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왜?""….""그래서? 지금…, 벌써? 일원역 옆에 있는? 알았어!""…."이런 수상한 통화가 또 어디 있을까요? 아내와 수화기 너머 누군가와의 통화 내용을 듣자니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통화를 끝낸 아내는 빨리 딸내미에게 가봐야겠다는 겁니다. 나더러 외출 준비하라고 하고는 자신도 즉각 외출 준비에 돌입하는 거예요.
궁금한 건 못 참는 내 성미를 알면서도 자초지종을 말해주지 않는 아내. 먼저 행동에 돌입하는 건 뭔가 엄청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는 조짐입니다. 방금 아내의 통화는 딸내미와의 통화였고, 그 통화의 내용이 그리 예사롭지 않다는…. 예까지는 누구라도 어림할 수 있는 거지요.
딸내미의 임신 중독... 아내의 '에이에스 사랑'
아내에게 물으면 금방 나올 팩트이지만, 묻기 전에 나름대로 0.8초 안에 좌뇌와 우뇌를 밤 굽는 기계 안의 까만 모래알처럼 굴렸습니다. 통화 후 아내의 표정으로 봤을 때 묻는 것보다 그게 더 빨랐기 때문입니다. 아주 돌차간에 통화를 유추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는 '놀람'입니다. 무언가 놀랄 일(긍정적이 아닌 부정적인)이 저쪽에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왜?"는 '평상, 보통'이 아니라 '비상, 특별'한 일이 벌어졌다는 뜻입니다. 저쪽에 비상사태가 발생한 겁니다. 그래서 이미 저쪽에서는 그 비상사태에 대비해 무엇인가 조처를 취한 상태일 겁니다.
"그래서?"는 그런 저쪽의 사태 대비에 대하여 잼처 아내가 확인하는 걸 겁니다. 으레 "지금"이란 단어를 통해 현재 그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아직'이어야 하는 상황이 '지금'이란 상황으로 바뀐 거지요. 그래서 비상사태인 거지요.
딸내미는 귀염둥이 서준이 동생을 임신한 지 9개월이 돼 갑니다. 아직은 별 탈 없이 뱃속 아기도 잘 크고요. 물론 딸내미도 남산만한 배 때문에 몸이 무겁긴 하지만 건강하고요. 우리 집에 다녀간 지 한 달도 채 안 되었답니다. 산모도 아이도 모두 건강하고 탈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평상, 보통'에 찬물을 끼얹는 팩트가 방금 전에 벌어진 겁니다. 아내의 얘긴즉슨, 딸내미에게 '임신 중독'이 있다는 겁니다. 동네 산부인과에서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원역 옆에 있는" S종합병원에 입원했다는 겁니다.
"알았어!"라는 말은 아내의 마침표 같은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갈 테니 걱정하지 말고 있어"라는 거지요. 그리고는 내게 느닷없이 명령을 내린 겁니다. 차 시동 걸 준비하라는 거지요. 장롱면허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아내(님)께서 보무도 당당하게 하늘같은(?) 남편에게 다짜고짜 이리 어연번듯한 건 무슨 이유일까요?
딸자식 에이에스(A/S), 예! 딸자식 에이에스 하는 엄마의 사랑은 그 누구도 무서울 게 없답니다. 하늘이 땅처럼 보이고, 땅이 지하처럼 보이죠. 그렇게 난 운전기사가 돼(물론 운전기사로만 갔겠습니까, 애비로서 딸내미와 뱃속 아기 걱정 돼 간 거지요) 아내와 함께 서울시티 강남의 S종합병원 분만실(병원 간판은 '분만장'이더군요)로 달려갔습니다.
손녀야! 힘들어 나은 만큼 잘 커다오
그렇게 부리나케 달려갔는데 딸을 만나는 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간호사가 통증완화제를 맞았으니 기다리랍니다. 둘이 분만장 앞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데 사위가 분만장에서 나옵니다. 평소 과묵한 사위가 사뭇 다른 모양새입니다. 그간의 사정을 상세히 장인장모께 순순히 고하는 게…, 아이 출산은 애비도 춤추게 하나 봅니다.
출산 예정 한 달 전이긴 하지만 임신 중독 때문에 아이를 낳기로 했다는 것, 산모의 혈압이 높아서 문제라는 것, 혈압을 내리지 못하면 제왕절개를 해야 한다는 것, 혈압 조절에 성공하면 자연분만으로 순산할 수 있다는 것 등등. 사위가 짧은 시간에 뱉어놓은 딸내미와 뱃속 아기에 관련된 정보입니다.
도대체 임신 중독이 무엇이기에 이리 호들갑인가 싶었습니다. 임신 중독이란 말은 많이 들었지만 정확히 그게 뭔지 몰랐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뒤져봤습니다. '임신과 합병된 고혈압성 질환'을 말한다는군요. 고혈압과 동반돼 단백뇨가 나오면 '자간전증'이라 하는데 딸내미가 그렇답니다. 경련이나 발작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도 하는데, 딸내미는 그 정도는 아니고요.
할배 노릇 하려니 임신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네요. 임산부의 비상사태가 임신 중독인 겁니다. 30분이 지났을 때 분만장 안으로 쳐들어갔습니다. 딸내미가 산소마스크를 쓰고 괴로워하며 누워있더군요. 아내와 같이 딸아이를 붙잡고 기도를 했습니다. 순산하게 해달라고. 50%가 열렸다나요. 그럼, 곧 낳겠구나 생각하고 몇 시간 후 집으로 왔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다음날 오전 4시께 나왔습니다. 16시간 정도의 산고가 있은 뒤였죠. 비록 떨어져 있지만 우리 내외는 잠을 못 이뤘습니다. 오후 10시께에는 낳겠지 했던 게 다음날 새벽 4시께 낳았으니 안 그러겠습니까. 혈압이 올라 힘을 주면 산모가 위험해 아이가 나올 때까지 마냥 기다려 낳았다고 합니다.
정상에 못 미치지만 2.25kg의 튼튼한 아이(?)를 낳았습니다. 인큐베이터 이야기도 나왔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어린이 중환자실에 입원하는 것으로 결정됐습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이렇게 조금은 요란스럽게 2016년 3월 26일 새벽, 이 할배의 또 한 명의 손주가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서준이가 아들인데 녀석은 딸입니다. 참 잘 된 일입니다. 서준이 녀석은 동생이 이렇게 어렵게 세상 구경을 하는 동안 할머니 집에서 사촌 형과 열심히 논다고 합니다. 당분간 어린이집은 쉬고 말입니다. 아직 딸내미는 혈압이 내리지 않아 입원 중이고, 아이도 당분간 중환자실을 고수할 상태지만, 생명의 신비는 그지없군요.
시간이 답이라고 믿어 봅니다. 제 어미의 혈압이 안정되고, 손녀딸도 엄마젖을 잘 빨게 되겠지요. 아내에게 "서준이 동생은 서은이라고 하면 어떨까"라고 했다가 혼쭐이 났습니다. 아내 왈, "왜 월권을 해요? 부모와 친조부모가 있는데." 하…, 이번에도 이름 지어주는 건 포기해야겠습니다. 외할아버지인 주제에. 그렇죠? 그냥 '파이팅'이나 외쳐봅니다.
"딸내미, 파이팅! 손녀딸, 파이팅!" 덧붙이는 글 | [손자 바보 꽃할배 일기]는 손자를 보고 느끼는 소소한 이야기를 담은 할아버지의 글입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관심 많이 가져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