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서른넷 어느덧 벌써 30대 중반 나에겐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았던 30대 중반 미친 듯이 일만 하며 살아온 10년이 넘는 시간 남은 것 고작 500만 원 가치의 중고차 한 대, 사자마자 폭락 중인 주식계좌에 500 아니 휴짓조각 될지도 모르지 대박 or 쪽박 2년 전 남들따라 가입한 비과세 통장 하나 넘쳐나서 별 의미도 없다는 1순위 청약통장 복리 좋대서 주워듣고 복리적금통장 몇% 더 벌려고 다 넣어둬 CMA통장 손가락 빨고 한 달 냅둬도 고작 담배 한 갑 살까 말까 한 CMA통장 이자 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놈 가끔 연락이 와 자기는 노가다 한대 노가다해도 한국 대기업 댕기는 나보다 낫대 이런 우라질레이션 평생 일해도 못 사 내 집 한 채"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노랫말 중에서
대기업의 사내 협력업체 '관리자'라는 자리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입사한 지 3개월만에 스타트업 회사의 관리자로 승진하면서 나는 뱀의 '머리'가 됐다. 스물네 살의 어린 나이에 나에게 주어진 짐의 무게는 너무나도 가혹했다.
고등학교 시절 학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학교 조차 제대로 나가지 않았다.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실업계 고등학교로 진학한 것이 너무 원망스럽기만 했다. 그런데 사회에 나와 직접 현장에서 배운 나의 일은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그렇게 5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엔지니어'라고 불릴 수 있을 만큼 나는 성장했고 기존에 해왔던 '아날로그'를 넘어 '디지털' 세상의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 우리 회사를 선택했다.
하지만 관리자가 된 그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엔지니어'가 아니었다. 사장님을 도와 회사를 경영해야 하는 숙명을 떠 안게 된 거다. 이때부터 나는 회사가 운영되는 전반적인 사항에 대해 하나 하나 배워가기 시작했다. 관리자가 된 뒤 내가 처음으로 진행한 업무는 바로 회사의 비전과 미션을 잘 정리해 표현한 자료를 만드는 것이었다.
우리 회사는 그 대기업의 연구소 내에서 개발되는 제품의 평가, 분석을 담당하는 회사다. 아직까지는 구성원들의 역량이 미흡해 '연구 보조' 활동을 주로 하고 있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는 우리가 신뢰성 센터를 전담으로 운영을 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 회사의 비전은 '평가, 분석 전문회사'였다.
솔직히 말해 대기업에서 아웃소싱 되는 도급업무를 하는 회사에서 멋진 비전과 미션이라니 어찌보면 우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 달리 사장님은 우리 회사를 마치 자신이 근무했던 대기업의 시스템과 흡사하게 운영을 하려고 하셨다. 그렇게 만들어진 비전, 미션 자료는 사무실 현황판에 게시가 되었다. 그리고 전 사원들이 계속해서 보고 숙지를 할 수 있도록 했다.
회사의 비전, 미션 자료는 20장 정도의 파워포인트 자료로 만들어졌다. 처음에 사장님께서 머릿속에 구상한 그림들을 대충 그려서 나에게 넘겨 주셨는데 자료로는 쓸 수 없는 상태였다. 사장님도 아날로그 시절에 회사를 다니셨던 분이라 PC 프로그램을 능숙하게 다룰 줄은 모르셨기 때문이다. 그런 사장님의 머릿속에 있는 내용을 내가 어떻게든 만들어 내야했다.
당시 스물넷의 나는 파워포인트를 다룰 줄 몰랐다. 여지껏 중소기업을 다니면서 파워포인트를 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엑셀만 조금 사용했을 뿐이었다. 그런 내가 그 20장이나 되는 파워포인트 자료를 만들어야 했으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사장님께 내 상황을 말씀드리고 대안을 제시했다. 사장님은 파워포인트를 배워서 만들라고 하셨지만 업무에 주어진 일정을 맞추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내가 제시한 대안은 엑셀로 그 자료를 만드는 것이었다. 엑셀로 자료를 만들어 구성원들에게 프레젠테이션 할때는 '인쇄 미리보기' 화면을 이용해서 진행하고 출력을 해서 게시판에 게시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엑셀로 회사의 비전, 미션 자료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중간 중간 사장님께 컨펌을 받아가며 이틀을 꼬박 투자해 자료를 완성했다. 그리고 그 자료를 이용해 사장님은 구성원들에게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셨고 회사 게시판에 일정 내에 게시될 수 있었다. 그 일이 내가 파워포인트를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대기업 연구소 생활을 계속 하다보니, 많은 자료들이 파워포인트로 작성된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엑셀은 기초데이터를 계산하는 용도로 사용이 되어지고 문서의 첨부 파일로 들어갔다. 거기서 중요한 내용들만 발췌되어 파워포인트에 예쁘게 만들어졌다. 파워포인트를 능숙하게 다루는 기획부서 연구원들도 문서를 예쁘게 만드는데 투자하는 시간이 상당했다. 아마 그래서 중소기업에서는 이런 문서들을 많이 접할 수 없었던 것 같다.
회사의 비전, 미션 자료를 만드는 내 첫 번째 과제가 끝나고 이제 본격적인 업무가 시작됐다. 그건 바로 회사의 경영에 필요한 문서 파일들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 대기업에서는 문서를 정리하는 기준이 정리된 문서가 있었다. 각 부서별로 어떤 문서들을 어떻게 분류해서 관리를 해야하고 보관기간은 몇년인지 등이 나와 있었다. 사장님은 그 문서를 내게 건네주면서 우리 회사에 적용을 시키라고 하셨다.
회사의 규모가 크든 작든 운영되는 시스템은 똑같다. 직원들 급여를 줘야하니 세무 관련 서류들을 정리해서 만들어야 하고 직원들의 근태나 복리후생을 위한 인사, 총무 관련 문서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소방법 관련 문서, 공문철, 경비처리 영수증 파일 등 전반적인 회사 운영에 필요한 모든 서류들을 잘 정리할 수 있도록 그 문서정리 규정집에 나오는 대로 다 만들어야 했다.
단순히 흐트러진 문서들을 그 규정에 맞도록 정리하는것이면 어렵지 않았을텐데 아예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그 문서 파일을 새로 만들고 없는 규정을 새로 만들어 가면서 정리를 해야했기 때문에 나에겐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회사의 취업규칙 조차도 없는 상태에서 그 많은 종류의 문서를 혼자서 모두 다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어려움을 호소하면 다른 사내 협력업체 사장님의 명함을 나에게 건네 주었다. 그리고는 '찾아가서 벤치마킹 해오라'고 하셨다. 그 회사들은 이미 몇년째 사내 협력업체로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문서들이 다 있을 거라며 도움을 받아보라는 것이었다.
스물넷의 어린 친구가 당시 40, 50대들이 관리자로 있는 회사에 관리자랍시고 가서 남이 만들어 놓은 문서를 배껴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너무 가기 싫었지만 가야만 했다. 그게 아니면 이 업무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에게 붙임성도 별로 없는 나는 매점에서 피로회복음료 1상자를 사서 무작정 그 명함을 받은 회사에 찾아갔다. 그리고 고개 숙이며 필요한 문서들을 복사해 왔다.
대학 시험기간 동안 정시 퇴근... 잠시 동안의 숨 쉴 틈이었다
거의 2달간을 그 일에 매달렸다. 주로 인사/총무 쪽 문서를 새로 만들어야 할 게 많았다. 여태껏 그쪽 일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에 너무 어려웠고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하지만 내 업무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나는 회사의 관리자였기 때문에 우리 구성원들의 근태도 챙겨야 했고 고충 처리도 해주어야 했으며 계속해서 여러 분야로 확장해 가는 회사 덕분에 이력서를 받아 사장님과 함께 사람도 뽑아야 했다.
구성원들이 한두 명씩 늘어나면서 내가 챙겨야 할 일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새로 입사하는 사원들 중에는 연령이 나보다 더 높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의 눈에는 나이 어린 친구가 관리자랍시고 앉아 있다보니 만만했는지 날 더 힘들게 하기도 했다. 그렇게 일, 사람에 대한 스트레스는 점점 더 심해졌고 나는 매일 두통에 시달려야 했다.
관리자가 되고 나서는 단 하루도 제 시간에 퇴근을 해본 적이 없었다. 반면 사장님은 절대 오버타임 근무를 하지 않으셨다. 제2의 인생을 시작할 때 결심한 철칙이라고 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단 1명뿐인 관리자인 내가 더 열심히 더 많은것을 챙겨주길 바라셨다.
주5일 근무제였지만 연구소는 주말에 출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건 연구원들과 함께 일하는 우리 구성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주말 근무는 평일에 비해 조금 더 느슨하고 편안하게 하는 게 일상적이다. 그리고 꼭 필요한 일들만 챙기고 퇴근을 한다. 사장님은 우리 구성원들의 주말근무가 너무 느슨해지지 않도록 내가 나와서 챙겨주길 바라셨다. 나에겐 주말이라도 마음 편한 휴식이 필요한데 사장님의 그 바람은 날 더 힘들게 만들었다.
갑작스럽게 승진을 하고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지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는 대학에 진학을 했기 때문에 매주 올라오는 강의를 제때 들어야 했다. 처음에 사이버대학에 진학할 때는 틈틈히 강의를 들으면서 일을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과 달리 너무 바쁘고 퇴근도 늦어서 수업을 제대로 들을 시간도 없었다.
이런 생활이 계속되다가 잠시 숨돌릴 틈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대학 시험기간이었다. 사이버대학의 시험은 실시간으로 웹에 접속을 해서 시험을 치르는 방식이었다. 나와 같은 직장인들이 사이버대학을 많이 다녔기 때문에 시험시간이 평일 저녁시간대와 주말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덕에 나는 시험 핑계를 대고 시험기간 일주일 가량은 정시에 퇴근을 할 수 있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가을에 접어들었을 무렵 내가 진행하던 문서 정리 업무에도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사이 10명이던 우리 회사 구성원은 15명으로 늘어났다. 또한 연구소 기획부서에 담당자 1명으로 운영되던 우리 회사를 전담하는 새로운 부서가 구성됐고 '평가실'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방을 만드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덧붙이는 글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듣는 곳
http://www.bainil.com/album/3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