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사유로 가는 길은 여러 방법이 있는데 사람들은 주로 레르 쎄(R.E.R C)를 추천한다. 지하철 노선표를 찾아보니 레르 쎄가 만나는 역까지 가려면 한참을 올라가야 하기에 그냥 몽파르나스역에서 트랑질리앙(transilien)이라는 외곽으로 빠지는 기차를 타기로 한다.
15분을 달려 베르사유 상띠에(Versailles-Chantiers)역에 내린 후 25분 정도를 걸어야 한다. 다른 방법에 비해 도보 시간이 긴 것이 흠이지만 그 정도는 거뜬하다. 걷는 건 이미 파리 여행 내내 너무나 익숙한 일이고, 파리는 걸어야 제대로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몽파르나스역은 메트로 외에도 교외로 나가는 기차들의 출발과 도착지라 분주하기가 말할 수 없다. 표를 사려고 매표소에 물으니 자동판매기를 이용하란다. 주머니 속 묵직한 동전들을 썼으면 좋겠기에 물었더니 지하 2층까지 내려가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그냥 카드로 자판기에서 구매하기로 하고 이리저리 눌러 본다. 불어를 영어로 바꾸고 행선지를 누르고 편도인지 왕복인지를 선택하고 또 몇 가지를 이리저리 더 누르니 왕복을 위한 티켓 2장이 나온다. 3.4유로인지 밖에 안 한다. 왕복 7유로.
생각해 보면 달랑 15분 가는 기차 요금으로는 비싼 듯도 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가 매일 파티를 열었던, 호화롭기로 이름난 그 유명한 궁전엘 실어다 줄 차비 치고는 만만한 수준이라 흠칫 놀랐다. 그리곤 이내 배시시 혼자 웃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한심하기는.
보통 사람들의 공간이 펼쳐지는 파리 교외
기차는 2층으로 되어 있다. 낯설고 재미있다. 해리포터를 호그와트 마법학교에 데려다 준 기차처럼 이 기차는 그 옛날 루이 14세가 천하를 호령하던 17세기 한복판으로 우리를 실어다 주지는 않을까 생각하며 2층으로 올라가 적당히 자리를 잡는다.
흑인 부부와 어린아이 둘, 무슬림 부부, 은발의 노신사가 입구 쪽 좌석을 차지하고 있고, 고등학생 쯤으로 보이는 여학생들 셋이 나란히 앉아 연신 종알거리고 있다. <비포 선셋>의 셀린느 같은 금발 아가씨 하나가 통로를 사이에 두고 내 옆 좌석에 자리를 잡는다. 배낭을 내려놓으며 잠시 눈인사를 나누고 각자 창밖으로 시선을 옮긴다.
평화로운 파리 교외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낮은 건물과 주택의 붉은 지붕들이 철로 너머로 펼쳐져 있다. 파리가 북적이고 흥분이 가득한 축제의 덩어리라면 5분만 벗어나도 이렇게 교외에는 어쩌면 축제로 지친, 어쩌면 일상에 충실한 보통 사람들의 익숙한 공간이 펼쳐지는 것이다.
철로와 나란히 선 살구색 담장들 위에는 알록달록한 그라피티(graffiti)가 잔뜩 채워져 있다. 기차가 속력을 내고 달리기 시작하면 그림의 선과 색은 점점 뭉개지고 희미해지며 뒤로 뒤로 사라져간다. 그러고 보니 파리의 메트로에서도 이런 풍경을 만나곤 했다. 지하철이 지나는 터널 그 좁은 공간의 철로 옆 벽면이 온통 그라피티로 채워져 있었다. 이 정도면 페인트 스프레이로 마구 흩뿌린 낙서 수준이 아니라 예술의 경지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캐나다 몬트리올에서도 이런 그라피티를 자주 목격했는데 그때는 주로 추상화 같은 그림이 대부분이었던 것에 비해 지금 이곳 파리에서는 문자들을 입체적으로 변형한 도안이 더 많다는 점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 미대 디자인학과로 유학 온 파리 출신 여학생을 가르친 적이 있는데 그 친구 전공이 타이포그래피(typography)였다. 글자의 디자인에 대한 특별한 관심은 이 나라 젊은이들의 공통점일까?
베르사유-상띠에역에 도착했다. 역사가 공사 중이라 어수선하다. 천장과 벽면에 철제 골조가 다 드러나 있고 바닥의 시멘트도 벗겨져 흉물스럽다. 공사 때문이라기보다 애초에 낡은 상태 그대로인 것 같다. 파리의 허름한 곳은 서울의 어느 곳과도 비교가 안 될 만큼 정말 허름하다.
개찰구가 문제인지 티켓의 마그네틱 선에 문제가 생긴 건지 기차표가 작동을 안 한다. 안내 창구에 같은 이유로 줄 선 사람이 너댓 명이다. 안내원에게 처리를 부탁하고 역을 빠져나오니 역 앞의 교차로부터는 또 다른 분위기다. 영락없는 교외 소도시, 한적하고 고요하며 평화롭기 이를 데 없는 전원풍의 소도시 풍경이다.
데이트 중인 연인에게 베르사유 궁전으로 가려면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물었다. 둘이서 다정하게 몇 마디 나누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대답을 한다.
"지금 이 길 그대로 쭉 걸어가면 돼. 가다가 왼쪽으로 돌아서 보면 커다란 궁이 나타날 거야. 절대 길 잃을 염려 없으니 안심하고 그냥 쭉 가. 알았지?"길이 붉은색으로 되어 있어서 찾기 좋을 거라는 팁까지 덧붙여 준다. 그런데 나중에 궁에 도착해 생각해 보니 도로의 색깔 따위는 신경 쓸 틈도 없이 시골 길 풍경에 넋이 빠져 무엇에 홀린 듯이 그렇게 베르사유 궁에 다다랐다.
고작 테이블 몇 개 늘어놓은 작은 카페, 동전 넣고 돌리는 자동 세탁실, 옛날 책만 팔 것 같은 구석진 책방, 곧 문 닫을 것 같은 궁색한 신문사, 손님이 있을까 싶은 화장품 가게, 은은한 향기가 퍼져나던 작은 꽃집.
이삼 층 정도의 낮은 건물들이 나란히 늘어선 풍경이 소박하고 정겹다. 무엇보다 길가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키 큰 가로수와 가을 색을 한껏 입은 단풍들, 떨어진 낙엽이 눈처럼 덮여 있는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길이 참 아름답다. 깊고 깊은 가을 한복판이다.
8유로 내고 집어든 1932년 밀레 화집
얼마나 걸었을까. 갑자기 앤티크 숍이 나타났다. 건물과 건물로 둘러싸인 빈터를 쿠르(cour)라 하는데, 그곳에 커다란 책장과 진열장을 벽처럼 세워두고 오래된 물건들을 늘어놓고 있다. 간판은 '앤티크 숍'이지만 동네 벼룩시장 분위기다.
누렇게 색 바랜 책과 엽서와 신문지, 재킷이 너덜너덜한 레코드판, 낡은 카메라와 램프, 빛바랜 브로치와 목걸이, 커다란 진청색 구식 오븐, 꽃문양 천이 닳을 대로 닳은 암체어, 심지어 이 빠진 접시와 찌그러진 주전자까지 없는 게 없다. 세월이 켜켜이 쌓인 자잘한 물건들이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속삭이고 있다.
"이리 와 봐요. 궁금하지 않나요? 내 이야기를 들려줄게요." 밀레의 그림과 인생에 대한 글이 담긴 1932년 화집을 발견했다. 8유로밖에 안 한다. 얼른 집어 들었다.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며 사진만 찍어대는 동양 여인이 심기를 불편하게 했는지 힐끗힐끗 쳐다보는 표정에 냉기가 흐르던 늙은 주인은 8유로를 내고 밀레 화집을 하나 사 들고 나니 더 이상 나를 신경쓰지 않는다.
파리가 가장 아름다웠다는 그 시절, '벨에포크(Belle Époque)'라 불리던 그 시대의 화집이나 글들, 혹은 신문이나 잡지를 사고 싶었지만 찾아낼 수가 없었다. 잔뜩 녹이 슨 백 년쯤 되어 보이는 하늘색 재봉틀에도 계속 눈이 갔지만 들고 갈 재간이 없어 두고 나와야 했다. 아쉽다.
가게를 나와 좀 더 걸으니 마침내 궁전이 저 멀리 보인다. 눈에 보이는 풍경의 저쪽 끝에 저기 멀리 지평선을 가르며 어렴풋이 빛나는 황금빛 성. 아직 궁까지는 한참을 더 걸어야 하는데 마음은 이미 베르사유를 다 본 느낌이다. 궁에 이르는 이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전해들은 기분인데 황금빛 저 궁전 안에선 대체 어떤 이야기들을 만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