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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화폐의 관점에서 역사를 발굴하면 역사 전체가 전복될 것이다" - 존 메이나드 케인즈

<세계 역사를 뒤흔든 금융 이야기>는 금융에 대한 책이다. 보다 정확히는 금융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인데 역사를 다루는 많은 책이 그렇듯이 독자로 하여금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보다 깊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쓰여졌다.

저자는 중국 젠서은행, 중국은행, 미국 케미컬뱅크, 세계은행 등을 거쳐 현재는 중국 금융박물관 이사장으로 재직 중인 왕웨이다. 대중에게 널리 금융지식을 보급함으로써 금융이 소수의 이익이 아닌 사회 전체의 발달에 기여하도록 하겠다는 게 책에서 밝힌 그의 목표다.

세계 역사를 뒤흔든 금융 이야기 책 표지
▲ 세계 역사를 뒤흔든 금융 이야기 책 표지
ⓒ 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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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이 책이 매력적으로 느껴진 건 중국인이 세계 금융의 역사를 다뤘다는 점 때문이었다. 지역단위로 구분돼 있던 세계경제가 하나의 체제로 사실상 통합되고 달러가 기축통화로 자리매김한 오늘, 세계 금융계의 주류인 서구인의 시선 대신 동양인의 시선에서 금융의 역사를 바라볼 수 있다는 데 기대가 컸다. 저자 스스로가 중국 문화를 바탕으로 현대 금융체계에 대한 이해를 갖춘 인물이기에 무리한 기대는 결코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기대는 적절했다. 시대적 흐름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서구발 금융시스템에 편입하게 된 중국과 중국인들, 즉 외부자의 시선에서 금융의 역사를 바라보는 저자의 설명은 인상적인 부분이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2007년 서브프라임 위기 등 일련의 금융위기를 장기적 관점에서 나타날 수 있는 작은 부작용 정도로 진단한 대목이 흥미로웠다. 그는 이 같은 문제를 가리켜 금융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작은 좌절이라 칭하고 이에 비견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들을 하나씩 언급하기 시작한다.

책은 '네덜란드 튤립 투기사건' 등 역사적으로 유명한 버블사건을 언급하고 이러한 사건들이 본질적으로 서브프라임 위기와 다르지 않음을 설명한다. 그리고는 금융이 그와 같은 위기를 겪어내며 한 단계씩 발전해왔음을 보여준다. 즉 금융시스템의 약점을 노린 인간의 탐욕이 체제를 흔들며 막대한 피해를 끼쳐온 것이 사실이지만, 금융이란 인간사회를 발전시키기 위해 구상된 거대한 체제인 만큼 이 같은 사건에 굴하지 않고 문제를 보완하며 현재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책은 전반부 내내 금융시스템의 효용이 얼마나 거대한지를 보여준다. 크게 1, 2부로 나뉜 이 책에서 1부는 '세계 금융의 역사'라 이름지어졌는데 고대 로마시대부터 중화민국 성립에 이르기까지 수천년의 역사를 '금융'을 키워드로 해석해나가는 것이다.

일례로 저자는 로마제국 쇠망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화폐정책을 이야기한다. 로마가 방만한 국가운영으로 인한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은화의 은 함량을 의도적으로 낮춰 불량화폐를 유통시켰는데 이것이 고질적이며 치명적인 인플레이션을 불러왔다고 지적한 것이다.

그는 네로 황제가 집권했던 시기에 은화 함량이 100%에서 75%로, 이후 다시 두 명의 황제를 거치며 50%까지 떨어진 역사기록을 들어 이 같은 저질화폐의 유통이 로마의 신용도를 낮추고 제후국 등 변방에 대한 통제력을 약화시켰다고 주장한다.

왕웨이는 명나라 때 재상 장거정이 시도한 은본위 화폐 개혁과 영국 조폐공장장으로 은에서 금으로 본위화폐를 바꾼 뉴턴의 사례도 잊지 않는다. 책은 이들에 의해 은과 금으로 서로 다른 본위화폐를 채택하게 된 두 나라가 300여 년 후 치르게 되는 역사적 전쟁을 언급하며 금융의 역사가 정치사나 전쟁사, 사회사와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으며 오히려 매우 가깝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중국과 동아시아 문명권 국가들에게 치욕스럽게 다가오는 아편전쟁의 이면엔 비싼 금화로 은화를 결제해야 했던 영국의 고충과 그에 따른 아편의 국가적 수출 등이 깔려 있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또 다른 놀라움은 영국의 본위화폐를 금으로 바꾼 조폐공장장이 그 유명한 과학자 아이작 뉴턴이란 사실이다.

2부는 세계 금융권에 본격적으로 편입되기 시작한 시점부터의 중국을 다룬다. 그동안 정치사적 관점으로 해석되어 온 중국 역사를 금융사적 관점에서 바라보며 금융제도의 성패가 국가의 흥망에 지대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편전쟁에서 시작해 양무운동과 청일전쟁, 신해혁명 등 굵직한 중국의 근현대사를 금융사의 관점에서 살펴보는 데 흥미로운 대목이 상당하다.

특히 청일전쟁 전후의 과정을 양국이 처한 금융상황으로 분석한 대목은 이 책의 진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함정의 수 등 객관적인 전력규모에서 일본에 앞선다고 평가됐던 청나라가 어째서 일본에게 무력하게 패한 것인지를 금융제도를 통해 설명한 것이다.

'당시 상황에서 전통적인 의미의 종합국력은 중국이 일본보다 우위였다. 당시 북양수사와 일본 연합함대인 철갑함의 수량은 6:1의 비율로 중국이 훨씬 앞섰다. 비철갑함대는 8:9로 일본이 약간 우세했지만 거의 비슷했다.' -225p

'막강한 적군 앞에서 대청해군은 선진화된 포함을 계속 구매할 수 없었다. 심지어 이미 영국 암스트롱회사로부터 구매한 순양함 두 척도 돈이 모자라 일본이 구입해 이름을 '요시노'호와 '나니와'호로 개명했다. 이 두 척의 함대(함정의 잘못, 기자 주)는 1893년과 1885년에 사용되었다. 청일전쟁 중 풍도해전과 황해해전, 위해위해전에 참가해 북양수사에 큰 타격을 입혔다.' -229p

흔히 정치사 위주로 쓰여진 주류 역사서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거둔 승리를 청나라의 부패와 일본의 서구화가 맞물려 빚어진 사건으로 설명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일본이 혁신을 거듭하며 전쟁준비에 열을 올리던 시기 청나라는 자희태후의 별장을 꾸미기 위해 해군아문의 재정까지 끌어다 쓰는 등 방탕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류 역사가 이를 다루는 과정에는 커다란 결함이 있다. 바로 금융에 대한 설명이 실종됐다는 점이다.

'일본은 서양을 배우는 과정에서 경제와 금융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국내 남서전쟁(1877)에서 공채를 발행해 전쟁차관에 성공한 경험이 있었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 정부의 재정예산 규모는 8000만 엔에 달했다. 일본 학자의 저술을 보면, 청일전쟁 차관으로 일본은 1억 1600만 엔 상당의 정부공채를 발행했는데, 그중 민간 공모는 9000여만 엔, 국고 준비금은 2500여만 엔이었다. 이와 달리 청 정부는 1894년에 처음 공채를 발행했고 금액도 얼마 되지 않았다.' -230p

책은 일본이 공채발행을 통해 부족한 재정을 조달했고 그 돈을 군사력을 확충하는데 쏟아부어 마침내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뒀다고 말한다. 그리고 같은 기간 청나라가 정부재정마저 군사력 보강에 투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인구, 자원, 재정 등 국력 면에서 객관적 열세였던 일본이 승리할 수 있었음을 설명한다.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중일 양국은 모두 은본위를 채택하고 있었고, 구미국가들은 금본위를 실시하고 있었다. 방직 관련 산업설비나 원료, 군수품 생산설비를 모두 금본위 국가에서 들여왔기 때문에 은본위제도는 일본의 산업을 발전시키기에 제약이 따랐다. 1871년 메이지 정부가 발표한 '신화폐조례'로 금본위제를 결정했지만 자금 부족으로 시행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영국을 통해 지불하는 중국의 배상금은 일본 화폐개혁에 자금줄이 되었다. 1897년 10월 금본위 화폐제도를 수립한 일본은 빠른 속도로 세계경제에 편입했고, 세계시장에서 열강들과 경쟁하게 되었다. -232, 233p

결과적으로 청일전쟁의 승리는 일본 제국주의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청나라에게 받은 전쟁배상금은 고스란히 일본의 공업, 군사, 교육 등에 투자됐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혁명적 산업화를 이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에는 부족한 국력을 군사력에 집중시킬 수 있게끔 한 금융의 힘이 큰 역할을 했다. 금융이 두 나라의 운명을 바꾼 것이다.

이외에도 책은 여러 역사적 사건의 이면에 깔린 금융의 역할을 조명한다. 그로부터 역사, 나아가 세계를 더욱 폭넓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금융의 힘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실물경제라면 상상도 하기 힘든 액수의 돈이 순식간에 국경을 건너와 실존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가치에 투자되는 순간을 목격하기도 한다. 서브프라임 사태에서 보듯 소수 카르텔의 부패가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 나아가 먼 타국의 존망에도 크나큰 영향을 미치는 걸 지켜볼 때도 있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면 인류가 과연 현재의 금융제도를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실 시장이나 정치권의 거짓말은 소수를 오랫동안 속이거나 다수를 잠깐 동안 속일 수는 있어도 오랫동안 많은 사람을 속일 수는 없다, 아니면 인류는 벌써 파멸했을 것이고 경제나 시장도 모두 붕괴되었을 것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양화만이 오래도록 살아남는다. 이런 사고의 지배를 받는 국가나 국민 그리고 화폐제도만이 계속 진화하며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9p

2007년 서브프라임 위기 때 많은 사람이 월스트리트가 붕괴될 것이라 여겼고, 금융시장도 따라서 붕괴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금융의 역사를 이해한다면 냉정한 사고를 통해 이것은 붕괴가 아니라 금융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작은 좌절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새로운 금융혁신의 기회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19p

하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금융제도에 대한 막연한 비관은 오간 데 없이 사라진다. 오히려 금융이 재화를 가장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제도임을 이해하게 된다. 금융이란 놀랍도록 효율적인 제도 안에서 인간의 탐욕은 그리 나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탐욕은 체계가 효과적으로 기능하게끔 하는 동력이 되기도 하고 체제 자체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문제는 탐욕이 체계 전체와 상관 없이 오직 사적이익으로 귀결될 때에 발생하는 것이다.

저자가 금융에 대한 지식을 대중에 보급하겠다 결심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소수의 탐욕에 금융, 나아가 사회 전체가 농락당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 말이다. 인류가 낳은 위대한 발명인 금융이 인류 전체를 위해 기능할 때 인류는 과연 어떠한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이 책이 나를 그와 같은 상상으로 이끌었다.

덧붙이는 글 | <세계 역사를 뒤흔든 금융 이야기>(왕웨이 지음 / 정영선 옮김 / 평단문화사 / 2015.05. / 14000원)



세계 역사를 뒤흔든 금융 이야기

왕웨이 지음, 정영선 옮김, 평단(평단문화사)(2015)


태그:#세계 역사를 뒤흔든 금융 이야기, #왕웨이, #정영선, #평단문화사, #김성호의 독서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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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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