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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에서
한스는 사과나무 아래 이슬에 젖은 풀밭에 드러누웠다. 온갖 불쾌한 감정과 고통스러운 불안감, 혼돈에 싸인 상념 때문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자신이 더럽혀지고, 모욕을 당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중략) 같은 시각, 아버지가 마음속으로 그토록 꾸짖던 한스는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 검푸른 강물을 따라 골짜기 아래로 조용히 떠내려가고 있었다. 구역질이나 부끄러움이나 괴로움도 모두 그에게서 떠나버렸다. 어둠 속에서 흘러 내려가는 한스의 메마른 몸뚱이 위로 푸른빛을 띤 차가운 가을밤의 달빛이 비치고 있었다.
[수레바퀴 아래서 중 / 헤르만 헤세 저]


모두가 수레바퀴 아래에 있다

한스는 낚시와 토끼 그리고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어깨는 사람들이 말하는 '현실'이라는 것이 언제나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는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 입시경쟁을 견뎌 내야만 했고, 학교에 진학해서는 좋은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원하지 않는 일을 위해서 강한 규율을 견디던 한스는 헤르만이라는 친구를 만나 일탈을 감행한다. 헤르만은 일상의 답답함 속에서 숨통을 열어준 유일한 친구였다.

일탈을 일삼던 헤르만은 결국 퇴학을 당하고, 그와 동시에 숨통이 막혀버린 한스는 학교생활을 견뎌내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온 한스는 취직을 해야 했다. 그에게 있어서 선택권은 오직 공부와 일 뿐이었다. 기계공으로 취직한 한스는 힘든 노동 속에서 지쳐 갔다. 이 와중에 생긴 사랑의 좌절은 그가 삶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저버리게 만들었다. 그는 결국 물에 빠져 죽음으로서 자유를 찾는다.

20세기 중엽에 쓰인 이 소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와 연결된다. 입시준비, 취업준비에 눌려 있는 모습, 학교 진학을 포기할 경우 바로 일을 시작해야 하는 모습, 장시간 고강도 노동에 시달리며 퇴근 후 술에 절어서 집에 들어가는 모습,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에 갇혀 자신을 점점 잃어가는 모습 그리고 한스처럼 지쳐서 죽음을 찾는 모습까지. 친구를 만나서 일탈을 하지만 죽음을 통해 자유를 얻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다시 수레바퀴를 굴려야만 한다. 죽음을 낭만화할 생각은 없다. 아니, 낭만화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통계청에 따르면 2014년 기준 국내 자살 사망자는 약1만 3836명이다. 매일 36분마다 1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다.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사회경제적 압박으로 인해 고통, 외로움, 우울함에 짓눌려 한스처럼 사라지지 않는가?

위 소설은 한스의 멘토인 플라이크 아저씨가 한스의 아버지에게 "우리 모두에게 잘못이 있다"라고 말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부족하다. 어른들의 생각만 바뀌면 한스와 같은 일을 겪는 사람들은 더 나타나지 않을 것인가? 플라이크 아저씨와 한스의 아버지도 수레바퀴 아래에 깔려 있지 않은가?

누구를 위하여 수레바퀴는 굴리나?

우리가 수레바퀴를 굴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한스와 오늘날의 우리는 공부와 일 중 하나를 선택하여 수레바퀴 아래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가? 왜 한스는 토끼랑 놀지도, 낚시와 자연을 누리지도 못하고 학교로 공장으로 가야 했을까? 무슨 특별한 답이 있겠나? 먹고 살기 위해서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 돼야 낚시대 걸어놓고 토끼랑 놀면서 섬세한 감성으로 자연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한스는 한스이고자 했으나 세상은 그의 자연스러운 기질과 사고를 수레바퀴 아래로 밀어 넣어 파괴시켜버렸다. 그렇다면 수레바퀴 아래에서 수레바퀴를 온 힘을 다해 굴리거나 아니면 거기에 눌려 죽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인 것인가? 우리는 여기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수레바퀴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 굴러가는가?

여기서 잠깐 수레바퀴 밖을 쳐다보자, 어느 작은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있다. 그들은 선하고 고결해 보이며, 부티가 나고, 예의 바르고, 지능적으로도 뛰어나다. 그들은 때로는 서로를 미워하기도 하고 욕하기도 하지만 고귀한 음식과 음료를 마시며, 교양 있는 대화로 재능을 뽐내며 서로에 관해 이야기한다. 각자의 개성을 가진 이들은 오직 한 가지의 생각에서는 일치하는데, 그것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수레바퀴를 더 빨리 굴릴 수 있는지, 수레바퀴를 굴릴 사람들을 저비용으로 더 많이 충당할 수 있는지, 수레바퀴를 굴리는 것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합법적으로 내다 버릴 수 있는지, 수레바퀴의 성능을 개선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것이다.

수레바퀴 아래에서 우리는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가? 2012년 한국은행이 발표한 한국의 전체 노동소득분배율은 59.7%였다. 노동자가 10개 만들면 6개는 가져가니까 그만하면 괜찮은 거래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정말 그럴까?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90년대 가계소득분배율은 73.5%, 기업소득분배율은 69%였다.

이후 90년대 말부터 신자유주의가 들어오면서 2014년 기업소득 분배율은 75%가량으로 상승했고, 가계소득 분배율은 65%로 하락했다. 가계부채는 1100조, 2014년 말 기준으로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65%에 달한다. 반면, 14년 1분기 30대 기업의 사내유보금은 710조 원에 달했고, 10대 재벌그룹은 여의도 면적의 62배 정도 되는 토지를 소유하게 됐다. 수레바퀴 아래의 사람들의 불행이 수레바퀴 밖의 사람들에겐 행복이다.

한국의 역대 정부들은 등에 흰 날개를 달고 머리에 노란 링을 쓰고 있건, 머리에 검붉은 뿔을 쓰고 있건 간에 기업을 위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쳐왔다. 비용을 아껴 기업의 수고를 조금이라도 더 덜어주기 위해 세계화, 비정규직, 파견 근로자, 아르바이트 노동자와 같은 고용 형태를 양산했고, 환경과 안전을 위한 규제들을 모두 완화하기 시작했다. 기업에 대한 세금을 낮추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유무역을 외치며 농민의 생존권을 짓밟아버렸다. 자유를 사랑했던 그들은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기업에 더 많은 자유를 선물해주었다.

세월호 참사와 용혜인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용혜인씨가 지난 2014년 5월 3일 오후 마포구 홍대입구역 부근에서 '가만히 있으라'가 적힌 손피켓과 국화꽃을 들고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다.
"가만히 있을 수 없다"용혜인씨가 지난 2014년 5월 3일 오후 마포구 홍대입구역 부근에서 '가만히 있으라'가 적힌 손피켓과 국화꽃을 들고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다. ⓒ 권우성

'최소비용 최대이윤'은 그들이 평생을 부르짖는 구호이자 실천이념이다. 그들 이념의 모순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를 통해서 참모습을 드러낸다. 비용을 절약하고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배의 안전을 소홀히 한 세월호는 침몰하고,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했다. 정권은 책임을 회피하며 공권력을 동원해 유족들을 막아섰다. 야당은 조용했다. 사람들의 마음은 막혀버렸고, 상처는 마음속에 갇혀 곪아가고 있었다. 용기 있는 한 청년의 작은 글 한 편이 없었다면 이들은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가 체념하고, 자괴감과 우울증에 괴로워했을 것이다.

25살 용혜인씨는 대학교에 다니면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한국의 흔한 청년이었다. 안산시에서 거주했던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랬듯이 세월호 참사를 보며 마음 아파하며 괴로워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던 용혜인씨는 한동안 넋을 놓고 살았다. 몇몇 친구들과 세월호 참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던 용혜인씨는 더 많은 사람들과 슬픔을 나눠보자는 생각에 청와대 게시판에 한 편의 글을 올린다. '가만히 있으라' 침묵 행진은 그렇게 시작됐다.

5월 18일, 누군가를 추모하는 것이 그렇게 큰 죄가 되는 일이었을까? 정권은 공권력을 동원해 추모행렬을 가로막았다. 시대는 다른 사람에 대해 생각하려는 이들에게 말했다. "그건 너희와는 관련 없는 일이다." 인간성. 그날 우리는 거리에서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 추모행렬을 이어갔다. 그리고 모두 공권력에 의해서 질질 끌려갔다. 우연히도 그날은 광주에서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투쟁에 나섰던 날이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세월호 특별법 국면에서 야당은 유족들에게 전권을 달라고 요구했다. 왜 유족들의 참여는 배제되어야 했을까? 그들은 유족들이 할 일은 슬퍼하고 도움을 청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민주주의는 국민의 참여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왜 그들만 정치와 협상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일까? 왜 '우리'는 참여할 수 없는 것인가? 정치는 '그들'의 것이었다.

달라지지 않는 그들의 정치

시간이 흘렀고,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기억은 옅어져 갔다. 정치권과 언론에서는 세월호 참사와 같은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열변을 토했다. 슬프게도 그들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규제 완화를 가속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더더욱 커졌고, 비용을 절감하여 기업을 살리고자 하는 행동은 또다시 이어졌다. 지난 1월 22일 정부는 '노동개혁 양대지침'을 발표했다. 요지는 쉽게 해고하고, 중년들이 양보하게 하여 청년들의 실업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국회는 '비정규직양산법'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파견근로자보호법안으로 불리고 있는 이 법안은 비정규직의 기한을 2년에서 4년으로 늘리는 것이 내용이다. 이 와중에 박근혜 대통령은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노동자들을 기득권 세력으로 지목했고, 경제 살리기 입법촉구 범국민 서명운동에 직접 서명하면서 국민 부름에 공감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기업활력제고법이 국회에서 223명 중 174명의 찬성으로 통과됐고, 야당은 더민주당과 국민의당으로 분열하여 인재영입에 정신이 없다. 그들의 정치는 달라지지 않았다.

수레바퀴 아래에 있는 우리들의 정치

우리들의 정치는 어떻게 시작될 수 있는가? 사실 우리들의 정치는 이미 진행되고 있다. 거리에서, 바닥에서, 하늘에서 우리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외쳤고, 소통했고, 투쟁했다. 수레바퀴 아래에서 깔려 죽지 않겠다는 우리들의 저항은 용혜인을 만들어냈다. 이제 그를 국회로 보내야 한다. 혹자는 "너희도 결국 그들과 같다"라고 비판한다. 당신들은 우리에게 권력을 원하느냐고 묻는가? 그렇다. 우리는 권력을 원한다.

그러나 그 권력은 수레바퀴 아래에서 죽어가는 사람들, 노동자 민중에 의해 창출된 권력이다. 아니면, 당신들은 우리도 결국 부패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가? 그렇다. 우리는 부패할 것이고, 부패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권력을 노동자 민중을 위해 편파적으로 사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들을 위한 권력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두렵지 않으며, 시도하기를 원한다. 노동자 민중을 위한 우리의 의도가 타락한다면 더 나은 대안과 의지를 담은 새로운 거리의 정치와 새로운 용혜인이 나타나서 낡아 버린 우리를 불태울 것이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에 대해서 미루어 걱정하는 일은 그만두도록 하자. 지금은 수레바퀴 아래에서 사람들이 더는 희생되지 않게 하는 것에 집중하자. 수레바퀴를 때려 부숴버릴 방법을 논의하자. 수레바퀴에서 벗어난 삶을 함께 설계하자.

용혜인 후보를 국회로 보내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와 명분은 분명하다. 그리고 용혜인씨는 우리의 대의를 실천할 수 있는 능력과 자질이 있음을 거리에서 증명했다. 나는, 무거운 짐을 이고서 우리의 역사를 쓰기 위해 담담히 걸어가는 그의 걸음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해 함께 할 것이다.



#가만히있으라#세월호#총선#용혜인#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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