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에 담긴 조선의 정치철학
지금 내가 서 있는 종교교회 앞 네거리는 모두가 작은 길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광화문네거리'처럼 특별한 자기 이름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곳은 백운동천과 사직동천이 만나고, 광화문 앞 옛 육조거리(현 광화문광장)로 이어지는 길이 있어 이 네 거리에 접해 있는 땅은 각각 서로 다른 지명을 갖고 있다. 아래 사진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이곳은 종교교회가 위치한 도렴동을 비롯하여 내자동, 내수동, 적선동이라는 각각 자기 지명을 갖고 있다. 모두가 조선의 역사와 철학을 품고 있는 이름이다.
먼저 서울지방경찰청이 위치한 내자동(內資洞)은 조선시대 이곳에 궐내의 쌀과 술, 면 등을 공급하던 관아인 내자시(內資寺)가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동명이다. 그리고그 아래의 용비어천가 빌딩이 있는 내수동(內需洞) 역시 궐내에 잡물과 노비 등을 공급하는 내수사(內需司)라는 관아가 있어 지어진 이름이다.
뿐만아니라 종교교회가 위치한 도렴동 역시 궁중 직조물의 염색을 맡았던 관청 도렴서(都染署)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이처럼 이 세 곳은 모두가 조선시대 관청의 이름에서 현재의 동명이 유래하고 있다.
그런데 마지막 하나의 적선동(積善洞)은 전혀 다른 유래와 뜻을 품고 있다. 이를 설명하기 앞서 먼저 조선시대는 한성부의 세부 행정구역을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 등 5부로나누어 그 아래 52개의 방을 두었다. 그런데 이곳 종교교회 건너편은 당시 서부 적선방(積善坊)이라 하였고, 그 이름을 그대로 현재의 동명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명칭은 조선왕조의 정치철학을 담겨 있는 참으로 멋진 지명이다. 적선(積善)이란 말은 우리가 흔히 어떤 사람에게 '적선하다'는 말로 자주 쓰는 표현이다. 이때 적선이란 말은 본래 <주역>에나오는 말로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에서 따온 말이다. 즉 '착한 일을 많이 하는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따른다'는 의미로 주변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며 살아가는 것이 결국 자신에게도 좋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이곳의 지명을 <적선방(積善坊)>으로 한 것은 바로 이곳에 조선왕조의 궐외각사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즉 조선의 행정관청들은 백성을 위해 선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멋진 조선의 정치철학이 담긴 지명이다. 현재의 대한민국 정부는 이런 우리 선조들의 멋진 세계관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당시 조선시대 이곳 <적선방(積善坊)>에 대응하는 <여경방(餘慶坊)>은 현재의 신문로 일대에 붙여진 지명이다.
이처럼 경복궁 앞 관청이 많은 곳에는 '선을 베풀라' 명하고, 그렇게 되면 그 아래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 경사가 있게 된다는 의미로 지었을 것이라 추측해보니, 왠지 조선시대를 살았던 백성의 삶이 서로를 위하고 배려하는 마음 속에 살아갔을 것이라 상상해본다. 그러는 내 마음 역시 즐겁다.
덧붙여 앞서 지나 온 세종문화회관 뒤편의 지명은 당주동(唐珠洞)인데 이는 1914년 행정구역을 재편하면서 그 곳에 포함된 당피동(唐皮洞)과 야주현(夜珠峴)을 합친 명칭이다(위 지도참조).
그런대 본래 당피동은 중국 의원 피씨가 살아서 지어진 이름이며, 야주현은 경희궁으로 넘어가는 낮은 고개가 있는 곳이다. 이 고개에 서면 경희궁 정문인 홍화문의 현판이 워낙 명필의 글이라 밤에도 밝게 비추기 때문에 이곳을 '밤에도 낮같이 훤한 고개'라 하여 야주현(夜晝峴) 또는 야조현(夜照峴)이라 불렀다.
그런대 세월이 흐르며 '낮 주(晝)'자가 같은 음의 '구슬 주(珠)'자로 바뀐 것이다. 조금 복잡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지명이지만 그 속에는 해당 지역의 역사가 숨쉬고 있다고 생각하니 하나의 지명도 그냥 쉽게 지나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조선의 교육철학이 담겨있는 지명
적선방과 여경방이 조선의 정치철학을 담은 지명이라면, 한양도성 내에 교육과 관련된 지명을 가지고 있는 곳도 있다.
우리는 사극에서 다음 왕위를 이을 세자(世子)를 부를 때 '세자마마'라고도부르지만 그보다 흔히 '동궁마마'라고 부른다. 세자궁은 항상 왕과 왕비가 머무는 내전(內殿)의 동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붙여진 별칭이다. 이는 세자와 세자빈이 머무는 세자궁(世子宮)을 동궁(東宮)이라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즉 세자는 향후 왕위를 잇게 될 떠오르는 태양이기 때문에 그의 거처는 항상 궁궐 내에서 동쪽에 배치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별칭이다.
이렇듯 세자궁을 동쪽에 배치하는 것처럼 조선은 이후 조선을 이끌어갈 젊은 세대들이 학습을 하는 곳 즉 <성균관>도 임금이 머무는 법궁을 기준으로 동쪽에 배치했다. 경복궁의 동쪽인 종로구 명륜동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균관을 동쪽에 배치하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이 일대의 지명도 이들 유생들의 학습과 관련된 것들로 정하였다. 당장 성균관이 위치한 이 곳의 지명인 명륜동은 성균관 유생들의 강학 건물인 <명륜당(明倫堂)>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또 성균관의 남쪽인 종로 4가와 5가 일대의 지명은 사진 속에 있는 것처럼 유학의 대강인 인의(仁義), 예지(禮智), 효제(孝悌), 충신(忠信)을 따서 인의동, 예지동, 효제동, 충신동이라 지었다. 이는 우리 조선이 후대의 교육과 인재양성에 얼마나 역점을 두었는지 추측 가능케 해주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