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에 교복 입히는 꼴이잖아요. 정말 하는 일마다 촌스러워요. 그래선지 제 또래 중에 박근혜 대통령을 좋아하는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어요."이제 역사 국정교과서가 나와도 문제다. 역사를 배울 학생들은 '어차피 2017년 한정판'이라며 조롱하는 지경을 넘어, 이젠 국정교과서를 박근혜 대통령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래선지 '국정교과서로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칠 수 없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교사들도 덩달아 늘어나고 있다. '집필진을 공개할 수 없다'고 밝힌 교육부의 방침은 이런 분위기에 기름을 끼얹었다.
일각에서는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근현대사에 대한 아이들의 관심을 이끌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많은 학생이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기 위해 국정교과서를 강행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교육부 장관이 근현대사 부분을 축소하고 고대사 등 전근대사 부분을 늘리겠다는 발표를 한 뒤, 대부분의 아이도 '캥기는 게 많은 탓에 줄이려는 것 아니겠느냐'라고 묻고 있다.
정부와 여당은 방송과 보수 언론을 통해 연일 '올바른' 교과서를 만들겠다고 홍보하며 믿어달라고 아우성치지만, 그런 아이들을 설득하기란 역부족이다. 학생들은 정부와 여당의 주장이라면 이젠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으려 한다. 아이들은 오로지 종편 등을 통해 세상을 보는 어르신들과는 달리, SNS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에 노출된 까닭이다.
집회 현장에서 들었던 말 "너희가 국정교과서를 알아?"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곧장 '학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 같다. 기실 계속되는 아이들의 국정교과서 반대 시위는 역사에 대한 획일적인 시각을 강요하는 그들의 고루한 인식에 대한 반감이자, 매사 '촌스러운'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거부감에 기인한 바 크다. 과거의 국정교과서와 현재의 검정교과서 사이의 구체적인 내용 차이에 관해서는 관심이 덜한 듯하다.
"어린 너희가 국정교과서를 알아?"지난 11월 14일 민중총궐기 때 국정교과서 반대 시위를 벌이던 교복 입은 청소년들에게 지나가던 어르신들이 나무라듯 던진 말이다. 외려 묻는 그분들에게 돌려드려야 마땅할 질문이라는 생각에서인지, 아이들은 들은 체도 않고 더 큰 소리로 구호를 외쳤다. 만약 그때 아이 중에 누군가 '네, 다 읽었습니다, 어르신들도 꼭 찾아 읽어 보십시오'라고 대꾸했다면 어땠을까.
바로 그때 교사로서 다짐했다. 역대의 역사 국정교과서를 찾아 학생들과 읽어보자고. 어린 학생들이 뭘 아느냐고, 또 종북세력에 의해 선동됐다고 여기는 사람들 앞에서 보란 듯 당당해지려면, 반대하기 전에 국정교과서의 그릇된 서술 정도는 대강 파악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울러, 그저 박근혜 대통령이 싫어서 국정교과서를 반대한다는 아이들의 '단순한' 편견도 없앨 수 있으리라 여겼다.
다행히도 역대 국정교과서는 당시의 종이 교과서가 없어도 인터넷으로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우리 역사넷'이라는 사이트를 통해 일제강점기부터 1997년 고시된 7차 교육과정에 이르기까지 역대 국정교과서의 수록 내용 전부를 검색할 수 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이는 국정교과서에 반대한다는 한 아이가 얼마 전 귀띔해줘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직접 만든 '국정 vs. 검정 가로세로 낱말풀이'
아이들에게 '그런 사이트가 있으니 살펴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시험에 출제한다고, 수행평가 점수에 반영한다고 을러대도 귓등으로 듣는 경우가 태반인데, 아이들에게 그런 '무성의한' 소개는 하나 마나다. 아이들에게 놀이처럼 다가서게 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가로세로 낱말풀이'를 만들기로 했다. 이름하여 '국정 vs. 검정을 통한 우리 현대사 바로 알기'다.
그러자면 나부터 열심히 읽어야 했다.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고 손목이 시큰거릴 정도로 '클릭'해댔다. 지난 주말을 이용해 두문불출하며 국정교과서와 온종일 씨름했더니 대강 서술만 봐도 어느 정권에서 만든 것인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그런 후 지금 가르치는 검정교과서의 현대사 부분을 샅샅이 뒤졌다. 보면 볼수록 둘의 차이는 확연해졌다.
우선, 국정에는 있는데 검정에는 없거나, 반대로 검정에는 있는데 국정에는 빠진 사건과 이름을 찾았다. 서술의 분량과 비중, 관점 차이도 두루 살폈는데, 모두 언급돼 있다 해도 동일한 사건에 대한 과거의 국정과 현재의 검정과의 차이는 노골적일 만큼 컸다. 교육과정이 바뀔 때마다 집필진들이 달랐을 텐데도, 어김없이 당시의 권력에 굴종하며 '봉사'한 흔적이 역력했다.
예컨대 5.16 군사 쿠데타 직후인 1963년에 개정된 2차 교육과정 때 사용된 국사 교과서를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좌우합작이라는 이름으로 국민의 혼란을 조장하더니, 마침내 영남지방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그런데 2013년 검정교과서에서는 "좌우합작은 미군정의 지원과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며 전혀 상반되게 수록돼 있다. 반공을 '국시'로 삼은 박정희 정권을 위해 집필진들이 역사적 사실조차 버젓이 왜곡시킨 셈이다.
그뿐 아니다. 1973년에 개정된 3차 교육과정 때는 낯이 뜨거울 정도다. "1972년 10월,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처하고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달성할 정치, 사회 풍토를 조성하고자 유신을 단행하였다"라고 서술했다. 한술 더 떠, "이로부터 사회의 비능률적, 비생산적 요소를 불식하고 전근대적 생활의식과 사대사상을 제거하여 한국의 민주주의 정립을 추진했다"며 헌법유린행위를 찬양하기까지 했다.
"5.16 혁명은 4.19 의거의 계승이었으며 발전이었다"라는 서술은 또 어떤가. "4.19 의거 이후 민주적 안정 세력이 자리 잡히지 못함으로써 사회의 혼란과 불안이 증대되는 가운데 이북의 공산 세력의 야심이 꿈틀거리게 되자, 혼란을 일소하고 공산 침략에서 국가와 민족을 건지기 위해 일어난 혁명"이라는 내용에 덧붙은 주장이다. 견강부회도 유분수다.
유신 정권 때만의 일도 아니다. 1982년 개정된 4차 교육과정 때도 '제 버릇 남 주지' 못했다. 1980년 광주 학살을 저지른 전두환의 5공 정권 또한 국사 교과서를 누더기로 만들어버렸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각계의 주요 인사를 망라한 입법회의를 구성하여 새로운 정부 수립의 기초를 닦았다. 국민투표로 확정된 새 헌법에 따라 당선된 전두환 대통령"이라고 서술했지만, 교과서 그 어디에도 '5.18 광주'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더욱이 "전두환 대통령이 이끄는 제5공화국은 정의사회의 구현과 민주복지국가로의 발전을 지향했다"는 서술에서는 실소를 자아낸다.
검정 체제가 도입되고 나서야 비로소 재평가되거나 교과서에 실린 인물들 또한 적지 않다. 좌우합작을 주도하다 암살된 여운형은 국정 시절 공산주의자로 잘못 알려져 왔고, '노동자의 예수'라 불리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도 검정 체제가 도입되고 나서야 빛을 봤다. 또, 우리 현대사에 있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영원한 광복군' 장준하도 국정교과서에는 언급조차 없다.
암기과목이었던 역사, 조는 학생이 없었다요컨대, 과거 국정교과서는 독재 정권의 홍보 도구로 충실히 기능해왔다. 심지어 역사적 사실이 왜곡된 것이라도 문제가 될 건 없었다. 당대 권력의 입맛에 맞추기만 하면 모든 것이 용서될 뿐만 아니라 되레 승승장구하며 벼슬길에 올랐다. 역대 국정교과서를 들여다보면서, 권력에 빌붙어 학자적 양심을 파는 지식인들이 우리 사회에 적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무릇 기성세대라면, 더욱이 교사라면, 이러한 '슬픈' 현실을 미래세대인 아이들에게 소상히 알려야 할 책임이 있다. 아이들이 국정교과서의 폐해를 분명하게 깨닫고 가슴으로 느끼지 못한다면, 입시라는 눈앞의 현실 앞에 쉬이 좌절하거나 굴복할 수밖에 없다. 국정교과서가 사회적 이슈가 된 지금이야말로, 아이들에게 연도와 이름 달달 외우는 암기과목이라는 편견을 깨고 참된 역사 공부가 무엇인지 보여줄 절호의 기회다.
국정과 검정교과서를 비교하며 알게 된 '웃(기면서도 슬)픈' 역사적 사실을 직접 가로세로 퍼즐로 맞추려니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교과나 단원에 나오는 전혀 생뚱맞은 낱말을 끼워 넣을 수도 없는 법, 완성하는 데에 이틀 밤으로도 모자랐다. 마침내 수업시간에 완성된 퍼즐을 내보였고, 아이들은 무척 어려워하면서도 교과서와 인터넷을 뒤져가면서 놀이하듯 풀어나갔다. 여느 때와는 달리 조는 아이들이 단 한 명도 없었음은 물론이다.
어차피 수업시수가 모자라 올해 안에 현대사 단원의 진도를 나가기 어려웠는데, 이 퍼즐로 대체할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예상과는 달리, 모둠별로 퍼즐을 풀어내는 데에 한 시간이 꼬박 걸렸다. 아이들은 여태껏 현대사를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고, 그렇다고 시험에 자주 다뤄지는 부분도 아니어서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수업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장준하'를 '정준하'로 쓰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학생들은 "전혀 몰랐던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됐다"며 다들 뿌듯해 했다. "신탁통치에 대한 극렬한 갈등이 한 신문의 오보에 기인했다는 걸 처음 알게 됐다"는 아이, "사사오입 개헌이 진짜 있었던 일이었냐"고 묻는 아이, "세계 평화에 공헌하기 위해 베트남에 파병했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헛웃음 치는 아이 등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다.
이 퍼즐을 통한 수업은 지난 11월 14일 민중총궐기에 이은 내 나름의 '시즌 2'다. 가로세로 낱말 풀이를 통한 현대사 학습의 효과를 직접 확인했으니, 그 여세를 몰아 또 다른 퍼즐을 구상하고 있다. 이번엔 교과서와 도서관에 비치된 친일인명사전을 활용한 '친일 vs 항일 인물 가로세로 낱말 풀이'다. 친일파라고 하면 오로지 이완용만 떠올리는 아이들에게 친일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다.
덧붙이는 글 | ‘국정 vs 검정을 통한 우리 현대사 바로 알기’ 퍼즐 파일이 필요한 분이 있다면 쪽지로 연락 바란다. 우리 아이들의 현대사 공부에 쓰인다면, 어디든 누구에게든 기꺼이 보내드릴 생각이다. 지금 구상 중인 퍼즐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