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법정 최후 진술에는 사람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어떤 사건이 나와는 상관없는 뉴스라거나 케케묵은 역사책 속에나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한 시대를 상징하는 사건들의 최후 진술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위치가 어디쯤인지도 가늠해보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
* '최후의 진술 - 박흥숙', 2편에서 이어집니다."헌데 당국에서는 아무런 대책도 없었으면서도 그 추운 겨울에도 꼬박꼬박 계고장을 내, 추위가 채 풀리기도 전인 4월 6일 마지막 계고에 응하지 않았다고 그 마을 사람들을 개 취급했고 집을 부숴 버리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당장 올 데 갈 데 없는 우리들에게 불까지 질러 돈이며 천장에 꽂아두었던 봄에 뿌릴 씨앗 등 정신이 헝클어져 미처 생각 못한 것들은 깡그리 타 버리고 말았다.요즘 세상은 형제간에도 일가족을 데리고 가서 방 한 칸 빌려 달라면은 눈살을 찌푸리는 세상이다. 하물며 당국에서까지 이처럼 천대와 멸시를 받아야 하는 우리들에게 누가 달갑게 방 한 칸 내 줄 수 있겠는가. '이런 사정을 당국이라고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원문은 '이런 사정을 모르고 당국이라고 자처하지는 못할 것이다')." (박흥숙의 자필 최후 진술)냉혹한 국가라고 해도 알았을 것이다. 그들이 쫓겨나면 당장 갈 곳이 없다는 것을, 또한 그들도 '국민'이란 것을. 하지만 공무원들도 시간에 쫓기는 '존재'였다. 당시 박흥숙에게 살해당한 피해자 부인 김아무개씨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무등산이 국립공원이 되면서 대통령이 시찰 온다는 것 같았다"며 "그래서 철거 오더가 떨어진 것 같았다"고 말했다.
실제 대통령이 박흥숙 사건을 전후해 광주에 시찰을 갔는지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독재자가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 중 애용하는 것이 '뒷짐 순시'란 점을 감안하면, 이런 분위기가 시 공무원들에게 어떻게 작용했을지 가늠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범죄의 재구성 : 1977년 무등산 철거반원 살해 사건을 둘러싼 물음들'이란 제목의 논문을 보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 여기저기 '시찰'을 다니면서 광주 지역 일 처리가 늦어지는데 역정을 냈고, 그래서 행정 하부에서는 불을 질러서라도 판잣집을 없애 버리라는 말이 돌기도 했다"고 적혀 있다. 이어지는 최후 진술에서 박흥숙이 '태산'이란 표현을 쓰는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돈 많고 부유한 사람만이 이 나라 국민인가"
"옛말에도 있듯 태산은 한 줌의 흙도 거부하지 않았으며 대하 또한 한 방울의 물도 거부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나. 세상에 돈 많고 부유한 사람만이 이 나라의 국민이고, 죄 없이 가난에 떨어야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이 나라의 국민이 아니란 말인가. 나는, 내 선조가 무식했기에, 가난했기에, 그런 전철을 되밟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박흥숙의 자필 최후 진술)최후 진술서에서 박흥숙이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언급한 유일한 대목이다.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이 아홉 글자가 그저 입에 발린 소리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우선 박흥숙의 초등학교 생활기록부를 보면 "머리가 비상하게 좋고, 가정 형편으로 고민하나 자립하려고 노력한다"거나 "마음이 착하고 남에게 동정 받지 않으려 하고 혼자 자립하려 든다" 등의 평가가 눈에 띈다.
자립, 박흥숙도 공부로 자립하고자 했다. 그 시대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가난하지만 똑똑하고 자존심 강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탈출구로 박흥숙 역시 공부를 택했다. 그 결과는 영광 중학교 수석 합격. 하지만 그에게는 최소한의 비빌 '언덕'이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는 자신의 심정을 박흥숙은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합격자 발표 날 가 보았더니 정말로 꿈에도 그리던 1등 합격이 사실이었다. 정말 눈물이 나왔다. 학교 실력이 나만 못한 애도 학교를 다니고자 교복을 맞추고 야단인데 나는 아버지가 안 계시니 학교는 다닐 수 없고 집안은 가난하여 그야말로 풍전등화다. 진학은 포기하였고 중학교에서 주는 교과서를 팔아 차비하여 광주 가족에게로 떠나왔다." (박흥숙의 일기장 중에)그래도 박흥숙은 자립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일찌감치 생활 전선에서 점원으로, 열쇠 수리공으로 일하면서, 또 덕산골 산등성이에 가족들이 함께 살 수 있는 움막집을 지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박흥숙의 일기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낮에는 일을 했으며 밤에는 책을 보았다. 영어 기초나 수학 기초는 완전히 닦은 셈이다. 조금이라도 돈이 생기면, 어머님을 드려 저금을 하여,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집에 가서 독학이라도 해 볼 셈이다...(중략)...약 3개월 공부를 하니까, 코에서는 코피가 터졌고 눈에서는 눈알이 빠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5개월쯤 되자 검정고시에 응시해서 뜻밖에 합격이 되었다. 4천7백73명 중 4백명이 합격했다. 그 중의 하나인 나다. 희망과 용기를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박흥숙의 일기장 중에)그렇게 독학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통과한 박흥숙은 사법고시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사건이 일어나기 1년 전, 광주 동신 중학교. 사법고시 1차 시험에 도전한다. 결과는 낙방, 하지만 낙담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박정자씨는 "다 좋았는데 영어가 조금 힘들었었다"며 "1, 2년 만 더 공부하면 되겠다"고 자신감을 표시했다고 전했다.
박정자씨는 "오빠가 잠을 하루에 4시간 정도만 자면서 공부를 하고 운동도 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지친 몸으로 누워 박흥숙은 천장을 바라봤을 것이다. 사건 당시 <전남매일신문>은 박흥숙이 살던 집 천장에 그의 글씨로 "노력 없이는 무엇도 이루어질 수 없다. 피눈물나는 고생을 두려워 말라!"는 좌우명이 써있었다고 전했다. 그리고... 아침이 밝았다. 그 날은 1977년 4월 20일이었다.
"그렇게는 못하리라, 그렇게는 명령 못하리라"
"그 사람들이 약속을 어기고 불을 지를 때 우리와 불쌍한 그 마을 사람들은 우선 막칠 비닐 조각 하나라도 건져보기 위해서 그렇게까지 애걸복걸했어도, '상부의 명령이다', '이런 것들을 놔두면 또 집을 짓는다', '강제 철거가 무엇인줄 아느냐' 하면서 끝내 외면하고 모조리 태워 버렸던 것이다.자기네들이 계고장을 돌렸으니까 한 푼 대책 없고, 올 데 갈 데 없는 줄 번연히 알면서 세상에 그럴 수 있겠는가. 아무리 돈에 환장병이 걸렸다 해도 친부모 형제가 사는 집이라면, 사랑하는 처자가 사는 집이라면, 그렇게까지는 못하리라.세상에 올바른 두뇌를 갖고, 올바른 양심을 가진 자들이라면은 그런 비인간적인 행위를 명령하지는 못하리라. 그 마을 사람들이 모두가 무식하고 등신 같이 생겨서 인간 대우를 받을 수는 없다고 할 지라도 자기 것을 갖고 그렇게까지 사정을 하고도 끝내 외면을 당해야 옳단 말인가. 허물어진 담장을 부여잡고 울부짖는 그들을, 타오르는 불길 속에 발을 동동 구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타까이 허둥대는 그들을 보라. 불쌍하지도 가엾지도 않단 말인가. 반 넋이 나가버려 초점 잃는 눈으로 멍청히 바라보시던 어머니를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박흥숙의 자필 최후 진술서)판잣집 방 한 칸이라도 구하려고 한 푼 두 푼 모은 돈이었다고 했다. 30만원, 박흥숙 가족 입장에서는 분명 큰돈이었다. 하지만 지붕이 뜯기고 벽이 허물어지는 그 상황에서 몸만 빠져 나왔던 어머니는 철거반원들이 불을 지를 때야 비로소 목숨 같은 그 돈이 생각났다고 했다. 그 당시를 목격한 이웃 오아무개씨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박흥숙) 어매가, 탁 이렇게 떨어져 버리더만. '내 돈' 그런 것 같아. '아이고 천장에 내 돈... 이사할 돈인데' 그랬다요. 그러니 그 놈이 타져 버리니까. 아들이 그 말을 듣고 기가 막히죠. 돈이 타 버렸으니 엄마가 고생한 게... 아주 뼈저렸는데... (중략)... 철거를 하면 다른 데는 때려 부숴서 하드만 왜 불을 지르냐고요. 불만 안 질렀으면 돈이 있을 것 아닌가요. 돈이 없으니까, 내 돈 하다가... 자식이 그 말 듣고 미치지 안 하겠어요?"동생 박정자씨는 "그때까지만 해도 오빠가 참았다. 철거반원들에게 달려드는 엄마를 말리면서 참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박흥숙은 철거반원들에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당뇨와 폐병을 앓고 있는 노부부가 사는 집, 그 분들은 진짜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니까, 거기 불만 지르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허나 약자이기는 박봉의 일용직 철거반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상부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는 그들로서는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다. 당시 광주시 동구청 건축지도계에서 일했던 김대옥씨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철거를 하고 소각하라는 것까지 다 상부 지시가 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왜 좀 더 참지 그랬느냐"는 동생에게 박흥숙은
잠시 후, 박흥숙이 평소 "먹을 것 남으면 갖다 주고, 사다 줄 것 있으면 심부름해주고, 필요한 것 있으면 갖다 주고 했던" 계곡 위 노부부가 살던 집에서도 연기가 피어올랐다고 한다. 박흥숙은 이성을 놓고 만다.
"말인즉 그렇지, 정말로 아비규환을 이루는 그 당시를 생각만 해도 눈물이 앞서고, 이가 갈리는 그 당시를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박흥숙의 자필 최후 진술서)그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총성'이 울렸다. 평소 산짐승들 접근을 막으려고 박흥숙이 쇠파이프로 만든 딱총을 쏜 것이다. 철거반원들은 순간 놀랐고 박흥숙은 서로 묶도록 했다. 그들을 데리고 광주시장에게 가서 따지려고 했다고 한다.
동생 박정자씨는 박흥숙을 "평소 흐트러짐이 없었던 오빠"로 기억하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 방문 앞에서 오빠하고 부르면 "벗었던 상의를 다시 입고 마지막 단추를 잠그면서 문을 열었다"고 했다. 그랬던 오빠가 "이렇게 개·돼지만도 못하게 할 수 있느냐, 우리는 이 나라 국민이 아니냐"며 흥분하는 모습을 보고 동생은 그저 겁이 났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 동생 박정자씨는 먼저 광주시청으로 내달린다. 그리고 잠시 후 동생이 없는 사이 그 곳에서는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박흥숙이 휘두른 쇠망치에 네 사람이 숨지고 한 사람은 중태에 빠진다. 그 후 처음 면회를 가서 동생은 오빠에게 "왜 좀 더 참지, 좀 더 참지 왜 그랬냐"는 공허한 말만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런 동생에게 해줄 수 있는 오빠의 답 또한 공허한 것이었다.
"나도 모르는 순간에 싸우다 그렇게 됐다".가난한 국민에 냉혹한 나라임을 감추기 위해...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박흥숙의 최후 진술서를 읽던 위인백 5.18 교육관 관장(68, 당시 박흥숙 2심 변호사 사무장)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그는 "쉬운 말로 눈이 뒤집혀 버린 것"이라며 "젊은 청년이 가난에서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자립하려고 그렇게 몸부림치고 살았는데, 그런 입장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나는 이성을 잃지 않을 수 있었을까 생각해봤다"고 했다.
"일기장이 한 네 권 정도 되는데, 거기에 집에 대해서 어머님께 지어준 것이 효도고,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했던 걸 볼 때, 조그만 집이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그들에게는 가정의 보금자리였고, 행복의 장소였습니다. 안식처였습니다. 그것이, 순간, 허물어져버리고 그랬을 때, 느끼는 감정은 우리가 상상해 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박흥숙 사건 1심 변호사였던 권진욱 변호사,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하지만 세상은, 언론은, 어찌 보면 이렇게 뻔한 상상을 외면했다. 박흥숙은 무등산 '괴물'이 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박흥숙의 최후 진술서에 흐르는 분노는 이중적이다. 그는 가난한 국민에게 냉혹하기 그지없는 국가에 분노했으며, 동시에 그런 국가임을 감추기 위해 거짓을 들이대는 국가에 또한 분노했다.
"사고가 나자 당국에서는 그 마을을 무당골이라 했고, 그 마을 사람들을 모조리 무당이라고까지 했다. 생게망게한 온갖 추악하기 짝이 없는 것들을 나에게 뒤집어씌우는 것만도 부족해 말못하고 쫓기는 짐승처럼 선량하고 불쌍한 그 마을 사람들을 모조리 무당이라고까지 하다니, 이 무슨 비열한 짓인가. 이 더럽고 비열하기 짝이 없는 덜 된 수작은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박흥숙의 자필 최후 진술서)* '최후의 진술 - 박흥숙', 4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