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서른넷 어느덧 벌써 30대 중반 나에겐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았던 30대 중반 미친 듯이 일만 하며 살아온 10년이 넘는 시간 남은 것 고작 500만 원 가치의 중고차 한 대, 사자마자 폭락 중인 주식계좌에 500 아니 휴짓조각 될지도 모르지 대박 or 쪽박 2년 전 남들따라 가입한 비과세 통장 하나 넘쳐나서 별 의미도 없다는 1순위 청약통장 복리 좋대서 주워듣고 복리적금통장 몇% 더 벌려고 다 넣어둬 CMA통장 손가락 빨고 한 달 냅둬도 고작 담배 한 갑 살까 말까 한 CMA통장 이자 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놈 가끔 연락이 와 자기는 노가다 한대 노가다해도 한국 대기업 댕기는 나보다 낫대 이런 우라질레이션 평생 일해도 못 사 내 집 한 채"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노랫말 중에서
연구소의 인사와 총무·기획을 담당하는 부서에 우리 회사를 관리하는 담당 연구원이 있었다. 하지만 조금씩 연구소에서 우리 회사의 위치가 잡혀갈 때쯤 새로운 부서가 생겼다. QE(Quality Engineer)그룹. 연구소에서 개발되는 제품의 평가·분석 전담하고 관리하는 부서다. 연구소 조직도상 우리 회사는 그 QE그룹 밑으로 들어갔다.
전담 부서가 생기면서 우리가 근무하는 환경에도 변화가 생겼다. 시끄러운 환경챔버(온도와 습도를 급격하게 변화 시킬수 있게 설계된 룸형 설비)가 있는 옆방을 사무실 겸 시험실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QE그룹이 생기면서 새로 만든 널찍한 새로운 공간에 '평가실'이라는 간판을 단 우리 전담 공간이 생겨났다. 평가실 외에도 우리 회사의 이름이 달린 조그만 사무실도 생겼났다. 그 사무실은 사장님과 내가 쓰는 곳이었다.
평가실이 생겼을 때 15명이던 우리 회사의 사원수는 훨씬 더 많이 늘어났다. 고등학교 실습사원부터 20대 후반까지의 연령대로 구성돼 있는 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사원 중에는 내가 산업기능요원으로 복무하던 시절 내 후임으로 수리사가 됐던 친구와 당시 TV 생산 라인의 '최종검사' 공정에 근무하던 친구도 함께 있었다. 내가 관리자로 승진하면서 추가로 사람을 뽑을 때 각자 다른 곳에 일하고 있던 친구들을 스카우트해왔다.
우리는 'PDP(Plasma Display Panel - 평판 디스플레이 소자의 한 종류)'를 평가·분석 하는 업무를 해야 한다. 하지만 관련 업종에서 일한 경력 사원을 뽑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평가실을 구성하게 되면 지금처럼 연구소 각 부서에 인력을 파견 보내 '연구보조' 업무를 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연구원들이 만든 제품들을 책임지고 평가·분석해 레포트를 만들어 내야 한다. 디스플레이 소자에 대해 아무런 기초 지식이 없는 사원들을 육성해서 새로 생기는 평가실을 운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내가 스카우트 해온 2명의 친구들을 주축으로 평소 근무 태도나 역량을 평가해 추가로 몇 명을 더 선발해 평가실 인력을 확정했다. 이제 평가실은 연구소 각 부서에서 개발된 제품이 품질보증그룹의 정식 '인증시험'을 받기전 필수로 거쳐야 하는 예비 인증시험을 하는 곳이 됐다.
단순한 연구 보조를 넘어 연구소의 한 조직이 된 우리 회사는 평가실이 생기면서 빠르게 성장해 나갔다. 평가실을 중심으로 각 부서에 파견돼 있는 연구 보조 인력들, 그리고 다른 사업장에 있는 규격실과 시료 분석실에도 우리 인력들이 파견됐다. 그렇게 이 대기업 1, 2, 3 사업장에 모두 우리 회사 인력들이 근무하게 됐다.
그만큼 빠르게 인력이 늘어가고 성장하면서 내가 챙겨야 할 일들은 훨씬 더 많아졌다. 그렇다고 관리자를 한 명 더 둘수는 없었기에 어떻게든 혼자서 해내야만 했다. 지금 30대 중반이 된 내가 당시를 돌이켜보면 훨씬 더 효율적인 관리를 할 수 있을것 같은데 스물넷의 내겐 그런 노하우가 부족했다.
관리자가 되면서 그 대기업 사내 메일 계정을 받았다. 우리 회사에는 사장님과 나 그리고 평가실, 분석실, 규격실, 공통메일 이렇게 6개의 메일 계정이 개설됐다. 메일 계정이 개설되면서 연구소 각 부서와 QE그룹에서는 나에게 이런저런 요청이 많이 밀려 들어왔다. 사원 관리와 인사 총무 업무만 해도 내 리소스는 거의 한계였는데 연구소에서 바라보는 나는 우리 회사와 그들간의 '소통 창구'로써의 역할을 해주길 바랐다. 그리고 사장님도 그걸 내가 하길 바라셨다.
관리자가 된지 반 년가량 지났을 무렵 나는 사장님께 중간 관리자 제도를 제안했다. 이제 사원수도 너무 많이 늘었고 규격실, 분석실은 다른 사업장에 있는 데다 현재 업무가 나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역부족이라고 말씀을 드렸다. 하지만 사장님은 나의 제안을 받아주지 않으셨다.
나의 제안이 거절 당하면서 조금씩 평가실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고 있는 내 친구 둘이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친구들은 친구인 내가 자신들보다 많은 연봉을 받으면서 자신들의 상사로 있었기 때문에 내가 부러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너무 힘들어서 괴로워 하는 모습을 보며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기도 했다. 그래도 그 친구들이 내 편이 돼 다른 사원들의 분위기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잘 도와주었기에 '평가실'은 내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다.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지! 말이 많냐?
QE그룹은 그룹장 이하 선임연구원 1명과 연구원 3명 총 5명으로 구성되었다. 전반적인 평가실 운영 관련해서는 QE그룹의 막내인 전문대졸 연구원이 맡게 되었는데 연령대가 우리와 가장 가까워 친구처럼 잘 지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연구원이 있었는데 그는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해 식스시그마(통계척도를 사용해 품질수준을 전량적으로 평가하는 방법) BB(Black Belt) 시험에서 만점을 받았다고 했다.
이 대기업은 식스시그마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회사로 식스시그마 벨트 등급이 높은 사람일수록 역량 있는 사원으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이제 갓 서른살이 된 그 연구원은 자신이 'BB 시험 만점자'라는 사실을 스스로도 아주 자랑스러워했다. 물론 그에 맞게 자료의 통계 분석 역량이 아주 뛰어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연구원은 대인관계에 있어서 서투른 사람이었다. 연구원들 사이에서의 관계도 그렇고 자신의 '을'인 우리 회사와의 관계에서도 좋지 못했다. 같은 회사 연구원들끼리야 같은 입장이니 화도 내고 싸울 수도 있었겠지만 '을'의 입장인 우리는 그들과 달랐다. 특히나 '관리자'라는 자리에 있었던 나로써는 그 연구원과의 관계를 최대한 원만하게 끌고가야 했는데 어려운 일이었다.
점점 그 연구원과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시작됐다. 내가 '을'의 입장이면서도 그 연구원과의 신경전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가 가지지 못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QE그룹 존재의 이유는 연구소에서 개발 되는 제품들이 정확한 측정과 평가 시스템을 거쳐 '퀄리티가 높은' 제품이 나오도록 만드는 것인데, 그 연구원은 우리 없이는 그 어떤 일도 혼자서 할 수 없었다.
제 아무리 뛰어난 통계 분석 역량을 보유한 연구원이라도 실제 제품을 만지고 다룰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오로지 'Paper Working(서류를 만들고 관리하는 일)'에만 능숙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제품을 측정, 평가해서 만들어 놓은 숫자를 가지고 분석툴에 대입해 원하는 결과값을 찾아내 보고서를 만드는게 그가 하는 일이었다. 우리의 기초 데이터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연구원만큼의 통계분석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우리가 평가한 제품의 보고서 정도는 얼마든지 만들어 낼수 있었다. 그리고 제품의 측정, 평가를 내 손으로 직접 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평가실로 들어오는 의뢰 건수와 항목만 봐도 평가 일정이 얼마나 걸릴지 그리고 평가자를 누구를 투입해야 더 좋은 결과가 나올지 한눈에 알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연구원이 다른 일정을 고려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일정에 끼워넣는 건수를 최대한 융통성 있게 조율을 하려고 노력했다.
자신이 원하는대로 움직여야할 우리가 쉽게 다뤄지지 않는다고 생각이 들었는지 조금씩 우리에게 짜증을 내며 함부로 대하기 시작했다. 평가실은 전체 연구소 각 부서에서 제품 시험의뢰를 받는 곳인데 일의 우선순위를 오롯이 자신의 실적과 연관된 일에만 두려고 하다보니 자꾸 내가 자기의 부탁만 거절하는것처럼 느껴진 모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가실이 너무 바빠 평가원들과 함께 암실(패널의 광학적 특성을 평가하기 위해 만든 어두운 방)에서 제품 평가를 하고 있는데 그 연구원이 찾아왔다. 그리고 자신이 이번에 새로 의뢰받은 일이 있다며 급한 일정으로 진행해달라고 했다. 평가실의 인원들은 각자 넘쳐나는 의뢰 건에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고 장기 프로젝트 때문에 밤을 새우는 일도 허다했다.
평가실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일정 재조율해달라'고 했다. 그러자 결국 그 연구원의 분노가 폭발해버렸다. 옆에 있던 제품 충격보호용 스티로폼을 발로 차며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지 말이 많냐?"고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화가나서 똑같이 해주고 싶었지만 '을의 관리자'라는 자리가 나를 꾹 참게 만들었다.
그 에피소드가 돌고 돌아 사장님과 QE그룹 그룹장님께 보고가 되었다. 나는 어찌됐던 내가 혼날거라고 마음 먹고 있었는데 사장님과 그룹장님은 내가 상처 받을까봐 걱정이 되셨는지 내 편을 들어주며 나를 위로해주셨다. 나도 그 일을 겪으며 생각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일인가' 그리고 또 하나 깨달았다. 대기업의 성과주의는 사람들을 극도로 '이기적'으로 만든다는 것을.
분명 회사 전체로 보면 어느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일이 없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경중을 따져서 일정 조율이 필요하면 내 일이 조금 지연되더라도 감수를 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매년 평가를 통해 성적표가 매겨지는 이 치열한 대기업 연구소에는 '배려'라는 걸 찾아 볼 수 없었다. 모두가 같은 공간에서 웃으며 지내지만 그 속은 모두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기업 연구소. 참 삭막한 곳이다.
덧붙이는 글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듣는 곳
http://www.bainil.com/album/3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