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이었던가. 처음 이지홍씨를 만났을 땐 그저 그런 친구라 생각했다. 낯섦이 주는 어색함 때문이었다. 커피 한 잔 하고 그와의 인연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러나 쉬운 인연이 어디 있으랴. 수개월 후 그에게서 한 통의 메시지가 온 것.
"이정민 기자님. 혹시 기억하시나요. 이지홍이라고. 승연 연출가랑 잠깐 뵈었던... 이번에 저희가 만든 책이 나와서 보내드릴까 해서요.(웃음) 명함이 있어서 한 번 연락드려봤어요."그랬다. 언뜻 기억나기론 그녀는 한예종 대학원을 나와서 극작가로 활동한다고 했다. 그러며 한 여성으로서, 엄마로, 노동자로, 예술가로 사는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 한 게 생각이 났다. 힘들지만 함께 나눌 사람이 있어 외롭지 않다고. 거친 삶이지만 위안이 될 동료가 있어 힘이 난다고 그녀는 말했다.
열흘이 지나 책이 도착했다. 앞서 말한 그녀의 삶이 고스란히 녹여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와 삶의 고통을 함께 나눈 이 시대 여성 마이너리티의 일상이 그대로 묻어 있다. 책의 제목은 <기록되지 않은 노동>. 그녀를 비롯한 숨겨진 여성 노동자의 그림자 노동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지고 있었다.
아무도 봐주지 않아도 그냥... 우리 이야기를 쓰자
솔직히 처음 연락을 받고 조금 당황했다. 혹시 책을 읽고 서평 기사를 써달라는 건 아닌지 부담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짧게 전한 메시지의 여운이 강했기에 시나브로 책에 빠져들었다.
어렵지 않은 내용이었다. 하지만 읽는 내내 불편했다. 화도 났다. 분노가 치밀었다. 70, 80년대에 나올 법한 노동자들의 삶이 그대로 투영되었기 때문. 야쿠르트 아줌마의 숨겨진 비애부터 조선소 엔진룸에서 일하는 하청 여성 노동자의 삶의 무게까지. 책의 무게는 가벼웠지만 그 속에 담겨진 내용은 내겐 너무 무겁고 버거웠다.
책을 쓴 기록자와 주인공들은 구분이 없었다. 단순한 글쓰기 교실을 통해 만난 친구 이상의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간도 없이, 회비도 없이, 그저 담담히 글을 쓰면 좋겠다는 생각에 그들은 그렇게 모였다. 누가 봐주지 않아도 그냥 우리들의 이야기를 써보자며 그렇게 그들은 만나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아가씨, 아줌마, 미혼모, 아내, 주부라는 이름 대신 이름 없는 여성 노동자로 살아가는 그들의 비애를 담아냈다. 욕설과 성희롱은 기본이요, 기본적인 인권조차 대접받지 못하는 그림자 노동의 삶이었다. 채 100만 원도 안 되는 저임금노동자 살아가면서 억울해도 참아야만 하는 우리 이웃 여성들의 아픔과 설움을 담아냈다.
사시사철 하루도 쉬지 않고 웃는 기계가 되어야 하는 야쿠르트 판매원 노동자, 성희롱의 사각지대에서 고통 받는 20대 행사도우미 노동자, 폭력과 위계 속에 강압당하는 운동 강사 노동자, 뱉는 침까지 맞는 수모도 감수해야 하는 톨게이트 여성노동자, 저임금·장시간 노동에 핍박당하는 돌봄 노동자들의 삶과 애환.
어디 이뿐이랴. 대접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 예술가 노동자의 호소, 독가스에 시달리는 소규모 하청공장 노동자의 치욕, 일할 권리조차 빼앗기는 장애 여성 노동자의 절규, 국적 잃고 거리에서 떠돌며 사는 이주민 여성노동자의 슬픔 그리고 학원 강사, 급식 조리원, 활동보조인, 보조출연자, 비혼모, 호텔 룸메이드 노동자 등등의 애잔한 스토리까지.
우리는 내일도 일하러 간다보면 볼수록, 읽으면 읽을수록 기가 막힌 이시대의 잔상들이 가슴에 응어리를 맺히게 했다. 인권이 보호받는 시대에서 독재시대로 쏠린 듯한 역겨움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며 외쳤던 그 절규의 목소리가 온몸의 전율로 타고내린 듯 했다.
책을 장식한 우리 여성 노동자들의 삶은 단 하루도, 단 한 번도 제대로 대접받은 적이 없다. 아니 대접을 요구한 적도 없다. 그저 진심으로 일하는 순간만큼은 함께 일하는 직원으로, 노동자로만 봐달라는 기본적인 외침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매정했다. 그 누구도 그들의 삶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마이너리티가 되지 않기로 결심했다. 스스로 목소리를 높이며, 진심으로 일하는 만큼은 아름다운 메이저리거로, 당당한 내 노동을 세상 밖으로 알리겠다고 의지를 모았다. 그리고 그들의 작은 이야기가 한 줌 빛을 만나 더 많은 사람들과 조우할 날을 기대하고 있다. 이제 그녀들은 나 홀로 투사에서 모두의 전사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바란다. 자신이 하는 노동이 짓밟히지 않기를, 하대 받지 않기를, 대가를 받을 수 있기를..왜냐하면 주어진 노동을 '진짜 열심히' 수행했으므로, 자기 삶을 지키려고 진심으로 이 일을 했으므로, 어떤 한결 같은 웃음으로 일해야 했더라도 그녀는 삶을 걸었고 진심이었으므로. 그 진심이 존중 받기를 원한다. 믿었으므로 약속이 지켜지기를 바란다. 그녀는 내일도 일을 하러 나간다..." - 책 내용 중에서 발췌 덧붙이는 글 | **여성노동자글쓰기모임 씀. 김시형, 김은선, 김향수, 류현영, 리온소연, 문세경, 변정윤, 안미선, 윤춘신, 은아, 이지홍, 최성미, 희정(삶창). 1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