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법정 최후 진술에는 사람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어떤 사건이 나와는 상관없는 뉴스라거나 케케묵은 역사책 속에나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한 시대를 상징하는 사건들의 최후 진술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위치가 어디쯤인지도 가늠해보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
* '최후의 진술-박흥숙', 1편에서 이어집니다.스물아홉 청년이 이제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초로의 노신사가 됐다. 위인백(68) 5.18 교육관 관장이 말했다.
"좀 볼 수 있겠습니까."A4지로 15매 분량의 박흥숙의 자필 최후 진술서 사본을 건넸다. 그로서는 37년 만에 다시 마주한 문서, 감회가 남다른 듯했다. 잠시 인터뷰를 멈췄다. 위 관장은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그간 안녕하시옵니까. 가내 계절에 균안을(두루 편안하길) 복망하오며 이 글월을 올리나이다. 주제넘게도 제가 저 자신만은 능히 책임 지을 수 있다고 자부해 왔는데, 이렇게 큰 우를 범하고 보니, 동정을 받아야 하는 현실 앞에서, 그리고 동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애매할 정도로 변호사님과 많은 분들에게 폐를 끼치고 있으니 우물 안 개구리였던 저는 그저 송구할 뿐입니다. 박흥숙 올림." "박흥숙 사건 유일한 생존자를 알고 있다"
1977년 4월 20일, 광주 무등산 덕산골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무허가 집들을 철거하던 철거반원 두 명이 쇠망치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숨졌다.
또 다른 두 명 역시 병원으로 옮겼지만 숨을 거뒀고, 단 한 사람만이 겨우 생명을 건졌다.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버지, 또 누군가의 아들이었을 그들은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결코 용서받지 못할 범죄를 저지른 이는 박흥숙. 그때 나이 23세, 세상을 경악하게 만든 사건의 주인공이라고 하기에는 평범한 쪽에 속하는 청년이었다.
전과는 없었으며 그의 체구는 오히려 왜소한 편에 속했다. 165cm가량의 작은 키, 자그마한 체격의 그가 어떻게 건장한 상대들을 제압하고 죽음에까지 이르게 했는지, 세간의 관심이 집중됐다.
쇠파이프로 만든 사제 총으로 위협했다고 했다. 평소 무예를 익히고 칼 던지기 등 십팔기에도 능숙하다고도 했다. 태권도에, 유도, 기합술까지 두루 섭렵한 무예의 고수라고 했다. 사실보다는 거짓, 그리고 허구에 더 훨씬 가까운 이야기들이 연일 신문에 오르내렸다. 그리고 언론은 그에게 '무등산 타잔'이란 별명을 갖다 붙였다.
1977년 9월, 1심에서 박흥숙은 살인 및 살인 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다음 해 2월 광주고법은 항소를 기각했고, 그로부터 3개월이 흐른 5월 9일 대법원 형사부는 원심대로 사형을 확정 짓는다. 그리고 1980년 크리스마스이브, 박흥숙은 사형을 당한다. 위인백 5.18 교육관 관장은 2심 재판 당시 박흥숙의 변호를 맡았던 이기홍 변호사의 사무장으로 일했던 사람이다.
먼저, 그는 의외의 사실을 전했다. 당시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 김아무개씨와 잘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했다.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후, 지금까지 교류하고 있으며 사건 이야기도 나눈 적이 있다고 했다. 위 관장은 "아주 바르고 좋은 사람"이라며 "그때 자기가 안 죽은 것이, 유도를 오래 해서 외부 충격을 더 견딜 수 있었기 때문이었던 같다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37년 만에 다시 읽은 최후 진술서, 그의 반응은...
그렇기에 위 관장이 박흥숙 사건을 지금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더 궁금해졌다. 한때 사형만은 면하게 하려고 사방팔방 뛰어다녔던 사람, 그리고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바로 그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와 보낸 사람. 하지만 일단은 참아야 했다. 그가 최후 진술서를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나는 무등산 덕산골에 살며 77년 4월 28일 철거반 공무원 피습 사건의 주인공으로 '한국판 이소룡', '무등산 독수리', '무등산 타잔' 등등 수많은 악의 대명사를 걸머진 그야말로 끔찍하고 흉악무도한 살인마로 알려진 박흥숙이다.신성한 이 자리를 빌어 저의 지난날을 뼈저리게 뉘우치고 저의 울분 때문에 아깝게 희생돼버린 그분들의 영령을 위로하며 삼가 명복을 빈다. 또 많은 물의를 일으켜 국민 여러분에게 죄송하고, 유가족 여러분에게 너무나도 큰 죄를 지었다.사랑하는 부모, 사랑하는 자식, 사랑하는 형제를 잃고 애통해 하는 유가족들의 모습이 자나 깨나 눈앞에 어른거려 날이 갈수록 괴롭고 괴롭다. 나의 죄는 죽어 마땅하리다. 그 애통해 할 유가족들을 생각한다면, 그 어디에 댈 수 없는 커다란 슬픔을 안긴 유가족들을 생각한다면, 어찌 백번 죽는다 한들 죄 닦음이 다 될 수 있겠으며 무슨 말로 위로의 말씀을 드릴 수 있겠는가. 그저 죄송하고 죄송하다.그러기에 이렇게 신성한 자리에서 재판장님께 나의 고충 일부나마 말씀드릴 수 있게 해준 데 대해 나라와 국민 앞에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박흥숙의 자필 최후 진술서)이제부터 위 관장과 함께 박흥숙의 최후 진술서를 읽어 내려가려 한다. 되도록 원문 그대로 소개할 것이며, 이해가 다소 어려운 문장에 한해 일부 수정했다. 그리고 사건의 배경, 진술서에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 행간에 나타나지 않는 의미 등을 그때그때 덧붙이는 방식을 선택해 봤다.
이를 위해 1977년 월간 <대화>에 실렸던 '무등산 타잔의 진상' 르포, 르포에 실렸던 박흥숙의 일기, 2005년 방영됐던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무등산 타잔 박흥숙 편', 유경남(전남대 사학과 박사 과정 수료)씨가 쓴 논문 '1970∼80년대 무등산 개발 사업과 그 내파' 등을 참조했다.
또한 박흥숙의 동생 박정자씨, 박흥숙 구명운동에 나섰던 노영숙 오월 어머니집 사무총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유일한 생존자 김아무개씨는 인터뷰 요청을 정중하게 거절했음도 밝힌다.
그리고 '지금' 위인백 관장은 박흥숙의 최후 진술서를 읽고 있다. 잠시 진술서에서 눈을 뗀 위 관장은 이렇게 말했다.
"포승줄에 묶여 재판정에 나오던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네요."다시 이어지는 침묵,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미친 정신병자의 개소리라 해도 좋다"
"원인이야 어떻게 됐든 죄의 대가를 달게 받아야 하는 중죄한 몸으로써 무슨 말이 필요하겠으며 무슨 말을 더할 수 있겠는가. 구구한 변명이 앞선다는 것은 X달린 사내자식으로 도저히 취할 바 아니라는 것을 나 자신도 잘 알고 있으며, 이 말씀을 드리는 나 자신이 온전한 정신인지, 미친 것인지, 극과 극의 현존하는 현실에서 오락가락하는 '내 정신을 나도 모르겠다(원문 : 내가 알 바 아니다)'. 미친 정신병자의 개소리라 해도 좋고, 빗나간 영웅심의 궤변이라 해도 좋다. 또한 나 자신이 바라는 바이다. 하오나 다음에는 이 같은 불상사가 되풀이되지 않는다면 죽어 가는 몸으로써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박흥숙의 자필 최후 진술서)박흥숙의 자필 최후 진술서를 접하고 먼저 놀랐던 건 그의 글씨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사람의 그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논리의 정연함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소개하는지에 대해서는 인색했다. 단지, 자신이 지금, 왜,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집중하고 있었다.
박흥숙의 2심 재판 당시 변호를 맡았던 이기홍 변호사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통해 "여러 사람을 희생시켰으니 마땅히 나는 죽어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 사형을 선고해달라는 식으로 그렇게 진술했었다"고 말했다.
위 관장도 역시 "법정에서 이야기하는 걸 보면, 주눅이 들거나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재판 결과에 대해서는 초연한 모습을 보였다"며 "자기 논리가 딱 정리가 됐던 사람"으로 박흥숙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박흥숙이 최후 진술서에 "이 같은 불상사가 되풀이되지 않길 바란다"고 쓴 대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려 네 사람을 죽인 살인자가 자신의 사건을 '불상사'로 표현했다. 그는 왜 이렇게 적었을까. 최후의 진술, 그다음 페이지에 실마리가 나와 있다.
"어머니, 이 집을 바칩니다"
"잘 사는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그날그날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그야말로 영세민들에게는 안식처가 될 보금자리가 사활에 관계된다 해도 절대로 과언은 아닐 것이다.우리가 처음 영광에서 그곳 덕산골로 이사를 했을 때는 그 마을 산지기로 있는 이모네를 연줄로 하여 남의 집 셋방살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그도 말 못할 불행이 생겨서 어머니와 나와 동생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야 했고 나는 돼지 움막보다도 못한 보잘 것 없는 집이지만 짓지 않으면 안 되었다.방 한 칸 의지할 데가 없어서 남의 집 변소를 들여다보지 않고, 남의 집 처마 밑을 들여다보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지금 말씀드리는 나의 고충, 조금이라도 이해하시기 어려우시리라. 내가 처음 집을 지을 당시 허가 없이 지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곳이 개발 제한 구역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며, 또 그 당시 어린 시절은 그런 것에 무관심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박흥숙의 자필 최후 진술서)박흥숙은 전남 영광군 노은 부락에서 1954년(주민등록상으로는 1957년)에 태어났다. 4남 1녀 중 둘째, 가난한 집안의 아들이었다. 가난의 '뿌리'는 그로부터 6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찾을 수 있다.
박흥숙의 동생 박정자(60·여)씨는 "증조할아버지가 동학난 때 영광군 동학군 대장을 하셨고, 관군에게 총을 맞고 돌아가셨다"며 "그때 집안이 완전히 풍비박산됐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가난에 가난이 더해진 것은 박흥숙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바로 다음 해에는 다섯 살 터울의 형마저 일찍 세상을 등졌다. 박흥숙은 어머니를 지키고, 남동생 둘과 여동생을 보살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의 어머니는 식모 생활을 하기 위해 전북 내장사로 떠났고, 여동생 역시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시작했다. 박흥숙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상점 점원으로, 열쇠 수리공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단지, 먹고살기 위해,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박흥숙이 스무 살이 되던 해, 그는 한 가지 결심을 한다. 가족들이 함께 모여 살 수 있는 집을 짓기로 한 것이다. 광주 천변에 판자촌도 구할 수 없는 상황, 박흥숙의 눈길이 간 곳은 무등산. 계곡 입구에서도 30여 분을 더 걸어 올라가야 하는 덕산골 산등성이었다.
그곳에 박흥숙은 집을 짓기 시작했다. 박흥숙 이웃 주민 박승운씨에 따르면 "흙과 돌로 벽을 세우고, 지붕은 고물상에서 양철을 사다 만들고, 벽지는 밀가루 부대나 신문 같은 걸 주워다 바른", 말이 집이지 움막 수준의 거처였다.
하지만 일을 해 가면서 집을 짓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박흥숙은 60여 일 동안 굶주려 가며 그 집을 지었다고 한다. 집을 짓다 쓰러진 그를 이웃 주민이 발견한 적도 있다고 했다. 1974년, 한 해를 보내면서 쓴 그의 일기에는 집을 짓는 과정에서 느꼈던 고통과 환희가 그대로 나타나 있다.
"고요한 적막 속에 새로운 생명 하나가 꿈틀거린다. 이제 괴롭고 어둡던 갑인년(1974년)은 나에게 많은 시련을 안겨주며 영원히 사라져 갔다. 만물은 조용히 우주 철칙에 따르고 유수는 주야로 쉬지 않고 흐른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어둡고 쓸쓸했고 고독했던 지난 12개월, 모두가 무정했고 한편 보람있는 시간들이었다. 나에게는 둘도 없는 인생의 클라이막스였다. 나는 울었고 쓰러져서 울었고,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조그마한 과실을 얻었다...(중략)...내 집을 짓기 시작했다. 먹고 싶은 것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손이 부르터 피가 흘렀으나 약이 없어 바르질 못했다. 이숙네 후원으로 어느 정도 일을 끝냈다. 조그맣고 보잘것없는 집이었으나 어머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나는 집 일을 끝낼 때까지 도와준 순석이, 이숙, 이모에게 감사를 드리며 이 집을 어머님에게 바쳤다." 박흥숙이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들
가족들을 함께 모여 살게 해 주는 공간, 집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비록 보잘것없는 형색이었지만 그래도 박흥숙 가족에게는 소중한 공간이었다. 동생 박정자씨는 인터뷰에서 "나와는 세 살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도 오빠는 어른 같고 난 아기 같았다"며 "가난했어도 가족들이 함께 모여 살 수 있었던 그때가 그래도 참 행복하고, 제일로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했다. 박흥숙은 그 집에 대해 최후 진술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나중에사 모든 사실을 알았지만 당장 이사갈 여유도 없었고, 참, 피와 땀의 결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고생 고생 그 고생을 해서 지은 집을 차마 내 손으로 부술 수는 도저히 없었다. 당국에서도 지난겨울 1차 계고 당시까지는 집을 지은 지 5∼6년이 지나도록까지 말 한마디 없었으며 우리들도 그처럼 그런 산골에까지 계고장이 나오리라고는 신이 아닌 다음에야 어찌 예전에 미처 상상이나 했겠는가.그렇다고 자진 철거하라는 당국 명령을 받고 이를 묵인하여 그냥 주저앉아 있지만은 않았었으며 그 마을 모두가 그렇듯이 시내로 나가 방을 알아도 보았고, 또 어디 적당한 곳에 (천)막 칠 자리라도 없나 하고 몇 날을 두고 찾아 돌아다녀 보기도 하였다. 또 그 옆 마을 신림 부락 그런 종이쪽지가 7회나 나왔어도 아직껏 무사하다고 하기에 조금은 마음이 놓였고 설마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새삼 말하지 않아도 잘 아시겠지만 지지난 겨울의 추위는 50년 만에 처음 있는 추위로 보리가 다 얼어 죽었을 정도며 4월 초까지 눈이 왔고 눈이 쌓여 있었지 않았는가. 추위에 떨고 가난에 떨어야 했던 그 산골에서는 이 혹독한 추위 때문에 '날씨가 풀릴 때까지(의역, 원문은 해풍해지도록까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것이다." (박흥숙의 자필 최후 진술서)박흥숙이 "나중에야 알게 된 모든 사실", 그중 하나는 1972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무등산에 대한 본격적인 개발이 이뤄지는 시점에 가족들의 보금자리를 그곳에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케이블카 설치 계획까지 세워지면서 관광객들의 눈에 보이는 무허가 움막들은 당연히 철거돼야 하는 장애물들이었다는 점도 미처 짐작하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이와 관련한 분위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광주 무등산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고 있다. 지난 72년 5월 전남 공고 제85호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무등산은 도립공원으로 지정만 됐을 뿐 그동안 방치됐었는데 작년 봄부터 광주 지구 5개년 개발 사업의 첫 단계 사업으로 착공, 관광 포장도로가 개설됐고 김덕령 장군의 묘역 성역화가 이뤄져 훌륭한 관광지가 되고 있다. 지금까지 호남 지방에서는 볼 수 없었던 무등산 관광 케이블카가 내년 말까지 설치돼 호남의 명산 무등산은 이제 새로 각광을 받게 됐다." (1975년 5월 21일자 동아일보)가난에 떨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이 나라는...그리고 박흥숙이 나중에야 알게 된 또 하나의 사실이 있었다. 그것은, 이 나라가 가난에 떨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냉혹하다는 것이었다. 위 관장이 다시 침묵을 깼다.
"시간, 되시나요?"37년 만에 마주한 박흥숙의 최후 진술, 다 읽어보고 싶다는 뜻이었다. 다시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 '최후의 진술-박흥숙', 3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