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저 멀리 등대가 보인다. 걸어가는 길이 바람 때문에 쉽지 않다.
저 멀리 등대가 보인다. 걸어가는 길이 바람 때문에 쉽지 않다. ⓒ 황보름

아침을 먹고 나서는데 남 사장님이 따라 나오며 꽁꽁 얼린 500리터 생수를 건네준다. 그러면서 하는 말.

"마라도에 갈 땐 얼음물이 필수예요. 오늘처럼 태양이 뜨거운 날에는요."

찡긋 웃으며 다시 안으로 들어가는 남 사장님은 분명 내가 어제 곶자왈에 갔다가 생고생을 한 걸 눈치챈 거다. 어찌됐건 차가운 생수통을 손에 쥐자 기분이 무지 좋아졌다. 삼일 째 같은 길을 걷으니 이곳 대정읍에도 정이 듬뿍 든다. 모슬포 항에도. 이곳에 또 올 날이 있겠지?

마라도 가는 길 "와아 좋다, 이런 게 사는 건데!"

 마라도 선착장
마라도 선착장 ⓒ 황보름

 마라도 여객선에서 본 가파도
마라도 여객선에서 본 가파도 ⓒ 황보름

마라도로 가는 표를 사러 매표소에 들렀다. 역시나 마라도로 가는 매포소 앞엔 줄이 길다. 가파도 여객선과는 달리 마라도 여객선에선 맥주도 팔고 쥐포도 팔았다. 1층 끝에 자리 잡은 매점을 지나치는데 매혹적인 쥐포 냄새가 코끝을 때려온다. 꾹 참고 2층 갑판으로 올라와 테이블 맨 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바다를 보며 갈 생각이었다.

바다를 보는 건지,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두 남자의 '사진 찍기 삼매경'을 보는 건지 애매한 상황이 5분쯤 지속됐다. 학교 선후배인 듯 보이는 두 남자가 배가 출발하기 전부터 사진을 찍기 시작하더니 배가 출발한 후에도 쉬지 않고 계속 찍어대 내가 생각하기엔 수백 장의 사진을 배 안에서만 건지고 있었다. 그중 반 이상은 후배가 찍어주는 선배 사진이었고, 선배는 후배를 찍어주지 않아 후배는 주로 셀카를 찍었다. 그들 사이사이로 바다가 보였다.

두 남자에 정신이 팔려 있다 보니 나는 내가 의자에 엉덩이만 겨우 걸치고 앉아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이 테이블엔 내가 가장 먼저 자리를 잡았으나 그 뒤 등산복을 입은 내 부모님 뻘 되는 어른들이 한 명 두 명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러다 테이블이 꽉 찼고 나는 점점 밀려나 겨우 엉덩이만 걸치게 된 거였다.

테이블이 꽉 차자  그중 남자 어른들은 멀미를 하지 않으려면 맥주를 마셔야 한다면서 오전 11시에 쥐포와 맥주로 한 판을 벌였다. 부부 동반인 것 같았다. 여자 어른들도 이 아침부터 무슨 맥주냐고 남자들을 힐난하더니 함께 마신다.

배의 속도가 온몸에 전해져 왔다. 배가 만들어내는 우유빛깔 물살에 절로 환호성이 나왔다. 나는 물론 속으로만 환호성을 질렀다. 그때 한 아주머니가 나 대신 진짜 환호성을 쳤다.

"와아아아. 정말 좋다. 이런 게 사는 건데!!!"

아주머니의 환호성에 주위 분들이 돌아가며 한 마디씩 맞장구를 쳐준다.

"그치."
"그렇지."
"그렇지."
"이런 게 사는 거지."

나도 속으로 맞장구를 쳤다. '그렇네요, 이런 게 사는 건데요.'

옆에 앉은 아저씨가 이젠 거의 내 팔짱을 낄 것처럼 가까워져 왔을 때 마침 나는 일어서려고 했었다. 배 옆 난간으로 걸어가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끼어 들었다. 저 멀리 가파도가 가까워져 오는 게 보인다. 옆에서 셀카를 찍던 여자가 가파도를 배경으로도 셀카를 찍는다. 이 여자는 저게 가파도인 걸 알까. 나는 나도 모르게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저 섬이 가파도예요."
"네?"
"지금 찍고 계신 저 섬, 가파도라구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키가 작은 섬."

여자는 이제야 알게 됐다는 의미의 몸짓을 내보이고는 셀카는 그만두고 가파도를 사진에 담는다. 나는 이제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막 말을 붙이는 사람이 된 건가.

마라도를 수호하는 애기업개 당

마라도로 가는 배 안에서 나는 미리 읽어두었던 마라도 전설을 떠올렸다. 먼 옛날, 마라도 섬 주변엔 각종 어류, 해산물이 풍부했단다. 하지만 사람들은 바다신이 노할까봐 함부로 그것들을 잡을 수 없었고, 오직 매해 봄, 보름 동안만 마라도로 건너가 물질을 할 수 있었다. 그 해에도 사람들은 마라도로 향했고 전복, 소라 등을 듬뿍 잡았다. 그런데 떠날 날이 되어 배를 띄우자 갑자기 바람이 불고 바다가 거칠어지는 것이 아닌가. 더 이상한 점은, 배를 묶으면 바다는 다시 잔잔해지고, 배를 띄우면 다시 거칠어지는 거였다.

바다의 이유 없는 변덕 때문에 사람들은 마라도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몇 명의 사람이 같은 밤 같은 꿈을 꾼다. 여자 아이를 두고 가면 배를 띄울 수 있을 것이라고 꿈은 전했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여자 아이를 두고 마라도를 떠났다. 사람들이 무사히 건너간 바다를 향해 여자 아이는 울부짖는다. '나도 데려가 줍써!'.

3년 만에 다시 찾은 마라도에서 사람들은 여자 아이의 뼈를 찾았다. 그리고 그 뼈를 묻은 자리에 애기업개 당을 세운다. 처녀당 혹은 할망당이라고 불리는 이 애기업개 당은 이후 마라도 사람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수호신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나 같으면 나만 두고 간 사람들에게 열이 받아서 수호 같은 건 안 해줄 것 같은데, 그 여자 아이는 착한 아이였던가 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걸 받아들였던 거겠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섬, 마라도로 향하는 배 위에서 나는 3년을 홀로 지냈을 여자 아이를 떠올렸다. 그 아이의 마지막 숨결이 아직도 마라도에 남아있을까.

30분쯤 걸렸나. 마라도 선착장에 도착했다. 기암절벽을 가로지르는 계단을 올라 드디어 마라도 땅에 발을 디뎠다. 마라도에 도착하면 무엇을 가장 먼저 볼 수 있을까? 현무암 바위들? 아니면 돌담? 너른 초원? 그것도 아니라면 마라도 등대? 이 모든 것이 아닌 내 눈에 가장 먼저 띈 건 족히 열 곳은 돼 보이는 짜장면집. 왜 사람들이 마라도 하면 짜장면을 떠올리게 됐는지 알 수 있었다. 짜장면집이 이렇게나 많을 줄은 몰랐다.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짜장면집을 보니 절로 입 속에 침이 고인다. 우선 섬을 한 바퀴 돈 뒤에 먹을 생각이었지만, 미리 어느 곳에서 먹을지 정해놓고 싶었다. 저마다 내가 최고라고 외치고 있으니, 어느 곳이 최고일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맛집을 찾는 가장 탁월한 방법을 쓰기로 했다. 이곳 주민에게 물어보는 것.

물티슈를 살 겸 들른 편의점에서 계산을 하며 물었다.

"짜장면 어디가 제일 맛있어요?"

아저씨는 잘못 들으셨는지 이렇게 대답을 해준다.

"짜장면집이 9개가 있어요."
"아, 그중 어디가 제일 맛있어요?"
"바로 옆에 있는 짜장면집으로 가요. 내가 하는 덴데 정말 맛있어요."
"네? 아, 네."

편의점도 하고 짜장면집도 하는 능력자 아저씨의 추천은 귓등으로 흘리며 밖으로 나왔다. 우선은 마라도를 한 바퀴 돌아보는 게 좋겠다.

바람의 왕국 마라도, 이 바람을 어떻게 견딜까

 바람 때문에 더 다가가기가 무서웠다
바람 때문에 더 다가가기가 무서웠다 ⓒ 황보름

 마라도의 아름다운 초원.
마라도의 아름다운 초원. ⓒ 황보름

짜장면집을 지나치고 나서야 마라도는 본격적으로 아름다움을 드러냈다. 아기자기한 가파도와는 달리, 마라도에선 야생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나무 한 그루 없는 초원의 푸르름이 세찬 바람에 쉴 새 없이 물결쳤다. 장관이었다.

국토 최남단비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들은 불어오는 바람에 정신이 없어 보였다. 모자를 손으로 꾹 눌러 잡은 사람들이 하나, 둘, 셋에 맞춰 타이밍 좋게 미소를 짓는다. 나는 국토 최남단비 뒤쪽의 기암절벽 근처까지 걸어 내려가다가 몸이 기우뚱하는 바람에 멈춰 섰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바람에 휙 채여 바다 속으로 내동댕이 쳐질 것 같았다.

등대를 향해 걸었다. 이렇게 강한 바람 속에서도 꽃은 피고 풀은 자랐다. 저 바다, 저 하늘, 저 바람, 저 꽃을 정성스레 사진기에 담는 사람들이 곳곳에 보였다. 그들이 담아갈 마라도의 모습은 어떨까. 어느새 한 바퀴를 다 돌아 다시 짜장면집 앞에 섰다. 짜장면은 웬만하면 다 맛있다는 사실이 머리를 스쳤다. 대충 아무 데나 들어가 짬뽕을 시켰다. 난 언제나 짬뽕이니까.

늦은 점심 때라 손님은 나 혼자였고, 종업원 아주머니와 사장으로 추측되는 아저씨가 내 앞 테이블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한다. 짬뽕을 아주 꼼꼼히 먹었다. 톳을 먹고 홍합을 먹고 조개를 먹고 전복을 먹고 면을 먹고 다 먹었다. 이런 내 모습을 보던 아주머니가 난데없이 칭찬을 해주신다. 밥을 먹다 칭찬을 받긴 처음이었다.

"차근차근 잘도 먹네."
"네? 네, 흐흐."

마라도를 한 바퀴 돌고 짜장면을 먹기엔 한 시간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충분할 뿐 아쉽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짬뽕을 먹고 부른 배를 달랠 결 나는 마라도를 한 바퀴 더 돌았다.

바람은, 익숙해지는 것이 아닌가 보다. 한시도 쉬지 않고 불어 대는 바람에 점점 기운이 빠졌다. 마라도를 왜 바람의 왕국이라 부르는지 실감이 났다. 모자가 날아갈 것 같아 모자를 벗으면 머리채가 사정없이 얼굴을 때려 왔다. 정신이 아득하다. 이곳 마라도 주민들은 이 바람을 어떻게 매일 견디고 있는 걸까.

다시 국토 최남단비를 지나 등대를 지나 넓게 펼쳐진 아름다운 초원을 걸으며 나는 간절해지고 있었다. 이제 바람은 그만 맞고 싶다. 그런데, 바람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선착장 근처 대피실엔 이미 사람이 가득하다. 배가 올 때까지 이 바람을 속절없이 맞고 있어야 하는 건가.

애기업개 당이 없었으면 이보다 더 거친 바람이 불게 되는 건가 싶었다. 딱 이 정도, 이 정도여서 사람들은 이곳에서 물질을 하고, 짜장면도 팔고, 짬뽕도 팔 수 있는 건가. 겨우 두 시간이 아니라, 이틀, 두 달, 2년을 있다 보면 이 바람에도 이력이 나는 건가.

사진작가 김영갑은 중산간 마을에서 사진을 찍다 마음이 답답하면 이곳 마라도로 찾아와 며칠을 묵었다고 했다. 그러면 묵은 때가 사라지듯 마음의 때가 사라졌다고. 바람 때문일까. 다른 건 다 제쳐두고 바람을 피할 생각만 하다 보면 어느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는 건지도 몰랐다.

바람을 너무 맞으니 마치 누구한테 매를 맞는 듯한 기분이었다. 차라리 이럴 거면 짜장면집에 들어가 이번엔 짜장면이나 한 그릇 더 먹는 게 낫다 싶을 만큼 나는 바람이 귀찮아졌다. 얼른 아주 조금만이라도 북쪽으로 도망가고 싶었다. 마침, 배가 왔다. 돌아오는 배 안에선 꼬박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모슬포 항이다. 오늘은 협재로 간다.

덧붙이는 글 | 2015년 5월 26일부터 6월 24일까지, 30일간의 제주 여행 연재글입니다.
이 기사는 황보름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제주 여행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