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서른넷 어느덧 벌써 30대 중반 나에겐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았던 30대 중반 미친 듯이 일만 하며 살아온 10년이 넘는 시간 남은 것 고작 500만 원 가치의 중고차 한 대, 사자마자 폭락 중인 주식계좌에 500 아니 휴짓조각 될지도 모르지 대박 or 쪽박 2년 전 남들따라 가입한 비과세 통장 하나 넘쳐나서 별 의미도 없다는 1순위 청약통장 복리 좋대서 주워듣고 복리적금통장 몇% 더 벌려고 다 넣어둬 CMA통장 손가락 빨고 한 달 냅둬도 고작 담배 한 갑 살까 말까 한 CMA통장 이자 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놈 가끔 연락이 와 자기는 노가다 한대 노가다해도 한국 대기업 댕기는 나보다 낫대 이런 우라질레이션 평생 일해도 못 사 내 집 한 채"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노랫말 중에서
대기업 연구소로 매일 출퇴근을 하면서 학벌 좋은 연구원들과 함께 일하다보니 조금씩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져 갔다. 연구소에 근무하던 400명 가량의 연구원들 중에서도 학벌에 따라 회사에서 받는 처우가 달랐다. 같은 직급이라 할지라도 입사 학력에 따라 연봉 차이가 났다.
우리 회사를 관리하던 기획부서에는 과장급 선임 연구원이 있었다. 그 연구원은 '전문대' 학력을 가지고 있었다. 전문대에서는 꽤나 똑똑한 인재였고 교수님 추천으로 이 대기업에 입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회는 그리 녹록치 않았다. 수십년간 이 회사에 충성을 다하며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그 선임 연구원보다 높은 학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훨씬 더 경력이 짧은 후배 사원들이 금세 선임 연구원이 되는 걸 지켜봐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학력이 높은 후배들이 자신과 같은 직급의 선임 연구원이 되는 것을 보는 것도 모자라 그들보다 더 오랜 경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더 낮은 연봉을 받아야 했다. 학력에 따른 초봉의 차이가 시간이 갈수록 연봉 인상률에 더해져 그 차이가 좁혀지지 않고 오히려 더 커지는 것이었다.
전문대졸이든 대졸이든 석사든 박사든 우리의 눈에는 모두가 다 같은 대기업 연구원들이었지만 그 조직 안에서는 그렇게 잔인한 경쟁이 늘상 있는 일이었다. 그런 현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우리 사장님은 그런 대기업의 시스템과 현실에 대해 잘 알려주셨다. 그리고 그런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실력을 키워야 한다며 '공부'를 강조하셨다.
우리 사장님은 이 대기업의 '개발 실장' 출신이다. 현역시절 연구소의 한 부서를 책임지고 있는 '그룹장' 시절에 새로 입사하던 신입 연구원들이 지금은 이 연구소 핵심 부서를 책임지는 그룹장이 되었다. 그래서였는지 우리는 '을'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사장님의 그늘 밑에서 그리 어렵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학력 차별 이외에도 연구소 조직에는 아주 살벌한 '정치'가 많이 이루어졌다. 그 정치는 여러 부류의 '줄타기'를 통해 진행됐는데 특히 전자공학을 전공한 사람들과 물리를 전공한 사람들의 신경전이 살벌했다. 그룹장의 전공에 따라 그 부서 연구원들은 기를 펴고 지내기도 했고 주눅이 들어 지내기도 했다.
제품 개발 단계에서 제품에 어떤 문제가 발생되었을 때 담당자들은 위에서 욕을 덜 먹기 위해 자신이 담당하는 분야에서 발생된 문제가 아닐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여기서 의사결정권을 쥐고 있는 건 그룹장인데 그룹장의 전공에 따라 패널 담당의 말이 잘 먹힐 수도 있고 회로 담당의 말이 잘 먹힐 수도 있다.
그룹장도 사람인지라 자신이 전공한 분야를 설명할 때 알아듣기가 쉽고 잘 통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전공이 다른 그룹장을 모시는 연구원들은 그 '보이지 않는 벽'을 넘지 못하고 아주 힘들게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공도 전공이지만 가장 큰 '라인'은 바로 '출신 학교'다. 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는 많은 연구원들 중에 같은 학교 출신들끼리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진다. 회사에서 연구원을 채용할 때에도 해당 학교 출신들을 많이 뽑기 때문에 그 줄은 끊어질 줄 모르고 계속 이어졌다.
내가 그 연구소에서 근무할 때 사람 채용하는 걸 옆에서 보게 된 적이 있었다. 워낙 유명한 대기업이다 보니 수천 장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들이 도착했다. 구직을 하는 사람들은 그 한 장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작성하기 위해서 밤을 지새워가며 고민했을 테지만 막상 기업에서는 그 많은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제대로 읽어보는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추려진 서류들을 가지고 원하는 스펙을 가진 재원을 찾기 시작한다. 거기서 최종으로 합격한 사람들에게 서류전형 합격 통보를 하고 그룹장들이 면접을 진행했다. 채용 전형이 그런 식으로 진행되다보니 그 연구소 안에는 같은 학교 출신들이 계속해서 들어왔고 이른바 '라인'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우리는 그런 치열한 경쟁과는 조금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었지만 사장님은 계속해서 우리들에게 그런 현실에 대해서 알려 주셨다. 우리가 여기를 떠나 다른 곳에 갔을 때까지도 사장님이 데리고 있던 직원이라면 그 '출신'답게 똑똑한 재원이 되길 바라시는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그 회사를 다닌 시간은 '직장'이 아닌 '학교'를 다녔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스물넷 가을, 대학 합격과 동시에 승진까지
회사에 입사한 지 3개월 가량이 지났다. 처음엔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들이 근무를 하는 대기업 연구소, '여기에 입사한 사람들이 무슨 걱정이 있을까?'라고 생각했지만 치열하게 경쟁하고 도태되어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사회가 그리 만만치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더 나은 삶을 위해 나도 대학에 가야겠다는 마음이 굳어졌다.
하지만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에 진학할 수는 없었다. 모아 놓은 돈 한 푼 없이 비싼 학비를 감당할 수도 없었고 먹고 살 걱정도 해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간 대학'으로 진학을 하는 것과 당시 처음 도입된 '사이버 대학'에 진학하는 것 중에 고민을 했다. 그리고 나의 이런 생각을 사장님께 말씀 드렸다. 내가 대학에 진학을 하면 아무래도 회사 업무에 오롯이 집중할 수가 없다.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아셨을 사장님은 오히려 내 진학 소식을 아주 반기셨다.
지난 3개월간 사장님은 나에게 항상 '똑똑한 녀석'이라는 말을 아끼지 않으셨다. 처음 입사해서 창립 멤버들에게 내가 아는 지식을 전파할 때부터도 그랬고 연구소에서 '납땜의 신'이 되어 연구원들이 내 앞에 줄을 설 때도 그랬다. 나는 단지 내가 앞서 배운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나누었을 뿐인데 아들 같은 직원들이 조금씩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보는 사장님의 사업 철학에 내가 잘 맞았던 모양이다.
그런 사장님의 배려에 힙입어 나는 2005년 9월, 사이버대학교에 직장인 특별전형으로 합격했다. 나는 또 하나의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됐다. 그리고 또 하나의 경사가 찾아왔다. 그건 바로 내 인생 첫 번째 '승진'이었다.
우리와 함께 창립 멤버로 입사한 과장님이 얼마 되지 않아 사표를 내고 그만두었다. 사장님을 제외하고 딱 1명 뿐이던 관리자가 나가 버렸기 때문에 사장님도, 우리 회사를 관리하던 그 연구소 기획부서도 걱정이 이만 저만 아니었다.
마땅한 재원이 없어 사장님은 우리들에게도 주변에 관리자로 앉힐 만한 사람이 없냐고 물으셨다. 나는 적당한 사람이 한 명 떠올라 사장님께 추천을 해드렸다. 그 사람은 바로 내가 산업기능요원 시절 내가 출하검사원이 될 때 내 앞에 근무하던 선임이었다. 그 형은 성격도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데다가 드넓은 지식을 보유한 사람이라 적당할 것 같았다.
사장님은 나의 추천 대로 그 형과 면접을 진행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채용은 되지 않았다. 일반 사원들은 '가르치면 된다'라는 생각으로 탈락 없이 누구나에게 입사의 기회를 주던 사장님이셨는데 관리자를 뽑는 모습은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렇게 2주일 가량 관리자의 자리가 공석일 때쯤 아침 조회를 하다 사장님이 말씀을 하셨다. 내부 승진을 통해 관리자를 선출하기로 했다고. 그런데 놀랍게도 그건 바로 나였다. 비하인드 스토리는 승진을 한 뒤에 들을 수 있었다. 사장님이 관리자가 없어 고민하던 시절 우리들에게 관리자를 추천하라고 했을 때 다른 동료들이 나를 추천했다고 한다.
특히 나와 함께 입사한 창립멤버들의 의견이 결정적이었다. 사장님은 그 말을 듣고 고민끝에 나를 관리자로 내부 승진 시키셨다. 이 모든 게 입사 3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다. 그 말을 듣고 너무 놀랐고 순간 자신이 없기도 했는데 사장님께서는 '너는 똑똑하니 배워가면서 하면 금방 할 수 있을 거다'라고 용기를 주셨다.
2005년 가을, 스물 넷의 나에겐 그렇게 '학생증'과 새로운 '명함'이 생겼다. 열아홉부터 사회에 나와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내가 해 온 노력이 조금씩 결실을 맺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고 곧 지옥같은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듣는 곳
http://www.bainil.com/album/3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