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는 소설 <소나기>의 작가 황순원(1915~2000) 탄생 100주년이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소나기>에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처음에 그는 소녀의 소식을 들은 소년이 신음소리를 내며 돌아눕는 장면으로 작품을 끝냈다고 한다. 하지만 친구였던 원응서가 이는 사족이니 빼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지금과 같은 결말이 됐다고 한다.
그런데 황순원의 제자인 김종회 교수의 회고에 따르면 정작 본인은 대표작으로 <소나기>를 거론하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그의 폭 넓은 작품세계를 고려하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황순원은 17세였던 1931년 <나의 꿈>이라는 시로 등단한 후 1937년 <거리의 부사(副詞)>라는 단편소설로 소설가가 된다. 그리고 1950년 이후에는 <별과 같이 살다>를 시작으로 장편소설도 발표한다.
등단 후 70여 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는 시 100여 편, 단편 100여 편, 중편 1편, 장편 7편을 꾸준히 발표한 대작가이다. 그래서 문학평론가 권영민은 '소설가 황순원을 말한다는 것은 해방 이후 한국 소설사의 전부를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는 소설이라는 장르가 용납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시험해 왔고, 소설적 형상화가 가능한 모든 주제를 다루어 왔다'라고 평했다.
이처럼 길고 다채로운 그의 문학 활동에서 일제강점 말기는 특히 주목된다. 왜냐하면 당시의 문학 활동을 통해 20대 청년이었던 그가 암울한 시기를 어떻게 견뎌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이때(1940~1944) 쓴 총 15편의 작품은 단편집 <기러기>에 수록되어 있다.
일제는 1938년부터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을 모두 폐지하고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등 민족말살정책을 폈다. 이 때문에 당시 우리나라 문인 중 일부는 일본어로 작품을 쓰거나 친일을 했지만 황순원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우리말로 작품을 썼다. 당시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기러기'의 서문을 통해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이 모닥불과 질화로의 반짝이는 불씨같다고나 할까, 그렇게 명멸하는 내 생명의 불씨가 그 어두운 시기에 이런 글들을 적지 아니치 못하게 했다고 보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내가 이런 글들이나마 적음으로써 다름아닌 내 명멸하는 생명의 불씨까지를 아주 스러뜨리지는 않을 수 있었다는 걸 여기 말해둡니다.'
이를 반영하듯 <기러기>에는 당시 한창나이였던 황순원의 삶과 죽음에 대한 모순된 욕망이 반영되어 있다. <병든 나비>에서 죽음을 동경하던 정노인은 생명의 상징인 꽃의 흔적을 발견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애>에서 쉰다섯의 권노인은 아내의 첫아이 임신을 맞아 산모에게 지네닭탕을 먹이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노인을 주인공으로 한 이 두 작품은 암울한 현실을 배경으로 죽음과 삶 사이에서 갈등하는 황순원의 내적 세계를 잘 보여준다.
한편 <기러기>에 수록된 작품 중 <별>은 아름답지 못한 누이가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아름다움의 대상인 어머니만을 추구하는 한 소년의 모습을 담고 있다. 또 <저녁놀>은 불륜을 저지른 젊은 식모의 속곳을 찢는 소년을 보여준다. 이 두 작품은 소년을 주인공으로 하여 절대적인 미와 순결성을 추구하는 황순원의 정신세계를 보여준다. 이러한 그의 의식은 그의 작품세계와 삶을 관통하고 있다.
황순원은 투쟁의 도구가 아닌 미적 가치가 있는 언어예술로의 문학을 추구했다. 그래서 그는 혼란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도 당시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일상을 절제된 아름다움으로 표현할 뿐이다. 그의 제자인 전상국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소설도 예술이라는 것을 끝까지 해 보이는 마지막 작가'로 남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황순원은 자신의 삶에서도 미를 추구했다. 오산중학교를 다니던 15세 때 그는 학교 설립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남강 이승훈을 보고 '남자라는 것은 저렇게 늙을수록 아름다워질 수도 있는 것이로구나'(<아버지> 중)라고 감탄했으며, 훗날 3·1운동에 투신했던 '아버지도 늙으실수록 아름다워지는 유의 남자임'(<아버지> 중>을 깨닫는다.
그들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었던 그는 "내가 용기를 잃지 않는 건 나도 늙으면서 아름다워지는 축에 들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을 다듬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욕망이 아니고 기도이다"(<말과 삶과 자유> 중)라고 고백한다. 그의 제자들이 남긴 스승에 대한 회고담을 보면 그는 실제로 세속의 명예나 영리에 집착하지 않고 끝까지 '아름다운 한 인간'으로 살다 간 듯하다.
태평양전쟁으로 시국이 어려워지자 황순원은 1943년 가을에 평양에서 고향인 평안남도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로 이사한다. 그러나 고향이라고 해서 도시보다 상황이 낫지는 않았다. 그는 <내 고향 사람들>에서 '도시에 못지않게, 아니 시골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전쟁이란 것이 피부에 느껴졌다'라고 증언한다.
전쟁이 절정으로 가면서 공출과 부역이 극심해졌던 당시 그는 '방관인인 창백한 인텔리 청년'으로서 무력감을 느끼면서도 <맹산할머니> <물 한 모금> <독 짓는 늙은이> <눈>을 써낸다. 그 역시 당대를 살아갔던 수많은 '동주'들 중 한명이었던 것이다.
이 중 <맹산할머니> <물 한 모금> <눈>은 현실이 어려울수록 따뜻한 인간애가 필요하다는 것을 서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이 작품들을 통해 힘든 현실을 견디게 해주는 것은 병자를 향한 연민, 이웃에 대한 배려, 타인에 대한 신뢰와 같은 것임을 보여준다.
일제 말 독자도 없이 우리말로 글을 쓰던 황순원의 모습은 <독 짓는 늙은이>의 송노인을 떠오르게 한다. 둘은 부정적 현실 속에서 삶과 죽음에 대해 갈등하면서도 예술에 대한 집념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예술로 죽음을 극복했던 황순원은 죽음으로 예술을 완성한 송노인 그 자체이다.
지인들이 남긴 회고담을 보면 황순원은 천생 선비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문학 이외의 것으로 대중들 앞에 서기를 싫어했다. 이 때문에 그가 남긴 대담이나 소설 이이의 산문은 극히 적다. 이를 두고 소설가 오유권은 그를 가리켜 '푸른 소나무에 앉은 백학'같은 사람이라고 하기도 했다.
그에게는 선비 같은 자기 절제와 엄격함도 있었다. 소설가 전상국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늘그막의 추함이 싫어서 정년퇴직 후 아무렇지도 않게 담배를 끊는가 하면 애주가였음에도 술자리에서 절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그는 작품에도 엄격하여 작품을 끊임없이 손질하는 작가로도 유명하다. 이에 대해 전상국이 황순원에게 묻자 그는 그것이 자기 작품에 대한 애정이자 작가로서의 책임과 의무라고 답했다. 그는 한 대담에서 '그 무엇보다도 내가 엄격했던 것은 내 작품에 대해서이다, 나 자신의 편안함이나 금전을 위해서 내 마음속에 있는 독자에게 실망을 준 작품은 쓴 적이 없다'라고 고백한다.
이와 같은 그의 선비기질은 주변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친할아버지의 모습을 <할아버지가 있는 데쌍> <기러기> <황노인> 등에 반영했는데, 이 작품 속 노인들은 한결같이 정갈하고 올곧으면서도 인간미 있는 모습니다. 또한 그는 남강 이승훈이나 남강과의 인연으로 3·1운동에 참여해 옥살이를 한 아버지에 대해 아름답다고 평했는데 이와 같은 주변인이 그의 정신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가 황순원의 작품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중 하나는 우리가 그의 작품을 통해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일상성 때문에 그의 작품은 종종 민족의식이 부족하고 개인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지만 반면에 시대가 개인을 얼마나 제약하고 어떻게 변형시키는지를 잘 보여준다.
황순원은 '대패질을 하는 시간보다 대팻날을 가는 시간이 길 수도 있다'라고 말한다. 이는 한 작품이 탄생하기까지의 어려움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한편 우리 삶에 대한 위로와 격려의 말이다. 그는 어두운 현실 속에서 대팻날을 갈며 탈고 후 7년이 지나서야 세상에 나온 작품집 <기러기>를 완성했다. 그의 삶은 우리에게 '헛된 이념에 흔들리거나 세속적 가치와 타협하지 말고 묵묵히 너의 길을 가라'라고 말하는 듯하다.
덧붙이는 글 | 1월 15일 양평에 다녀와서 쓴 기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