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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주 여행을 할 때 유럽을 여행하고 있던 친구 은정이와 가끔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어느 날은 지금은 어디냐고 물으니 스위스란다. 물가가 보통이 아닐 텐데 밥은 잘 먹고 다니고 있는지 궁금했다. 아침에 마트에 들러 저렴한 빵 중에 가장 큰 걸 하나 사 그걸 세 등분해 하루 종일 먹고 다닌단다.

"야, 궁상이다 궁상."
"그치? 그래서 어느 날은 잠을 자는 데 별의 별 음식 생각이 다 나더라고."

먹는데엔 돈을 안 쓰는 애가 패러글라이딩에는 이십만 원이 넘는 돈을 썼다며 자랑을 했다. 진짜 끝내주게 재미있었다고. 친구는 한국 사람들이 많이 가지 않는 장소로만 여행하고 있었다. 블로그도 보지 않고 그때 그때 책에서 찾아보거나, 호스텔에서 만난 외국 여행자나 사장님에게 물어 여행지를 정한다고 했다.

"그래서 고생을 더 많이 하긴 해. 피할 건 피해야 하는 데 그걸 못하니까. 그래도 난 이 방식이 좋다. 한국 사람들은 죄다 같은 루트로만 다니는 것 같아. 블로그에서 누가 갔다더라, 하면서 그곳을 찾아가. 그리고는 그 사람이 사진 찍은 곳에 가서 똑같이 사진을 찍는 거야. 그게 뭐 여행이냐?"

그렇긴 했다. 그래서 나도 이번 여행엔 미리 어디를 갈지 정해놓지 않았다. '발길 닿는 대로 가는' 여행을 하고 싶었고, 또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장소를 찾아가 생각지도 못했던 경험을 하고도 싶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여행 스타일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친구도 역시 그랬다.

"외국 사람들은 몇 주씩 시간을 내 여행을 오잖아. 느긋하지. 방황하고 헤맬 시간이 주어지는 거야.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단 며칠 동안 이 큰 유럽을 보려고 하니 얼마나 급하겠어. 그러니 남들이 좋았다고 하는 곳에 가야 실패할 확률이 낮아진다고 생각하는 거지."

화순곶자왈, 딱 5분 들어갔다 나오다

오늘 아침도 난 게스트하우스 사장내외분에게 물었다.

"이런 날엔 어디를 가는 게 좋을까요?"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나는 지난 여행을 통해 비가 올 땐 역시 안에서 책이나 읽고 빈대떡이나 부쳐 먹는 것이 최고라는 걸 터득하긴 했다. 하지만 이곳 대정읍에서는 어쩌면 비가 올 때 가면 좋을 장소가 근처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만약 사장님이 모슬포 항 어느 식당에 가서 무엇을 먹어  보세요,라고 해도 그걸 따를 생각이었다. 아니면 근처 초콜릿 박물관을 가보라고 해도 그것 역시 좋은 생각이라며 그곳에 갔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사장님이 의외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여보, 그때 참 좋았지? 신비로웠어. 무언가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기분이기도 했고. 비가 두두둑 떨어지고 있는데 숲 속을 걷는 기분이란!"
"어디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곶자왈이요. 여기서 버스를 타고 나가면 화순곶자왈 앞에 내려요. 비 오는 날 가도 좋아요. 저희도 그랬어요."

곶자왈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제주에만 있는 원시림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곳이랬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소로 곶자왈을 꼽는 여행자를 몇 번 본 적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가지 말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망설이던 곳이었다. 위험하다고. 길을 잃을 수도 있다고.

"위험하지 않나요? 혼자 가기엔 위험하다고 하던데. 무섭기도 하고. 길을 잃을 수도 있고."
"아니에요. 괜찮아요. 한 30분이면 다 돌 수 있을 걸요? 걱정하지 마세요."

 총 1.5km 길이의 화순곶자왈. 그리 길지 않은 이 길을 나는 걷지 못하고 돌아왔다.
총 1.5km 길이의 화순곶자왈. 그리 길지 않은 이 길을 나는 걷지 못하고 돌아왔다. ⓒ 황보름

 화순곶자왈 입구. 입구로 들어가 고민에 고민을 하다 들어가긴 했는데...
화순곶자왈 입구. 입구로 들어가 고민에 고민을 하다 들어가긴 했는데... ⓒ 황보름

 화순곶자왈을 걸어 들어간 후 1분쯤 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
화순곶자왈을 걸어 들어간 후 1분쯤 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 ⓒ 황보름

화순곶자왈 입구에 선 나는 '커플 지옥, 솔로 천국'을 외치고만 싶었다. 둘이 왔었으니 이게 안 무서웠겠지! 나는 혼자라구!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고,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저 멀리 전망대에 색색의 우비를 입은 사람 대여섯 명이 서 있는 것이 보이긴 했지만, 그곳으로 가는 길은 내겐 아득하기만 했다.

입구 앞에 서서 들어갈까 말까 고민했다. 혼자 저 숲 속에 들어갔다가 길이라도 잃어 아무도 찾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다면…, 하는 생각이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마당에 시도도 안 해볼 수는 없다. 한 번, 해보자! 그렇게 겨우 5분. 100분 같았던 5분을 걸어 들어가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돌아 나왔다. 돌아 나오는 길은 왜 이리 헷갈리는지!

곶자왈은 내가 익히 봐왔던 숲이 아니었다. 자유분방한 나무들이 사방에서 나를 조여오듯 다가오고 있었고, 길이라고 나 있는 것도 길인지 아닌지 애매하기만 했다.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은 왜 이런 곳을 추천해 준거지? 내가 마음에 안 들었나?

외진 곳은 가지 마세요, 특히 비오는 날엔

입구로 무사히 돌아 나오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런데, 더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다. 여긴 어디지? 지금 이 외진 산자락에 나 혼자 서 있는 거야? 버스에서 내릴 땐 곶자왈만 찾아 가면 된다는 생각에 주위를 둘러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보니 사방이 산이고, 보이는 건 버스 정류장뿐이다. 거기다 비는 점점 더 거세진다.

버스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려도 30분 동안 차 한대 서지 않았다. 우선 이곳을 벗어나야 할 것 같아 아무 버스라도 타고 갈 생각이었지만, 그 아무 버스도 올 기미가 없다. 10분에 한번 꼴로 쳐다보기도 무서운 커다란 덤프트럭이 지나갈 뿐이다. 엄청난 곳에 와 있다는 생각에 몸서리가 쳐졌다. 옷도, 머리도 다 젖었다.

어떻게든 이곳을 벗어나자. 지도 어플을 확인하니 다음 정류장이 15분 거리에 있다. 버스정류장 이름에 '사무소'가 들어가니 그곳 근처엔 건물이 있을 것 같았다. 건물이 있다는 건 사람이 있다는 말이겠지.

다음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자 다행히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두 명이나 있었다! 다시 한 번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들 옆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그렇게 서서 1시간이 넘게 기다렸다. 여전히 버스는 오지 않았고, 지도 어플에선 벌써 몇 번째 버스 표시만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비는 그칠 생각이 없었고, 옆의 두 사람은 느긋하기만 하다. 나 혼자 안달복달하다 택시를 부르기로 했다.

스마트폰을 꺼내 택시 어플을 작동시켰다. 하지만 택시도 감감무소식. 그때 저쪽에서 빈 택시 하나가 달려온다. 나는 얼른 나가 손을 휘휘 저었다. 구조를 요청하는 사람처럼. 하지만 택시는 나를 못 본 척 그냥 지나간다. 저 멀리 가는 택시를 망연히 바라보는 내게 옆에 서 있던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이곳엔 택시가 안 서요. 외져서 그래요."

외진 곳인데 왜 택시가 안 서는 걸까.  그분이 계속 말을 한다.

"제주에서 이동할 땐 차가 있어야 해요. 안 그럼 이렇게 오래 기다리니까. 이런 곳에 올 땐 더 차를 타고 다녀야 하고요. 괜히 시간만 버리고 안 좋아요. "
"버스가 오긴 오겠죠?"
"오긴 오겠죠."

나는 그 분과 몇 마디 말을 더  주고받은 후, 입을 닫았다. 추웠고, 지쳤고, 아이씨, 배도 고팠다. 옆의 누나에게 개인 파산을 하게 된 과정을 낱낱이 털어놓던 그분은 드디어 버스가 도착하자 나 먼저 올라타라며 양보를 해줬다. 십 년 감수하는 기분으로 버스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늘은 낭패다. 생고생만 했구나.

한 시간을 달려 모슬포 항에 도착한 뒤 부리나케 식당으로 달려가 따뜻한 보말 해장국을 들이켰다. 빗속에서 20분을 걸어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곤 씻고 그대로 침대에 뻗었다. 저녁 땐 고등어 회를 같이 먹자는 남 사장님의 제안도 거절해야만 했다. 침대에서 일어날 기운도 없었다. 몸이 축난 것이다.

제주에는 외진 곳이 많다. 차 없이 혼자 움직일 땐 미리 버스 정류장 위치와 차 배차시간, 그 외 돌아올 방법 등을 '확실히!' 확인해 두는 것이 좋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외진 곳엔 되도록 혼자 가지 않는 것이다. 그런 곳은 나중에 친구나 가족과 함께 가면 된다.

그리고 아무리 제주라도, 비가 올 땐 어디 안에 들어가 책을 읽거나 빈대떡을 먹거나 낭만을 씹는 게 좋다. 특히, 비가 오는 날엔 곶자왈 같은 덴 안 가는 게 좋다! 그리고 또, 그곳 지리에 아무리 밝은 사람의 말도 때론 가려 들어야 한다. 어떻게 가려 듣냐고?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고생을 한 후에나 알게 되는 것들이 많으니..., 그러니 우선은 그냥 하고 봐야 하는 건지도.

덧붙이는 글 | 2015년 5월 26일부터 6월 24일까지, 30일간의 제주 여행 연재글입니다.
이 기사는 황보름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제주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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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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