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003년 경기도 부천시 까르푸(현 홈플러스) 중동점에서 벌어진 실화를 바탕으로 한 국내 최초 '노동 문제' 드라마 <송곳>이 막을 내렸다. '먹고 사는 것도 힘든데 무슨 노동 문제냐'라고 말하는 대중에게 노동 문제의 현실을 고발하는 주인공 구고신의 대사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구고신은 가상의 인물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구고신이 있다. <오마이뉴스>는 이들을 만나 그들의 외침을 세상에 전달한다. [편집자말]
 JTBC <송곳>의 한 장면
JTBC <송곳>의 한 장면 ⓒ JTBC

"비켜줄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게 안 되는 내가 미치겠다."

한 마리 고라니가 도로 중앙에 홀로 서서 눈을 끔벅인다. 비키라고 경적을 울려대는 트럭을 마주하면서도 한 발자국도 발을 떼지 못한다. 그때, 성큼성큼 코끼리 한 마리가 다가와 고라니를 자신의 긴 코로 감싼다. - JTBC 특별기획 <송곳> 1화 중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관계를 고라니와 코끼리로 비유한 <송곳>의 이 장면은 노동조합이 없는 노동자의 불안정한 상태를 명확히 그려낸다. 도로 위에서 무방비 상태로 '로드킬' 당하는 고라니의 신세는 노조조직률 10% 안팎을 맴도는 불안한 한국 노동환경 속 노동자의 모습과 닮았다.

위 <송곳> 속 장면의 결말은 안타깝게도 비극이다. 코끼리가 고라니를 결국 지켜주지 못하고 제 길을 떠나기 때문이다. 고라니는 결국 사측을 뜻하는 덤프트럭에 받혀 산산이 부서진다. 노조가 있어도 제대로 그 역할을 하지 못하면 노동자에게 어떤 보호막도 될 수 없음을 은유한 것이다.

'구고신을 만나다' 기획을 진행하면서 2015년을 살아가는 구고신들에게 들었던 고민은 한결 같았다. 바로 고라니들을 위한 코끼리, 즉 노조의 '올바른 미래'에 관한 것이었다(관련 기사 : "지금 노동운동에는 휴머니즘이 없다").

'모두'가 일어서는 노동조합 

 김진억 희망연대 나눔국장
김진억 희망연대 나눔국장 ⓒ 이희훈

"더불어 사는 삶, 아래로 향하는 운동. 노조활동을 하다 보면 이 두 가지를 잊기가 쉬워요. 노조라는 틀에 갇히는 조합주의로 갈 위험도 있고요. 사업장 틀에만 갇히면 노동조건 개선이나 임금 인상에만 집중하기 쉽습니다. (노동조건 개선과 임금 인상은) 노조활동의 기본이고, 거기서 더 나아가 (노동자의)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문제 제기가 더러 있었죠."

지난 21일 서울 은평구 민주노총 서울본부 한편에 있는 희망연대노동조합 사무실에서 만난 김진억 희망연대노조 나눔국장의 말이다. 희망연대노동조합은 사업장 중심의 노조운동을 벗어나 '지역 사회 속에서 함께 호흡하는 노조'라는 대안적 목표를 가지고 지난 2009년 탄생한 비교적 젊은 노조다.

"(지금까지) '일부만 일어서기'에 안주하고 말았습니다. '함께 살기 위한' 삶을 작업장과 재생산, 생활 문화 공간에서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중략)...노동조합 운동을 대공장, 정규직, 남성, 조직 노동자 중심의 운동에서 중소 영세, 비정규, 여성, 미조직 노동자들과 함께 전체 노동자의 권리, 노동권을 확대하는 압도적 다수자 운동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 '사회 변혁적 노동운동, 어떻게 가능한가?'

김진억 국장이 희망연대노조의 출범 배경을 설명한 글의 일부다. 조합원이 아닌 노동자들의 권리도 키울 수 있는 노조. '가능할까' 의문이 들었다. '먹고 사니즘(먹고 사는 문제가 힘들어 주변을 보지 못하는 세태를 뜻하는 말-기자 말)' 때문에 '함께 살자'고 말하기 힘든 요즘이기 때문이다. '헬조선', '지옥 불반도'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어느 때보다 밥벌이가 힘든 이때, 노동운동의 '대안'을 이야기하는 또 다른 구고신을 만나 봤다.

우리 동네 노동자

 "케이블 노동자는 '동네 노동자'예요.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케이블 방송 설치하고, 고장나면 A/S하고. (희망연대노조가) 지향했던 노동운동과 지역이 만나는 뭔가를 해볼 수 있다고 생각해서 조직 사업을 했어요. 사측의 탄압도 있었지만 같이 막아냈고... 2011년 11월에 씨앤앰 사측과 정식 임금·단체협약을 체결했는데 그때 요구한 게 사회 공헌 기금이었어요."
"케이블 노동자는 '동네 노동자'예요.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케이블 방송 설치하고, 고장나면 A/S하고. (희망연대노조가) 지향했던 노동운동과 지역이 만나는 뭔가를 해볼 수 있다고 생각해서 조직 사업을 했어요. 사측의 탄압도 있었지만 같이 막아냈고... 2011년 11월에 씨앤앰 사측과 정식 임금·단체협약을 체결했는데 그때 요구한 게 사회 공헌 기금이었어요." ⓒ 이희훈

희망연대노조는 지난 2010년부터 씨앤앰, SK브로드밴드, LG유플러스 등 각 지역의 케이블 노동자를 조직해 왔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힘을 모아 해고자 109명 전원 복직을 이끌어낸 희망연대노조 씨앤앰 지부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뉴스를 통해 많이 회자된 바 있다(관련 기사 : 전광판 고공농성 C&M 노동자들 "해고자 109명 복직").

지난달 14일에는 제23회 전태일 노동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싸워 승리한 과정도 수상의 주요한 까닭이지만, 가장 큰 요인은 따로 있었다. 전태일 재단은 희망연대노조의 수상 이유를 "낮은 데로 임하는 지향성과 함께 살자는 공동체적 가치를 실현해 전태일 정신을 구현했다"고 밝혔다.

"케이블 노동자는 '동네 노동자'예요.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케이블 방송 설치하고, 고장나면 A/S하고. (희망연대노조가) 지향했던 노동운동과 지역이 만나는 뭔가를 해볼 수 있다고 생각해서 조직 사업을 했어요. 사측의 탄압도 있었지만 같이 막아냈고... 2011년 11월에 씨앤앰 사측과 정식 임금·단체협약을 체결했는데 그때 요구한 게 사회 공헌 기금이었어요."

노동조합은 회사와 임·단협을 체결할 때 임금 인상이나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희망연대노조는 임·단협을 체결하며 노조의 '사회 공헌' 기금을 씨앤앰에 요구했다. 그 해와 다음 해 모두 3억 원의 기금을 따냈다. 이 기금은 노동자가 일하는 동네의 여러 지역 사업 곳곳으로 스며 들어갔다.

"우선 지역의 취약 계층 아동, 청소년 사업을 시작했어요. 지역 사회와 더불어 사는 삶을 고민하다 첫발을 뗀 게 그 일이었어요. 서울 강동 지역과 성북 지역을 먼저 찾아가서 그쪽 청소년, 아동 시민 단체와 만났죠. 기금만 대는 게 아니라 노조조합원도 참여했어요. 햇수로 5년째 됐습니다."

내 일터가 있는 지역 사회 속에서 '더불어 사는 법'을 모색하는 노동자, 그리고 이를 돕는 노조. 시작은 쉽지 않았다. 관련 경험도 없고 과거 사례도 없다 보니 뭘 어떻게 해야하나 하는 고민도 많았다. 그는 먼저 '노동조합이 잘 할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했다. 그래서 시작한 게 아이들과 부모, 돌봄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노동인권 교육이었다.

"돌봄 노동자나 학부모를 대상으로 노동인권 교육을 했어요. 아이들이 자라나는  환경 속에서 건강한 노동자로 성장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우리 (노조)의 역할이니까요. 지역마다 사회 공헌 기금 일부를 들여서 노동인권 강사도 육성합니다. 서울 강동, 성북, 송파 지역에서 하고 있는데, (강사가 되면) 동네 학교 수업에 들어가 노동교육을 하죠."

노동조합을 지키는 또다른 '코끼리'

 "'(노동조합이) 지역 사회와 연계해 사회 연대 사업을 했는데, 투쟁할 때 지역 시민과 단체들이 초기부터 발벗고 나서서 (씨앤앰) 본사에 항의 방문도 하고 면담 투쟁도 했다"
"'(노동조합이) 지역 사회와 연계해 사회 연대 사업을 했는데, 투쟁할 때 지역 시민과 단체들이 초기부터 발벗고 나서서 (씨앤앰) 본사에 항의 방문도 하고 면담 투쟁도 했다" ⓒ 이희훈

동네 노동자와 지역 사회 구성원과의 만남은 베풀고 수혜를 받는 관계에만 머물지 않았다. 지난해 6월 씨앤앰이 협력 업체 5개를 교체하는 과정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109명을 해고한 후 씨앤앰 비정규직 노조와 정규직 노조는 약 7개월의 긴 싸움에 들어갔다. 파업과 노숙 농성, 고공 농성, 단식 등 할 수 있는 방법은 총동원했다. 이 싸움에 그간 노동조합이 맺어왔던 사회적 연대의 힘도 더해졌다.

김진억 국장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싸웠다는 것도 의미 있지만, 사회적 지지와 연대도 컸다"면서 "'(노동조합이) 지역 사회와 연계해 사회 연대 사업을 했는데, 투쟁할 때 지역 시민과 단체들이 초기부터 발벗고 나서서 (씨앤앰) 본사에 항의 방문도 하고 면담 투쟁도 했다"고 전했다. 

그 때 지역 시민들이 외친 말은 "(해고자들은) 우리 동네 노동자다, 부당해고 철회하라", "지역 주민이고, 당신들의 가입자다, 왜 우리 동네 노동자 해고하나" 등이었다. 노동조합이 지역 사회와 함께 연대하면서 생긴 '정'은 노동조합이 사측에 의해 위기를 겪을 때 또다른 '힘'이 됐다.

사측의 '흩어져라' 울려대는 경적 앞에서 지역 사회가 노조의 든든한 '코끼리'로 역할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노동자들의 긴 투쟁과 여러 힘이 모여 지난해 12월 31일, 씨앤앰 정규직, 비정규직 노조는 회사로부터 해고자 109명 복직을 비롯해 구조 조정 중단 등 굵직굵직한 약속을 받아냈다. 

김진억 국장은 희망연대노조가 지역 사회와 연대하는 노동조합을 실현해 온 날들을 상기하면서 "결코 쉽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비정규직, 간접 고용 등 한국 사회의 여러 노동문제들과 싸우면서 지역 사회와 연대하는 일을 병행하기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함께 손을 잡아 적극적으로 준비하면 충분히 다른 삶이 가능합니다. 힘을 모아야 사회가 변합니다."
"함께 손을 잡아 적극적으로 준비하면 충분히 다른 삶이 가능합니다. 힘을 모아야 사회가 변합니다." ⓒ 이희훈

그럼에도 그는 "노동운동의 문턱을 낮추기 위한 다양한 접촉이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그는 2016년 다가올 박근혜 정부의 노동개혁 정책을 "자본의 위기를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정책"이라고 비판하면서 "(이럴 때일수록) 조직된 노동자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미조직 노동자들에게 '우리가 함께할게'라고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래는 그가 덧붙인 말이다.

"자본의 이념이 판을 치고 있어요. 경쟁의 논리, 순응의 논리를 벗어나서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한 연대를 시작해야 해요. 넓게 보고, 함께 손을 잡아 적극적으로 준비하면 충분히 다른 삶이 가능합니다. 힘을 모아야 사회가 변합니다."


#송곳#김진억#희망연대노조
댓글6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