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인도 문시아리로 향하는 소형 버스는 만원이었다. 승객들이 발디딜 틈 없이 꽉 차있다. 20명 정원에 30여 명이 타고 있는 듯했다. 겨우 비집고 들어간 두 발조차 움직일 수가 없다. 어딘가에 의지해 몸의 중심을 잡아야 하는데 손잡이도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등에 짊어진 묵직한 배낭을 운전석 옆, 엔진 부위에 겨우 걸쳐 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버스가 고불고불한 산길을 꺾어 돌아갈 때마다 몸이 좌우로 기울어진다. 염치불구하고 나를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에게 몸을 떠맡긴다. 버스 안 사람들의 시선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병색 짙은 낯선 이방인에 쏠려있다. 가능한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뻐쩡다리로 서서 중심을 잡다보니 다친 무릎이 씨근거려 온다.
버스는 산골짜기 곳곳을 돌며 멈춰 섰다가 출발하기를 반복한다.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보다 올라 타는 사람들이 더 많다. 숨이 막힐 정도다. 그동안 인도에 와서 여러 차례 시골 장거리 버스를 이용했는데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코사니에서 부터 30여 분을 달려온 버스가 한국으로 치자면 면소재지라 할 수 있는 가릇(Garur)이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승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여기 저기 빈 좌석이 보였다. 무릎 통증을 감싸 안고 약삭빠르게 빈 좌석을 찾아 앉았다. 긴 한 숨을 내쉬면서 비로소 나는 코사니에 머물면서 이곳 가룻에 와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아저씨가 집을 나왔다고요? 왜요?" 인도 학생의 질문
버스는 가룻에 잠시 머물러 빈 좌석을 채우고 다시 문시아리를 향해 출발한다. 가룻의 중심가에서 빠져나오자 저만치 작은 강줄기가 보이고 멀리 힌두교 사원의 돌탑들이 보인다. 가룻에는 16세기에 지어진 알모라의 난다데비 왕실사원보다 오래된 12세기에 지어진 베지낫(Baijnath) 사원이 있다. 시바 신을 모시고 있는 이 사원에는 탑들이 줄지어 서 있다. 탑 앞에 서 있으면 마치 외계인들의 소형 우주선이 저런 모양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낯설게 다가온다.
힌두교에서 사원은 신들의 거주지이자 신과 인간, 차안과 피안이 만나는 곳으로 여기고 있다. 사원에 세운 탑들은 우주의 중심축이라 일컫는 신비스런 산 메루(Meru)를 상징하고 있다. 그렇다면 차장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베지낫 사원은 우주의 중심인 것이다. 하지만 우주의 중심이 어디 저 베지낫 사원뿐이겠는가. 지구 곳곳에 우주의 중심을 상징하는 수많은 사원들이 존재하고 있듯이 내가 서 있는 어디든지 우주의 중심이 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지금 또 다른 우주의 중심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곳, 인터넷 한글 검색에서조차 찾아보기 힘든 '문시아리'라는 낯선 우주의 또 다른 중심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내 옆자리에는 가룻에서 올라탄 네 살 정도 돼 보이는 어린 손자를 품에 안고 있는 노인이 앉아 있었다. 노인은 내가 인사를 하자 방긋 웃는다. 사진을 찍어도 상관없냐며 사진기를 내밀자 다시 빙그레 웃는다.
하지만 어린 손자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다. 버스가 출발한 지 불과 10분도 채 안 됐는데 눈빛이 풀려가고 있다. 차멀미 때문에 줄곧 차창 밖에 고개를 내밀고 있다. 노인은 그런 어린 손자를 근심어린 눈빛으로 다독여 준다. 마치 늙은 새의 날개 죽지에 파묻혀 비를 피하고 있는 새끼 새처럼 애잔하게 다가온다.
인도 사람들, 특히 산악지대 사람들은 중에 버스 멀미를 심하게 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코사니에 머물면서 면소재지로 가끔씩 버스를 이용했는데 그때마다 차창을 열고 심하게 구토하는 사람들을 여럿 봤다.
아무래도 두 다리로 걷는 것이 일상인 사람들에게 평소 이용하지 않는 자동차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인도 현지인들, 특히 가난한 서민들을 만나기 위해 다 낡아빠진 장거리 시골 버스를 이용하고 있다. 율동이 심한 시골 버스를 멀미없이 버티고 있는 것을 보면 꽤 독종인 셈이다.
할아버지의 품에 안겨 힘든 시간을 보내는 어린 손자처럼 차장 밖으로 보이는 산골 농부들 역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5월 중순의 북인도는 한창 보리나 밀을 수확하는 시기인 모양이다. 산비탈 다랑이 밭에서 아낙네들은 밀이나 보리를 수확하고 있고 남정네들은 그 수확물을 나귀로 실어 나르고 있다. 곡식을 수확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아낙네들인데 한국에서처럼 낫으로 밑둥을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알곡만 베어 내고 있다.
제법 규모가 큰 바겟워(baqeshwar)이라는 곳에서 노인과 손자가 내렸다. 차장 사이로 손을 흔들어 주자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까닥하며 손을 흔들어 준다. 버스 안에서 내내 고통스런 표정이었던 어린 손자 또한 살포시 웃는다. 버스에 내려 두 다리를 땅에 짚게 되니 살 만한 모양이다.
바겟워에서 버스가 출발할 무렵 내가 앉아 있는 통로 건너편 옆 좌석에 열 예닙곱 쯤 돼 보이는 남학생이 앉아 있다. 머리에 기름까지 발라넘긴 녀석이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어느 나라 사람이냐' '어디로 가고 있냐'는 둥 나와 비슷한 수준의 기본 영어회화로 말을 걸어온다. 내가 한국 사람이라고 했더니 녀석이 자신의 손전화기를 보여준다. 한국 제품의 손전화기다. 녀석과 다른 제품의 내 손전화기를 보니 오전 10시가 다 되어 가고 있다.
"학생이냐?""그렇습니다.""그럼 너는 지금 학교에 있을 시간이 아니냐?" "노 프라블럼!"녀석은 무엇이 문제가 없다는 것이지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힌두어를 섞어 말했다. 녀석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영특해 보인다. 짐작건대 녀석은 학교 수업을 빼먹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학교 수업을 빼먹고 홀로 어디론가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자기만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학교 공부하고는 달리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분명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제품의 손전화기를 통해 인도 가수가 부르는 랩 음악을 듣고 있는 녀석을 보면서 우리 집 큰 아이가 떠올랐다. 기숙사 생활하는 대안학교를 다니던 녀석이 무단가출을 한 적이 있다. 기숙사 생활에 숨이 막혔던 녀석은 무단가출을 하여 자신이 어렸을 때 살던 시골 마을을 둘러보고 개발로 사라져 버린 집터에서 펑펑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더듬어 시를 써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
녀석의 가출로 인해 부모 자격으로 학교에 불러간 나는 선생들에게 녀석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녀석에게는 '다음에 무단가출을 하고 싶으면 아버지에게 용돈을 달라고 해라, 그런 가출이라면 얼마든지 상관없다'라고 말해줬다.
생각해 보면 인도에 온 나 역시 녀석처럼 무단가출을 하고 있었다. 분노심 가득한 나로부터 벗어나 내 안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참나를 만나기 위해 무단가출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처럼 무단가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인도 학생에게 장난스럽게 물었다.
"나는 가출을 했다. 너도 가출한 거냐?" "아저씨가 집을 나왔다고요? 왜요?""내 자신이 싫어서...""왜요?""내 안에 분노가 많거든...""무엇 때문에요?"나를 스스럼 없이 '엉클'이라고 부르는 녀석이 내가 묻는 대답에는 답하지 않고 되려 나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어왔다. 나는 녀석의 물음에 아내와 이혼을 앞두고 화가 많이 쌓여 있다고 말하려다가 그만 두고 차장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버스가 멈춰 섰다. 버스 앞으로 결혼식 행렬이 늘어서 있다. 버스가 정차해 있거나 말거나 한 무리의 사람들이 화사하게 결혼 예복을 차려입은 신랑 신부를 에둘러 싸고 신나는 밴드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버스 기사도 승객들도 태연하게 지켜보고 있다. 그렇게 아무런 불만불평 없이 10여분을 멈춰서 있던 버스가 다시 움직였다.
바켓워를 벗어난 버스는 나사를 풀어 나가듯이 나선형의 고불고불한 도로를 타고 높다란 산을 향해 달린다. 한참을 달리던 버스가 다시 멈춰 섰다. 좁다란 도로 한복판에서 오토바이가 버스를 멈춰 세운 것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온 청년이 버스에 올라온다. 뭔가 놓고 내린 물건을 찾는다. 청년이 찾는 물건은 버스 안에 그대로 있다. 자물쇠가 달려 있는 내 배낭이 부끄럽다.
높다란 산을 올라탄 버스가 지명을 알 수 없는 작은 마을 앞에서 몇몇 사람들을 내려주고 몸짓과 눈빛이 건들리는 20대 중반의 청년 하나를 태웠다. 공교롭게도 내 옆자리에 철푸덕 앉은 청년이 내게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는다. 나보다 영어가 한수 아래인 청년에게 문시아리에 간다고 했더니 자신이 문시아리에 대해 잘 안다며 자신의 보스가 문시아리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마리화나 얘기를 넌지시 꺼낸다.
"당신이 원한다면 마리화나나 코카인을 구해줄 수 있습니다.""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나는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딴전을 부렸다. 그는 씹는 담배를 오물거리다가 차장 밖으로 침을 퉤퉤 뱉어가며 내게 짧은 영어와 힌두어를 섞어 끊임없이 문시아리 라는 단어가 들어간 얘기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나는 그가 문시아리에 산다는 것인지 목적지가 문시아리라는 것인지조차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시골 읍내에서 건들거리는 논두렁 건달인 모양이었다. 외국인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좌석에 길게 누운 자세로 온갖 폼을 다 잡아가며 통하지도 않는 말을 걸어오면서 그 중간 중간에 어디론가 끊임없이 전화질을 한다. 참으로 귀찮은 녀석이다. 전화 통화를 하면서도 느닷없이 시비를 걸어올 것만 같은 불량기 어린 표정으로 나를 향해 묘한 웃음을 흘린다.
만약 여행길에서 누군가 시비를 걸면 태권도로 해치우라며 농담처럼 말했던 가텀씨가 떠올랐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 나는 표 나지 않게 무릎을 폈다가 굽혔다가 해가며 몸을 풀었다. 무릎을 움직일 때마다 욱신거렸다. 비좁은 버스 안에서 뻐정다리로 서서 왔던 것이 후유증으로 몰려온 것이다. 오늘 아침에 진통제를 먹지 않아서 그런지 고통이 더 크게 몰려오는 것 같았다.
고불고불한 산악지대를 두어 시간 내내 쉬지 않고 달려온 버스가 작은 마을 앞에 멈춰 섰다. 랩 음악을 듣던 학생이 일어선다. 문시아리에 가려면 여기서부터 두 번째로 정차하는 '탈'이라는 곳에서 내려 다른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며 친절하게 알려준다. 학생과 함께 온갖 건방을 다 떨던 논두렁 건달도 뒤따라 내린다. 녀석과 문시아리까지 동행하게 될까봐 난감했었는데 홀가분하다.
무단가출한 것인지 아니면 오늘이 개교기념일이라서 학교를 가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는 학생이었지만 녀석이 차장 밖에서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작별 인사를 한다. 불과 몇 초 사이에 홀가분함과 아쉬움이 교차한다. 논두렁 건달이 일어섰을 때는 홀가분했는데 무단가출 학생과의 이별은 아쉽다. 녀석과 나 사이에는 우주 어딘가에서 다시 만날 확률은 거의 없다. 죽음과도 같은 영원한 작별인사다.
사실 논두렁 건달에 대한 두려움은 내가 지어낸 허상에 불과했다. 논두렁 건달 역시 내게 아무런 해코지를 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내게 허세를 부렸을 뿐이다. 그는 내가 여전히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불안한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허상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알고 있는 '문시아리'라는 곳에 대한 정보는 코사니에서 만난 인연들로부터 들었던, 외국인은 물론이고 인도 현지인에게 조차 잘 알려지지 않는 관광지라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말도 잘 통하지 않았던 논두렁 건달을 만나고부터 관광지라는 말을 다시 떠올렸다. '관광지라서 험악한 곳이 아닐까. 국경과 가까운 곳이기에 마약이나 마리화나 상인들이 판치는 곳은 아닐까'라는 별의 별 상상을 다했던 것이다.
"당신은 아주 행운아입니다"
학생과 논두렁 건달은 제 갈 길로 떠나고 버스는 다시 한 시간쯤 더 달려 작은 간이식당 앞에 멈춰 섰다. 오후 1시간 다 되어 가고 있다. 다들 버스에서 내려 길가에서 오줌을 눈다. 나도 산비탈에 기대 볼일을 보았다. 여자들은 어떻게 해결 하나 싶다. 점심으로 먹으려 했던 바나나 두 개가 그새 흐물흐물 녹아 버렸다. 식빵도 챙겨 왔는데 먹고 싶지 않다.
점포를 겸하고 있는 간이식당에서 운전기사를 비롯한 승객 몇몇이 식사를 하고 있다. 나는 시원한 물과 함께 감자칩 두 봉다리를 샀다. 감자 칩 한 봉다리를 앞자리에서 내내 칭얼거리는 어린 아이에게 건네주었는데 맨숭맨숭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녀석의 엄마가 웃음 섞인 힌두어로 아이를 달래며 감자 칩을 손에 쥐어 주자 녀석의 목소리가 점차 밝아진다. 잠시 후 녀석의 감자칩 먹는 아작 아작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온다.
다시 출발한 버스는 아슬아슬한 벼랑길을 내달린다. 인도 시골 버스를 이용하면서 매번 느끼는 것인데 곡선 길을 돌 때 마다 엄청난 소음이 난다. 브레이크 밟는 소리다. 커브 길을 돌 때마다 브레이크 마모가 엄청 날 것 같다. 며칠 전 북인도 가즈왈 근처에서 이런 길을 달리던 버스가 벼랑으로 굴러 떨어져 수십 명이 죽거나 다친 대형 사고가 있었다. 그 버스의 사고 원인은 브레이크 파열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며칠 전 있었던 버스 사고를 떠올리게 할 만큼 버스는 불안한 소리를 내가며 끊임없이 다가오는 곡선 길을 급하게 꺾어 달린다. 거기다가 드문드문 산불이 번지고 있었다. 하지만 불을 끄는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도로 근처까지 번지고 있는 산불은 버스가 십여 분을 달릴 때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멀리 언덕 위에 연기가 자욱하고 버스는 산에서 굴러 내려온 바위 돌을 피해 불길을 스치듯 달리고 있었지만 운전기사는 물론이고 버스 안의 사람들은 늘상의 일처럼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곡선 길을 돌 때마다 버스 안에서 종소리가 난다. 문득 힌두 사원에 들어가지 전, 신에게 신고를 하기 위해 흔들어 대는 종이 떠올랐다. 버스는 운전기사 머리맡에 매달아 놓은 종을 흔들어 가며 곡선 길을 내달린다. 신의 영역으로 들어서듯 요란한 종소리를 내며 달리던 버스가 높다란 산언덕을 내려서자 강줄기 사이로 들어서 있는 작은 도시가 나왔다. 차장에게 물었더니 '탈'이라고 한다. 손전화기 시계를 보니 2시 50분. 코사니에서부터 이곳 탈까지 버스로 6시간 정도 달려온 것이다.
버스가 탈에 도착하자마자 문시아리 가는 버스를 어디서 타냐고 버스 차장에게 다시 물었더니 바로 앞차라고 한다. 앞차는 금방 출발할 기세다. 급하게 배낭을 챙겨 앞차 승객들에게 물었더니 문시아리 가는 버스가 아니라고 한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대며 버스 정류장에서 서성거리는 터번을 쓴 사람에게 물었다.
"문시아리 가는 버스는 언제 오나요?""택시를 이용하세요. 문시아리 가는 버스를 타려면 한 시간 이상 기다려야 합니다."나는 그가 택시를 이용하도록 유도하는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들 역시 택시를 이용하라고 말한다. 표정들이 거짓말을 할 사람들처럼 보이지 않는다. 택시는 큰 부담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기사에게 물었다.
"문시아리까지 얼마입니까?""150루피요."탈에서부터 한 시간 거리에 있다는 문시아리 까지 150루피면 큰 부담이 되질 않는다. 택시는 곧장 출발할 것이라고 한다. 나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허둥댄 탓에 탈에서 사진 한 장 찍지 못하고 택시에 올라탔다. 이미 앞좌석이 다 채워져 있어 무릎 통증과는 상관없이 짐칸을 비집고 들어가 쪼그려 앉았다. 짐 칸에는 이미 히틀러 콧수염의 중년 사내가 짐짝처럼 실려 있었다. 인도의 택시는 한국의 택시와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인도의 택시, 특히 산악지대의 택시는 중간 중간에 내리고 타는 지프 형태의 승합차다. 짐칸에 이르기까지 승객을 가득 태우고 달린다.
택시는 내가 올라타고 5분도 채 안 돼 출발했다. 택시가 탈을 벗어나 강줄기를 따라 달리기 시작할 무렵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강변도로에 대나무 낚싯대를 어깨에 걸쳐 메고 한 손으로는 물고기를 꾸러미에 꿰어 들고 가는 소년이 지나간다. 아마 강 낚시를 한 모양이다.
비는 그리 많이 내리지 않았다. 택시기사는 20대 중반의 젊은 청년이다. 깎아지른 벼랑길을 따라 고불고불한 높은 산 고개를 얼마나 지나쳤는지도 모를 정도로 고개고개 너머 달린다. 중간 중간에 지난 겨울 눈이 녹아내리면서 허물어졌을 도로를 정비하는 모습도 보인다.
중간에 히틀러 수염의 중년 사내와 더불어 몇몇 사람이 하차해 앞자리로 옮겨 앉았다. 고산지대로 올라갈수록 구불구불한 산 아래 도로가 까마득히 내려다 보이고 그 주변으로 다랭이 밭들이 삼삼하게 들어서 있다. 입이 쩍쩍 벌어지는 풍경에 반해 사진기를 꺼내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얼마나 올라왔을까 깎아지른 벼랑길 타고 한참을 달리는데 갑자기 택시가 멈춰 선다. 절벽 길 앞에서 독수리 떼들이 도로를 점거하고 뭔가를 부지런히 뜯어먹는데 정신이 팔려 있다. 택시 기사가 경고음을 몇 차례 울렸는데도 좀처럼 달아날 생각을 않는다. 내가 운전기사에게 잠시 사진을 찍고 가겠노라고 부탁을 하는 순간 녀석들이 날아가 버린다. 활짝 펼친 날개의 길이가 엄청나다. 3미터 가까이 돼 보인다.
문시아리는 오후 다섯 시가 다 되어 도착했다. 탈에서부터 한 시간 거리가 아니라 두 시간 거리였다. 코사니에서 출발한 지 여덟 시간 만이다. 그 꼬불꼬불한 비좁은 산길을 안전하게 달려온 젊은 택시기사가 고마워 밥 한 끼 덜 먹을 심정으로 50루피를 얹어 줬더니 아주 고마워한다.
해발 2290미터, 문시아리에 발을 딛고 보니 택시 안에서 사진기에 담아 놓았던 풍경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저만치 깎아지른 산비탈 아래로 다랑이 논밭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고 머리맡에 히말라야 절경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었던 것이다. 코사니에서 감탄했던 히말라야 설산과 마주했던 것과는 또 다른 낯선 세계였다. 그 숨막히는 절경들이 하루 종일 감자칩 한 봉다리에 두 개의 바나나로 때운 허기와 장시간을 버텨온 무릎 통증마저 까마득히 잊게 해주었다.
문시아리는 '논두렁 건달'을 만나면서 걱정했던 관광지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거리에 외국인 관광객이라 짐작되는 사람들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관광지라 여길 만한 건물들은 몇몇 게스트 하우스들이 전부다. 주변을 돌아보기 전에 먼저 숙소부터 잡았다. 택시기사가 내려준 부근에 자리한 '반데로디'라는 게스트하우스에서 가장 싼 방을 구했다.
다른 방보다 2배 이상 값싼 방이었기에 회벽이 빵껍질처럼 부풀어 있었고 침대에 깔아놓은 담요에서 벼룩들이 득실거릴 것만 같은 낡고 허름한 방이었다. 하지만 문 밖 베란다에서는 물론이고 화장실의 창문에서 조차 히말라야 설산이 보였다. 대충 짐을 정리하고 나서 절룩거리는 다리를 끌고 밖으로 나서는데 게스트 하우스 매니저가 말했다.
"당신은 행운아입니다. 며칠 동안 날이 흐려서 히말라야가 구름에 가려져 있었는데 오늘은 날씨가 아주 좋습니다."문시아리 언덕에 오르자 사위가 훤히 보이는 아직 이른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힘든 걸음으로 달려온 내게 신이 내주는 선물처럼 설산 위로 보름달이 신비롭게 떠오르고 있었다. 히말라야 설산 위로 시나브로 떠오르는 보름달에 넋을 놓고 있다가 여기,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자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들이 거주한는다는 히말라야, 힌두교에서 말하는 신들의 거주지이자 신과 인간, 차안과 피안이 만나는 우주의 중심축, 그곳은 내가 그 무엇인가를 신성시 여기는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