셔야겠네요." "나도 한 잔 주세요.""약 때문에 술은 무리일 텐데요.""한 잔 정도는 상관없습니다."가텀씨는 내개 술 한 잔을 따라 주면서 헤어지는 마당에 한 마디 하라고 했다. 나는 '코사니에서 당신들을 만나 너무나 행복했다. 당신들을 만난 것은 내게 큰 축복이었다. 당신들의 친절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인사말을 했고 가텀씨와 부럼씨는 나를 잊지 못할 것이라며 다음에 꼭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송, 당신을 떠올릴 때 마다 탄트라 치킨을 기억하겠소."가텀씨가 나의 엉터리 영어 수준을 놀려대자 모두가 박장대소 했다. 일전에 내가 탄두리 치킨을 탄트라 치킨이라 발음했던 것이 잊혀지지 않는 모양이다. 힌두교에서 파생되어 나온 요가 수행법 중에 하나인 탄트라(Tantra)는 불교에서 밀교로 전해져 오고 있다. 그 탄트라에 치킨을 붙여 말했으니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채식을 하다가 그 탄트라 키친을 먹는 바람에 무릎을 다친 것 같습니다. 탄트라 키친은 나의 카르마였습니다."
내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모두가 웃었다. 그렇게 내가 30여 일 코사니에서 머무는 동안 함께 공유했던 재밌는 기억들을 더듬어 가며 밤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다. 영어를 제대로 알아듣거나 말하지 못하는 나였기에 그동안 이들이 나를 어떤 인격체로 여겼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리바리한 나를 위해 송별회 자리를 마련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일이었다. 코사니에서 밤 9시면 늦은 시간이다. 모두가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데 부럼 선생이 내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불편한 다리로 밤길을 걷는 것은 위험합니다. 우리 집에서 자고 가세요.""비노트씨가 걱정할 것입니다.""송, 당신의 엄마한데 전화가 올 때가 됐는데..."가텀씨가 농담조로 말하는 순간 때맞춰 부럼선생의 전화기에서 벨이 울렸다. 가텀씨가 키득키득 웃어가며 전화를 받고 있는 부럼씨에게 물었다.
"송의 엄마?""맞습니다."코사니에서 머물면서 주말마다 부럼 선생네 집에서 식사하고 밤늦게 까지 술잔을 기우리곤 했는데 그때마다 민박집 비노트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었다. 코사니 산길은 표범이 출몰하는 지역이기 때문에 밤길 조심하라는 전화였다.
우리는 그때 마다 비노트가 아들 걱정하듯 나를 꼬박꼬박 챙기는 엄마라고 놀려댔다. 비노트씨는 엄마처럼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무릎 치료에 열과 성을 대해 주었던 그는 부럼선생네 집으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설 때도 지팡이에 의지해 조심스럽게 걸으라며 내게 몇 번이고 당부했다.
부럼선생이 비노트씨가 나와 통화하고 싶어 한다며 손전화기를 건네 줬다. 그는 나에게 몸 상태가 어떠냐고 묻더니 밤길에 몸이 상할 수도 있으니 부럼 선생네 집에서 자고 오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
부럼선생은 부부가 사용하는 안방을 내주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부럼 선생이 보이지 않았다. 이른 아침부터 목욕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욕실에서 머리에 남은 물기를 털며 나온 그가 방으로 들어가 명상에 잠긴다. 그의 하루는 명상과 함께 시작 한다는 것이었다.
민박집으로 돌아와 비노트씨에게 한 달 동안 잘 지내고 덕분에 무릎이 좋아졌다는 인사와 함께 방세를 지불했다. 그는 내 몸 상태로 문시아리로 떠난다는 것은 무리라며 며칠 더 묵었다 가라고 한다.
"더 이상 방세를 받지 않겠습니다. 며칠 더 머물다가 출발하세요. 그 몸으로 문시아리 가는 것은 무리입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나는 내일 떠날 것입니다."본래 나는 이곳 북인도 코사니에서 20일 정도 머무르고자 했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월세방을 얻는 바람에 한 달 이상을 머물게 됐던 것이다. 그 덕분에 좋은 인연들을 만날 수 있었다. 비록 무릎을 다쳤지만 그 좋은 인연들에 푹 빠져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지냈다.
하지만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기 마련이듯 그 안락한 시간 속에서 내면 깊숙이 잠들어 있던 아내에 대한 분노가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코사니의 안락함을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그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아내에 대한 분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기도 했다. 인도로 온 이유 중에 하나가 그러했듯이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낯선 곳에 내 몸과 마음을 던져 놓다 보면 그 분노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숙소 베란다를 오락가락하다가 나무 그늘 아래에 놓여진 의자에 앉았다. 나무 가지에 산비둘기 한 쌍이 나란히 앉아 있다. 방안으로 들어가 사진기를 꺼내왔다. 처음에는 거리를 두고 떨어져 앉아 있던 녀석들이 내가 바라보거나 말거나 조금씩 거리를 좁혀 서로 몸을 부벼 대며 애정을 과시했다. 하지만 나무 가지를 박차고 날아갈 때는 서로 다른 길을 간다.
날아가는 비둘기를 보다가 문득 아내가 떠올랐다. 우리는 저 비둘기처럼 서로 몸을 부벼대며 행복한 시절을 보낸 적이 있었던가. 우리 부부에게도 행복한 시절이 있었다. 어느 날 그녀가 점심밥을 차려줄 생각도 하지 않고 풀꽃 앞에 쪼그려 앉아 자신의 전공인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
처형이 세상을 떠났을 무렵 흰 매화꽃 떨어지는 모습이 눈물 같다고 했을 때 가슴이 아팠다. 덩달아 눈물이 나왔다. 그렇게 살고지고 싶었다. 밥 한 끼 굶어가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일 하면서 행복과 불행을 함께 나눠가며 살고지고 싶었다. 그게 부부지간으로 살아가는 내 소박한 꿈이었다. 하지만 그 소박한 꿈은 그녀가 원했던 좋은 집으로 이사하고부터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생활방식이 바뀌면서 틈만 나면 다투고 서로 미워하고 증오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자식들에게 시선을 고정시켜 살아가면서 그것이 행복이라 여겼다. 하지만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을 때는 서로 다른 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집으로 이사하고 부터 그녀는 자신이 바라보는 시선에 맞춰 살아가고자 요구 했다. 나는 각자가 바라보는 시선을 인정하며 살자고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생활하기 위해서는 내가 변해야 했다. 내가 살아온 삶의 방식을 바꿔 그녀의 삶의 방식에 맞춰야 했다.
이혼을 요구해 오는 그녀에게 내 삶의 방식을 바꾸겠노라 했지만 그녀는 믿지 않았다. 당신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이 맞았다. 그녀의 마음자리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내 마음자리 역시 변하지 않았다.
그녀의 삶의 방식에 맞춰 살고자 안간힘을 썼지만 몸과 마음이 따라 주질 않았다. 뱀은 허물을 벗어도 뱀이 듯이 마음의 허물을 벗지 못하면 단지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것에 불과했다. 지렁이처럼 느린 삶을 살아온 내가 잠자리처럼 빠르게 날아다니는 그녀에게 맞춰 산다는 것은 고통이었다. 그 고통에는 출구가 없었다. 거기서 벗어나려면 그녀와 갈라 설 수밖에 없다.
자식들 또한 부모가 서로 미워해가며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길이 없는 행복을 고집한다면 불행의 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저 산비둘기들처럼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 또한 날아갈 때는 좌우 두 개의 날개를 펼쳐야 한다. 두 날개 중에 어느 한쪽이 날개로 치우치게 되면 추락하게 된다.
두 날개를 활짝 펴 서로 다른 길로 날아가는 산비둘기를 보면서 내가 가야할 길이 더욱더 확연하게 다가왔다. 아내의 말이 맞았다. 나는 변하지 않았다. 여태까지 걸어왔던 길, 적게 벌어 적게 먹고 살아가는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사람을 살리고 자연을 살리는 길이라 여겼던 그 길은 나의 운명과도 같은 길이었다. 아내에게 조차 버림받은 얼치기 진보주의자라 손가락질 당해도 그 길은 내가 가야할 길이었다.
아프리카 속담에 "빨리 가고 싶으면 혼자서 가라, 멀리가고 싶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다. 나는 세상의 아픔을 등지고 혼자서 빨리 가고 싶지 않다.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느리게 가고 싶다. 집 없는 거지처럼 이 집 저 집 처마 밑 신세를 져가며 떠돌아다닐망정 더 이상 서로 미워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 집 없는 거지처럼 이 집 저 집 처마 밑 신세를 져가며 떠돌아다닐망정 더 이상 서로 미워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
코사니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비노트씨의 가족들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눴다. 배낭을 챙겨 숙소를 나서는데 길 건너 집 아이가 늘 그랬듯이 '바바지'라 부르며 내게 두 손 모아 인사를 한다. 어께에 걸쳐 멘 붉은 천 가방을 뒤적거려 어젯밤 부럼 선생네 남매에게 나눠주고 남은 염주를 아이에게 건네주자 방긋 웃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무거운 배낭이 무릎을 심하게 압박해 왔다. 맨 몸으로 걸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절음발이 걸음으로 코사니 상가에 도착하자마자 락시미 아쉬람의 부럼선생과 이름이 똑같은 철물점 부럼씨를 찾아갔다. 이제 마악 점포 문을 열었다는 부럼씨가 짜이를 내놓는다. 그는 내 다리를 지그시 쳐다보며 괜찮냐고 묻는다. 걸을 만하다고 대답했더니 근심어린 눈빛으로 조심하라고 말한다.
배낭을 내려놓고 철물점 길 건너편에 있는 상점에서 비디 담배 두 보루를 사서 부럼씨에게 건넸다. 부럼씨의 철물점은 우리들의 아지트였다. 오후가 되면 이곳에서 가텀씨와 락시미 아쉬람 학교의 부럼선생을 만나 철물점 부럼씨에게 비디 담배와 짜이를 얻어 마시며 환담을 나누곤 했다.
문시아리로 떠나는 버스 출발 시간을 30여 분 남겨두고 가텀씨가 간디아쉬람의 매니저와 함께 나를 배웅하러 나왔고 곧바로 락시미 아쉬람의 부럼 선생이 찾아 왔다.
"오늘 수업이 없습니까?""오전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몇 장의 기념사진을 찍고 버스를 기다렸다. 하지만 도착 예정 시간이 30분이나 지났는데도 버스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내내 나와 함께 버스를 기다려 주고 있는 이들에게 미안해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정작 세 사람 모두 여유만만이다. 가텀씨가 인도 버스는 시간을 잘 지키지 않는다며 말했다.
"걱정입니다. 송, 당신은 힌두어도 못하고 거기다가 영어조차 형편없고, 또 다리까지 불편한 몸으로 어딜 가겠다고..." "하늘에 맡기겠습니다.""나 또한 신이 당신을 돌봐 줄 것이라 믿소만..."예정시간 보다 1시간이나 늦은 오전 9시쯤에 문시아리로 향하는 버스가 들어섰다.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인 만원 버스에 올라타는 내게 어려운 일 있으면 꼭 전화하라고 가텀씨가 재차 다짐을 놓는다. 나는 걱정 말라며 당신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 영원히 잊지 않겠다노라 말해놓고 만원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가 출발했다. 내내 손을 흔들고 있는 이들을 보다가 코끝이 찡해졌다.
만나면 헤어지기 마련이다. 코사니에 처음 도착했을 때처럼 이제 다시 나는 혼자가 되었다. 병색 짙은 내 얼굴은 퉁퉁 부어올라 있고 다리는 절름발이가 되었지만 마음 하나 만큼은 충전되어 있었다.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 보다는 히말라야 설산이 손에 잡힐 듯 눈앞에 펼쳐져 있다는 문시아리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했다. 뿌리 깊게 박혀 있는 분노로 고통 받고 있는 나를 치유해줄 무엇인가가 저 변치 않는 만년설, 히말라야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을 것만 같았다.
덧붙이는 글 | 인도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가텀씨와 전화통화를 했다. 그는 목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했다. 그의 목 상태는 몇 마디의 대화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그리고 몇 개월 후, 페이스 북을 통해 락시미 아쉬람에서 공부하고 있는 독일인 여학생 래샤로부터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다. 늘 유쾌한 농담을 던지며 내 엉터리 영어를 끝까지 귀 기우려 줬던 미스터 가텀. 북인도 코사니에서 생활할 때까지만 해도 그가 후두암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인도를 떠올리면 맨 먼저 그가 떠오른다. 그는 어리바리한 나의 든든한 형님이었고, 친구였고 선생이었다. 낯선 인도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 준 안내자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