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3월 어느 날, 파리의 기차역. 봄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우중충하고 스산한 바람이 부는 회색빛 하늘 아래, 어설픈 여행 가방을 하나 세워둔 허름한 행색의 남자가 서 있다. 남자는 검은색 크레용으로 종이에 뭔가를 끄적이고는 반씩 두 번 접어 짐꾼에게 가방과 함께 건넨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두리번거리던 남자는 주섬주섬 채비를 하곤 다시 어디론가 사라진다. 짐꾼은 부지런히 달려 라발 가에 다다른 뒤 남자의 동생 집 주소를 찾아내 현관문을 두드린다.
"내가 이렇게 갑자기 파리로 와버렸다고 화내지 않길 바란다. 많이 생각해 봤는데 이게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방법일 것 같았다. 괜찮으면 정오부터 루브르에서 기다리마."동생은 형이 방금 막 파리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담은 편지를 받아들고는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은 뒤 모자와 지갑을 챙겨들고 루브르로 향한다. 형이 그곳에서 정오부터 기다린다 했기 때문이다. 훗날 우리에게 그렇게도 사랑을 받게 될 무수한 그림들을 그려낸 그 유명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와 평생 그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동생 테오의 이야기이다.
서른셋의 고흐가 이제 막 파리에 도착했다. 애초에 동생 테오와 약속해 둔 6월보다 몇 개월 빠른 방문이다. 동생은 나름의 계획이 있었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같이 살기엔 불편하니 형과 함께 살 수 있을 만한 좀 더 큰 집으로 옮긴 후 형을 불러들일 참이었던 것이다. 형의 즉흥적인 결정과 실행이 난감하고 야속했지만 어쩌겠는가. 결국 둘은 라발 가의 좁은 아파트에 얼마간 머무른 뒤 몽마르트르에 새로 구한 집으로 이사를 한다.
이곳에 머물면서 고흐는 당시 한창 활발히 활동 중이던 인상파 화가들을 만나 교류하게 된다. 인상주의 단체전에 동참한 적은 없지만 새로운 사조를 이끌어가는 파리의 화가들과 폭 넓게 교류하며 영향을 받는다.
실제로 파리에 오기 전 네덜란드 시절의 작품들을 보면 <감자 먹는 사람들>(1885)에서와 같이 주로 농촌을 배경으로 한 인물들과 그들의 생활상을 어두운 색조로 그려낸 그림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반해, 파리 이후의 그림들은 훨씬 더 밝고 다양하고 선명한 색조를 시험하고 있다.
몽마르트르에 있던 페르낭 코르몽의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툴르즈 로트렉도 만나고 후에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된 에밀 베르나르도 만난다. 쇠라, 폴 시냑 등과 함께한 1886년 전시회는 후기 인상주의의 문을 연 순간으로 평가받고 있다.
1887년에는 후에 잠시 함께 살며 마지막 삶의 순간 한때를 공유하게 될 폴 고갱도 만난다. 파리를 떠나 남프랑스 아를로 내려간 이후에도 파리에서 만난 드가, 모네, 르누아르, 시슬레, 피사로 등 인상주의 화가들과 함께 화가 공동체를 세울 꿈을 꾼다.
파리에 체류한 2년간 고흐는 몽마르트르의 경치를 담은 여러 점의 풍경화와 정물화, 자화상 등 200여 점의 작품을 완성한다. 이십대 후반에야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10년도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2천 여 점이나 되는 작품을 남겼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그의 그림 대부분은 이 파리 체류 시절과 그 이후 아를에서 그린 것들이다. 1890년 5월 서른일곱 젊은 나이에 안타까운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전 얼마간의 일이다.
오르세 미술관에는 고흐 방이 마련되어 있다. 많은 이에게 사랑받는 반가운 그림들 여러 점을 한 자리에서 보게 되는 기쁨이 크다. 5층 인상주의 갤러리 끝자락 복도에는 커다란 유리창이 있는데 시원스런 그 유리창 밖으로 파리 풍경이 멋지게 펼쳐진다. 센 강 건너 파리 북쪽의 몽마르트르 언덕이 저 멀리 보인다. 언덕 위 사크레쾨르 성당이 햇살을 받아 하얗게 빛나고 있다. 저 언덕에서 가난한 고흐는 치열하게 고민하며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잘 알려지지 않아 늘 가난과 씨름을 해야 했던 그는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 평생 '두 가지 생각 중 하나에 사로잡혀 있다'고 고백한다. '하나는 물질적인 어려움에 대한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색에 대한 탐구'이다. 한해에 70만 명이 찾는다는 오르세 미술관에서, 세상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다는 그의 그림들을 뒤로하고 저 강 너머 몽마르트르 언덕을 바라보고 있자면 고흐의 편지 한 구절이 쓸쓸히 떠오른다.
"언젠가는 내 그림이 물감 값과 생활비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걸 다른 사람도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지금 원하는 건 빚을 지지 않는 것이다."고흐가 살았던 몽마르트르는 원래 풍차와 농지로 뒤덮인 교외의 언덕배기에 지나지 않았다. 도시가 개발되고 확장되면서 도심에 비해 상대적으로 집값이 싼 변두리 이 지역으로 가난한 예술가들의 작업실이 들어서고 값싼 아파트를 얻어 하나둘 이주해 오는 화가가 늘어나면서 몽마르트르는 자연스레 예술가들의 아지트가 된다. 몽마르트르가 예술가들의 본거지였던 시기는 1880년부터 1895년 무렵까지였다니 고흐는 그 한복판에 이곳에 머물다 떠난 셈이다.
이제는 몽마르트르의 상징이 된, 생크림 케이크처럼 새하얀 사크레쾨르 성당이 완공된 것이 1919년이니 고흐는 이 언덕 비탈길 아파트에 사는 내내 이런 거대한 성당이 서 있는 풍경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조차도 1889년 만국박람회를 목표로 건축 중이었으니, 고흐는 파리 체류 기간 내내 한창 공사 중인 이 철제 골조물의 어수선하고 흉물스런 모습만을 마주해야 했을 것이다.
<파리의 지붕>(1886)이라는 그림은 이곳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내려다 본 파리 풍경을 담고 있다. 파리를 처음 만난 이들이라면 누구나 느끼게 되는 건물들의 낮은 지붕과 그 위로 유난히 높고 넓게 느껴지는 파리의 하늘을 흰색과 회색과 푸른색을 절묘히 섞어 표현하고 있는데, 지금으로선 마땅히 서 있어야 할 에펠탑과 몽파르나스 타워가 보이질 않는다. 고흐가 조금만 늦게 파리에 당도했더라면 지금 우리는 '해바라기'나 '사이프러스 나무'만큼이나 인상적인 고흐의 에펠탑을 볼 수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내가 몽마르트르를 다시 찾은 것은 오후 8시도 훌쩍 넘은 밤이었다. 여고생쯤으로 보이는 깜찍한 파리의 소녀 세 명이 사크레쾨르 성당에 오르는 길을 알려주었다. 꼭대기까지 오르려면 계단보다는 트램을 타고 올라가야 힘도 덜 들고 재미있을 거라고 친절히 권했지만 느린 계단을 오르기로 애초에 맘을 먹은 상태였다. 언덕으로 오르는 어둡고 좁은 골목을 얼마간 지나 계단을 밟고 느릿느릿 걸어 올라가자니 나란한 옆 레일에 캡슐처럼 생긴 트램이 몇 차례 오르고 내리는 것이 보인다.
놓치지 말아야 할 파리의 10대 야경 중 하나라는 몽마르트르의 새하얀 성당을 둘러보고 나오니 계단 앞 너른 광장에 웬 청년이 트럼본을 불고 있다. 사람들은 계단을 관객석 삼아, 광장을 무대 삼아, 저 아래로 펼쳐지는 파리의 밤 풍경을 배경 삼아 공연을 감상하고 있다. 저쪽 구석에는 까만 가죽 재킷을 걸친 빨강 머리 소녀들과 어깨와 가슴팍에 현란한 타투를 새긴 바이크 라이더들이 무리지어 서서 맥주를 들이키고 있다. 파리의 좀 '놀 줄 아는' 젊은이들은 죄다 모인 듯하다.
그들의 젊음을 넋 놓고 바라보다 관광객 틈에 엉거주춤 주저앉아 잠시 노래를 듣다 내려온다.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 옆에 작은 아파트들이 서 있다. 소박해 보이는 아파트의 문틈으로 가녀린 불빛들이 새어나온다. 창문 안에 불 켜진 식탁과 주방과 서재를 기웃거린다. 몽마르트르의 아파트라... 이런 곳에 살면 예술의 혼과 창작의 열정이 절로 샘솟게 되는 걸까. '빈 방 세놓음' 표지도 가끔 걸려 있던데 저런 방 한 칸 얻어 한 몇 달만 이 언덕에 살아 봤으면.
열쇠고리, 자석, 컵, 머플러와 티셔츠가 걸려 있는 기념품 가게 골목을 걸어 내려온다. 아쉬운 마음에 이것저것 만지작거려 본다. 저녁도 굶은 터라 딱 동네 치킨집처럼 생긴 곳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는데 어찌나 짜고 느끼하던지 겨우겨우 뱃속에 넣었다. 배가 부르고 보니 조금 전 저 언덕 위에서 악기를 불고 있던 그 청년 얼굴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올 걸 그랬다 싶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파리의 야경은 기대만큼 멋지지 않았고, 몽마르트르의 화가들은 한 명도 만나질 못해 아쉬웠지만, 꿈과 열정만으로 이곳을 거쳐 갔을 수많은 가난한 젊은 예술가들과 잠시 잔을 기울인 느낌이다. 가을 밤 찬바람이 뺨을 스친다. 돈 맥클린의 <빈센트>, 'Starry starry night...'이 귓가에 맴돈다. 반 고흐가 그리도 좋아했던 밤하늘의 별이 오늘도 무심히 빛난다.