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경기도 부천시 까르푸(현 홈플러스) 중동점에서 벌어진 실화를 바탕으로 한 국내 최초 '노동 문제' 드라마 <송곳>이 막을 내렸다. '먹고 사는 것도 힘든데 무슨 노동 문제냐'라고 말하는 대중에게 노동 문제의 현실을 고발하는 주인공 구고신의 대사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구고신은 가상의 인물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구고신이 있다. <오마이뉴스>는 이들을 만나 그들의 외침을 세상에 전달한다. [편집자말] |
"우리는 패배한 게 아니라 평범한 거요. 우리의 국가는, 우리의 정치 공동체는 평범함을 벌주기 위해 있는 게 아니요. 우리는 벌 받기 위해 사는 게 아니란 말이오." - JTBC 특별기획 드라마 <송곳> 5화
구고신 부진노동삼당소장은 고용 불안 위기에 빠진 삼진노동조합 노조원 앞에서 이렇게 소리쳤다. "경쟁에서 져서 그런 걸 어떡해요. 다 본인 책임이지"라고 말하는 노조원 문소진의 물음에 구고신은 "패배는 죄가 아니다"라며 울분을 토한다.
많은 시청자는 이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드라마 <송곳>의 원작 웹툰에 나오는 이 대사를 공유한 페이스북 페이지에 6만2000명이 '좋아요'를 눌렀다. 드라마 속 구고신의 대사들은 어록으로 묶여 온라인 공간에서 끊임 없이 회자되고 있다.
'노동'이라는 단어가 금기시되는 시대, 그 금기에 균열을 낸 <송곳> 속 구고신은 가상 인물이 아니다. 짜장면 배달부의 6개월 치 체불 임금을 받아내고, 새벽녘 청소차에서 떨어진 하청노동자의 산재 처리를 돕는 구고신은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애써 노동 운동과 노동조합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보이지 않을 뿐이다.
원작 웹툰을 그린 최규석 작가는 많은 노동운동가를 만나 구고신을 탄생시켰다. 최규석 작가는 <오마이뉴스> 인터뷰 요청을 사양하면서, 구고신의 실제 모델 두 사람의 이름을 알려줬다.
두 명의 구고신을 만나기 위해 지난 11월 23일 오후 경기도 부천시 부천비정규직센터를 찾았다. '무료 노동상담', '임금', '퇴직금', '산업재해', '해고'라고 적힌 센터의 간판은 <송곳> 속 부진노동상담소를 연상케 했다.
두 사람의 구고신
"최규석 작가와 이야기할 땐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고 이야기했는데 그분은 그걸 '서는 자리가 달라지면 풍경이 달라진다' 이렇게 멋있게 바꿔놨더라고."이종명 부천비정규직센터장의 말이다. 뾰족한 턱에 크고 깊은 눈, 무엇보다 이마 중앙을 가르는 주름. 이종명 센터장의 얼굴을 보자마자, 최규석 작가가 그에게서 구고신의 얼굴을 따왔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챘다.
또 다른 구고신 모델 중 한 명인 김재광 노무사는 <송곳>의 실제 배경인 2003년 까르푸 중동점 노조 투쟁 당시 <송곳> 주인공 이수인의 실제 모델 김경욱 사무장을 곁에서 도왔다. 김 사무장은 법률을 자문하거나 마음이 많이 힘든 날, 김 노무사에게 전화를 했다. 김 노무사는 <송곳> 속 구고신의 역할과 많이 닮았다.
"까르푸 (노조가 회사와 투쟁할) 때 되게 어려울 때가 있었다. 조합원들이 노조 탈퇴하기도 하고. 그때 김경욱씨가 찾아와서 같이 손잡고 이야기를 나눴다. 너무 마음이 아프더라.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 김재광 노무사그럼에도 오해하지 말란다. 김 노무사는 그 혼자서만 김 사무장을 도운 게 아니라고 재차 강조했다. 그는 "힘들 때 전화를 나누고, 심정적인 지지를 보낸 정도다"라고 말했다. 이종명 센터장도 까르푸 투쟁 당시 노조원들의 교육을 맡았다.
김 노무사의 말을 듣다 보니 구고신의 말투가 떠올랐다. 동네 형처럼 시시콜콜 수다를 늘어놓는 것 같으면서도 핵심을 뚫는 김재광 노무사의 달변은 영락없는 <송곳> 속 구고신이었다. 노동자를 대할 땐 껄렁할 정도로 편안한 말투를 구사하면서도 사측과 교섭할 땐 꼿꼿한 태도로 매섭게 받아치는 것도 똑같다.
김 노무사는 "노동자를 만날 때 사건으로만 대하지 않는다"면서 "그 사람의 인생이 바뀔 수도 있는 문제기 때문에, '너 진짜 그 싸움할 수 있어?' 이렇게 직접 묻기도 한다. 어찌 보면 냉소적이다. 따뜻하기보다는 진실 되게 노동자를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드라마 <송곳>을 어떻게 봤을까. 김 노무사의 말이다.
"<송곳>에는 러브라인이 하나도 없어. 뭔 놈의 드라마가 이렇게 건조해. 나는 보다가 지칠 것 같아. 안타깝긴 하지. 좀 더 많이 봤으면 좋겠는데. (시청률에서 성공한) <미생>은 대다수에게 익숙했을 거야. 자기 얘기 같으니까. 체제에 순응하면서 고통을 당하는 모습이니까. 하지만 <송곳>처럼 체제에 저항하는 이야기는 동의하면서도 불편할 수도 있다는 거지." 그럼에도 <송곳>의 인기를 실감한다고 말했다.
"최근에 (동료 노무사한테) 어떤 고충을 들었는데, 자기 얘긴 안 믿고 <송곳>에 나오는 이야기만 믿는다고 하더라고. 현장 조합원들에게 분명히 어필이 돼요. 미디어 힘이 무척 세요." 이종명 센터장은 "아내가 내게 <송곳>을 아냐고 물었다. 아내는 '(아내가 있는 노조의) 조합원들이 내게 <송곳> 단행본을 사오라고 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의 아내는 아직 구고신의 모티브가 남편인 것을 모른다.
"드라마 같은 일? 비일비재하다"
김재광 노무사와 이종명 센터장은 자문을 구하거나 교육을 요청하며 일주일에 두세 번 마주하는 사이다. 두 사람은 최규석 작가가 <송곳>을 기획하고 취재할 당시 법률 자문을 하거나 여러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송곳> 곳곳에 그 일화가 녹아 있다.
<송곳>에서 한 청소 노동자가 달리는 트럭 짐칸 꼭대기에서 쓰레기를 몸으로 안고 있다가 떨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이종명 센터장이 소개한 7년 전 일화다. 그는 "당시 노조를 만들어야겠다는 분위기가 있는 상태에서 그런 일이 터졌다"면서 "노조를 만든 후에 (최규석 작가와) 차량도 취재하고 새벽 운행하는 것도 봤다"라고 말했다.
작품에서는 트럭에서 떨어진 청소노동자를 돕기 위해 자술서를 써주는 동료가 나오면서, 헤피 엔딩으로 끝난다. '분명 하나쯤은 뚫고 나온다. 다음 한 발이 절벽일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도 제 스스로도 자신을 어쩌지 못해서 껍데기 밖으로 기어이 한걸음 내딛고 마는 그런 송곳 같은 인간이'라는 명대사가 나오는 일화다.
하지만 이 명장면의 실제 사건은 새드 엔딩이다. 이종명 센터장은 "노조가 만들어지기 전이라 당시 회사 눈치를 본 동료들이 결국 진술서를 써주지 못했다. 그 분은 결국 퇴사했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청소차 뒤 발판에 매달려 일하시는 분들이 많다. 그 분들도 비일비재하게 떨어져 다친다. 그런 분들은 산재로 많이 처리됐다"라고 전했다.
이종명 센터장은 1986년부터 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1988년 노동조합을 알게 됐고, 1994년부터 노동문제연구소 등에서 활동했다. 김 노무사는 2002년 노무사가 되기 전부터 노동운동을 했다. 이 센터장은 전화 상담을 포함해 하루 5~10건의 노동 문제를 접한다. '노동인권실현을 위한 노무사 모임' 소속인 김재광 노무사도 많은 노동 사건을 만난다.
일하면서 자기 임금이 얼마인지 모르거나, 회사가 아무 이유 없이 퇴직금의 70%를 삭감한다고 통보해도 이를 받아들이는 노동자도 있다. 김 노무사는 "입사하면서 근로 계약서는 써본 적이 없고, 체불 임금을 청구하자니 자기 임금을 모르는 사람도 있다"면서 "최저 임금으로 계산해 받아내긴 하지만,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체불 상태에서 왜 계속 일을 하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 노무사는 "그게 참 아픈 일"이라고 운을 뗐다.
"이번 달엔 임금이 나올까? 다음 달에도 '이번 달엔 나오겠지' 생각하게 된다. 일할 데가 마땅하지가 않으니까. 그 사람들도 그렇게 살고 싶지 않지만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거다. 퇴직금을 사장이 깎아서 주겠다는 말에 결국 깎아서 받아 오는 경우도 있다. 다 받아낼 수 있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반토막에 합의하는 경우도 많다. 사장은 앉아서 50%를 버는 거다."김 노무사는 "노동자가 '법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라고 말해선 안 된다"면서 "무엇보다 사회적으로 노동자를 존중하지 않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전했다. "노동자가 당연히 받아야 할 임금을 독하게 결심해서 받고, 당연히 지켜야 할 일자리를 독하게 지키고, 성희롱을 당하는데도 독하게 마음을 먹고 신고를 해야 하는 세상이 올바른 세상인가"라고 되물었다.
이 센터장은 노조에 대한 인식을 바뀌어야 한다며 말을 받았다. "노조가 꼭 정답은 아닐 수 있지만, 노조를 통해서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내 권리를 경험하며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노무사는 노조원을 교육할 때 전하는 말을 덧붙여 들려줬다.
"우리 사회는 약한 걸 죄로 여긴다. 하지만 스스로 약한 걸 깨우치는 사람이 단결한다. 강한 놈이 왜 단결하나, 경쟁을 하지. 약한 걸 부끄럽게 여기는 게 큰 문제다. '노동자가 약하니 노동법이 있는 거다,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거다' 이런 걸 자라면서 배워야하는데 가르치지 않고... 약한 걸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말고, 당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동료의 손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
이종명 부천비정규직센터장-김재광 노무사 인터뷰②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